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05화 (105/250)
  • #105. 피에타 (1)

    머리는 누구보다 똑똑하지만 그 외의 것엔 젬병이었던 임석주가 수강 신청에 처참히 실패해 시간표가 엉망이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얼어 죽을 로맨스>가 첫 촬영을 시작하던 3월의 어느 날.

    경우는 지난 연말 서필진과 그의 부모님을 배웅하려 공항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손주옥 여사와의 약속을 뒤늦게 지키는 중이었다.

    “하와이 다녀오면 먼저 식사 대접하겠다고 하더니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진작 모셨어야 했는데.”

    “그냥 투정 한번 해 본 거예요. 민 작가 바쁘다는 거야 내가 잘 알지. 어쩌다 보니 소식은 간간이 듣게 되네요.”

    “하와이 여행은 어떠셨어요?”

    “여행이랄 게 뭐 특별할 게 있나. 맛있는 거 먹고 운동도 좀 하고 경치도 보고. 뻔하죠. 그나마 매일 집에서 보던 풍경이랑은 달라서 기분 전환은 됐어요.”

    보통의 청년들이 자신과 같이 나이가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반면,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경우의 모습에 손주옥은 의외라 느끼고 있었다.

    처음 손녀가 좋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탐탁지 않았는데 보면 볼수록 괜찮은 청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모처럼 식사 시간을 즐기고 있던 중 익숙한 얼굴이 저쪽에서부터 쿵쿵대며 걸어오는 모습에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손녀 강희주였다.

    “언제 어디서건 품위를 지키라고 하지 않았니? 여기가 무슨 투우장이야? 난 또 황소가 쫓아오는 줄 알았다.”

    손주옥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대던 강희주가 경우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은 채 할머니에게 따지고 있었다.

    “할머니, 이러는 법이 어딨어? 작가님 만나러 갈 거였으면 아침에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왜 안 말하고 둘이서만 몰래 만나는데?”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뭐 하는 짓이야. 얼른 자리에 앉아!”

    할머니의 꾸지람에 재빨리 자리에 앉는 모습이 영락없는 평범한 손녀의 모습이었다.

    손주옥이 강희주에게는 유독 약했으나 아무래도 재경 그룹이라는 배경에 주목을 받는 처지다 보니 이런 사소한 예의범절엔 엄격한 편이었었다. 하지만 입을 삐죽이면서도 자신의 옆이 아닌 경우의 옆자리에 앉는 손녀의 모습에 그만 웃고 말았다.

    “난 분명히 말했어. 민 작가 만나서 점심 먹을 거라고.”

    “언제? 안 그랬거든?”

    “그러게 늦게 들어왔으면 바로 잘 것이지 밤새 봤던 드라마 또 본다고 잠까지 설칠 건 뭐야? 그러니 할미가 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지.”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살아? 취미 생활도 하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야지. 안 그래요, 작가님?”

    “그럼요, 검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쯧쯧쯧. 작가님, 검사님. 언제까지 서로 그렇게 부를 거야? 평소엔 격식을 잘 차리지도 않더니만 민 작가 앞에서나 그러지.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가 더 발전이 없는 거 아냐.”

    “아, 할머니. 그런 건 우리가 알아서 해. 별거 가지고 다 참견이야!”

    “그래, 늙은이는 빠져야지.”

    그러더니 정말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경우가 당황한 듯 따라 일어섰다.

    “여사님, 벌써 가시게요?”

    “됐어요. 먹을 거 다 먹었으니 노친네는 자리를 비켜 줘야지.”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시죠.”

    경우의 말에 송주옥이 힐끔 강희주를 보며 말했다.

    “그랬다간 눈치 없이 굴었다고 집에 가서 쟤한테 얼마나 구박을 받는다구.”

    “아, 내가 언제?”

    “네가 지난번에도-.”

    손주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강희주가 서둘러 그녀의 입을 막았다.

    “하하하. 할머니 바쁘시면 어서 가 보셔야죠.”

    “하여간 나를 못 쫓아내서 안달이지.”

    “알았으면 얼른 들어가세요.”

    손녀의 재롱에 어이없이 웃던 손주옥을 가려다 경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두 사람 이렇게 나란히 있으니 보기는 좋네. 이젠 먼저 전화도 하고 종종 식사도 하고 그런다면서요? 아예 눈치가 없는 건 아닌 모양이라 다행이야.”

    이번엔 경우가 쑥스러워하자 무슨 일인가 싶은 강희주가 물었다.

    “뭐야, 할머니? 무슨 의민데?”

    “넌 몰라도 돼. 우리 둘만의 비밀이거든.”

    “나만 쏙 빼놓고, 너무해.”

    “됐으니까 밥이나 먹어. 난 가마.”

    손주옥이 돌아가고 뒤늦게 식사를 주문한 강희주는 음식이 나올 걸 기다리며 경우를 향해 씽긋 웃었다.

    ”참, 저 기사 봤어요. 작가님 제작사에서 뭐 만들었다고 하던데?”

    “아, 미드 사이트 말씀하시는 거죠? 혹시 검사님은 미드 좋아하세요?”

    “아유, 작가님 드라마 볼 시간도 없는데 미드까지 무슨. 그래도 제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면 요즘 미드 많이 본다고 하더라구요. 좋아하는 드라마는 미국에서 직접 DVD를 사 가지고 오기도 하구요.”

    강희주의 이야기에 경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어디서건 미드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플랫폼이 첫 선을 보였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현재는 사이트 홍보 차원에서 전부 무료로 제공되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게 한다든지 혹은 광고를 보기 싫은 사람들을 위해 정액제도 차차 추진할 계획이었다.

    개설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이용자 수가 생각보다 적은 편이지만 대대적인 홍보도 하고 있는 만큼 다운받을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든 보고 싶은 미드를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매력으로 작용할 게 분명했다.

    “그 사이트 이름이 뭐예요?”

    “올웨이즈!”

    “항상 가까이 있다 뭐 그런 의민가 봐요. 근데 드라마 제작사에서 미국 드라마를 가져다가 이렇게 하는 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한국 드라마의 위기라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그렇다고 사람들이 안 보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볼 사람들은 어떻게든 봅니다. 그럴 바에야 시장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게 낫죠. 그래야 높아진 시청자들 눈높이에 맞출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 테니까요. 경쟁하지 않고 안주하다 보면 도태되기 마련이에요.”

    “아, 그러니까 이 기회에 경쟁사들을 다 잡아 버리시겠다?”

    “그럴 리가요. 어디까지나 드라마 수준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올웨이즈’를 만들면서 달리 생각한 게 있었다.

    올웨이즈는 모든 미드가 무료였지만 한 가지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바로 회원 가입과 로그인. 그렇게 하면 연령대와 성별에 따른 드라마 취향을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경우는 데이터를 분석하는 전문가를 고용해 ‘올웨이즈’에서 사람들이 많이 보는 드라마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람들이 어떤 드라마를 좋아하고 어떤 내용에 흥미를 갖는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것을 SBC와 함께하기로 한 이번 프로젝트에 시도해 볼 참이었다.

    제작부 PD와 신인 작가가 모여 새 프로젝트를 위한 회의 시간에 분석 결과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수사물이 강세네요.”

    “의학 드라마도 인긴데요.”

    “이렇게 보니까 사람들이 전문 분야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를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등장인물이 전문 용어 쓰면 뭔가 멋있어 보이거든요. 지적인 사람한테 일단 호감도가 올라가는 것처럼요.”

    그렇게 분석한 것들을 토대로 SBC에서 하게 될 새로운 드라마의 틀이 조금씩 잡혀 가기 시작했다. 스토리의 뼈대를 잡는 크리에이터로 경우는 당연하고 지난해 ‘스튜디오 글로리’에 새로 합류하게 된 윤기동 작가도 의견을 보태기로 했다.

    드라마 집필에 들어갈 작가는 두 명, 신인 작가 혼자서는 너무 버겁고 둘 이상은 너무 많아 의견 조율만 하다가는 드라마 집필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 참이었다.

    스튜디오 글로리의 신인 작가들 중 미니 시리즈나 주말 연속극, 일일 연속극까지 16부 이상의 장편 드라마를 한 번이라도 집필한 경험이 있는 작가는 제외, 단막극 경력만 있는 이들로 일단 명단을 추렸다.

    거기서 작품의 성향이나 취향이 비슷한 이들로 두 명을 뽑았는데 그 사람이 구연하와 정상혁이었다.

    그렇게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경우가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 * *

    “SBC?”

    “네.”

    김예신의 보고에 윤정숙의 생각이 깊어졌다.

    자식이 커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흡족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져 컨트롤을 할 수 없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윤정숙은 경우의 퇴원 기념으로 가족끼리 식사를 하던 그날, 아들이 자신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뭐라 하시든 전 절대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까요.’

    건설사로 들어오라 했더니 물산의 지분을 누나인 민지선에게 넘기고 회사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녀석이었다. 승부를 걸 줄 아는 아들의 모습에 윤정숙은 더욱 욕심이 생겼다. 경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러니 스스로 백기를 들고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거친 야생마를 길들이면 천 리를 가는 명마를 얻는 법.

    윤정숙은 어떻게 해야 아들이 고분고분 자신의 말을 따를지 고민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윤정숙이 김예신에게 물었다.

    “SBC 사장이 누구였지?”

    “설경태 사장님이십니다.”

    “설경태? 아, 기자 출신에 보도본부장 했던 그 사람?”

    “네.”

    국립 미술관과 SBC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문화 예술 행사에 갔다가 설경태를 만난 기억을 떠올린 윤정숙은 곧바로 전화를 들었다.

    “설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예당의 윤정숙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죠.”

    윤정숙은 꽤나 오랫동안 설경태와 통화를 이어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예당미술관으로 한 남자가 찾아왔으니 SBC 드라마국의 국장 전효상이었다.

    호랑이를 앞에 둔 토끼가 된 심정으로 전효상은 손을 덜덜 떨며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 생각보다 뜨거웠지만 그 뜨거움으로 인한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연락드려서 놀라셨죠?”

    “아, 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어쩐 일로…….”

    “설경태 사장님께 여쭤봤더니 보도부 출신이시라 드라마 쪽은 전효상 국장님께 일임했다고 하던데요?”

    “아유, 당치 않으십니다. 제가 어디 드라마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열심히 자기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거죠.”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어쨌든 드라마국을 책임지고 계신 분이 전효상 국장님이라는 게 중요하죠.”

    모전자전이라고 하더니 눈앞에 윤정숙은 민경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인생의 다시 없을 출세의 기회는 개뿔, 자기 같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탈이 없다. 가늘고 길게 살자고 다시 한번 다짐하며 윤정숙이 하는 이야기를 고분고분 듣고 있었다.

    잠시 후, 지난해 경우와 전효상이 체결했다는 계약서가 어느새 윤정숙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도장을 찍은 원본이 아닌 메일에 보관해 두었던 사본이었으니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핀 윤정숙이 전효상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만, 그 계약서로 어쩌실 건지…… 아니, 제가 괜한 말씀을……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분별은 있는 사람이랍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셨는데 전효상 국장님을 곤란하게 만들 리가 있겠습니까? 제 자식이라면 모를까.”

    “예, 예?”

    분명 뭔가를 들은 것 같기는 했지만 눈앞의 태연한 윤정숙의 모습에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 거기다 윤정숙의 말이 그의 생각을 막아 버렸으니.

    “가시는 길에 약소한 선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최근 뜨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니 집이든 사모님이 하신다는 카페에 걸어 두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강원도로 쫓겨날 때 이대로 짤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생계를 위해 차린 카페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용건이 끝난 전효상이 서둘러 빠져나가자 윤정숙은 계약서를 다시 살펴보며 궁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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