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우물 안 개구리 (4)
이루어지지 않은 아쉬움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나 이상으로 사랑한 게 처음이라선지 첫사랑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한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첫사랑하면 아쉽고 애틋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김해영 작가의 차기 드라마 <얼어 죽을 로맨스>는 이런 첫사랑 미화를 부숴 버린다. 여기서 김해영 작가만의 특기가 발휘되었으니.
아주 사소한 오해로 지지고 볶고 싸워서 헤어진 두 남녀가 오랜 시간이 지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재회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연히 견원지간, 사사건건 의견 대립으로 으르렁거리는 게 꼭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을 것 같은 흥미를 일으켰다.
그러다 두 사람 사이의 숨겨진 이야기가 드러나고 그들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지는데…….
“작가님은 참 작가님만의 독특한 시각이 있어요. 도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김종수의 질문에 김해영이 수줍어하며 말했다.
“혹시 대표님도 첫사랑, 못 잊으셨어요? 남자들은 죽을 때까지 첫사랑 못 잊는다고 하잖아요.”
“당연하죠. 그래서 저는 첫사랑이랑 결혼했습니다.”
“에이.”
“사실인데 왜들 이러시나. 하하하.”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들 눈을 흘겼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
“실은 제 경험담이 조금 들어가 있거든요.”
“경험담이라면? 혹시 첫사랑하고 안 좋게 헤어지셨습니까?”
“아니요. 제대로 시작도 못 해 본걸요. 제 첫사랑은 교회 오빠였어요. 혼자 짝사랑만 하다가 고백 한번도 못 해 보고 끝났어요. 그래서 저도 첫사랑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었나 봐요. 그러다 TV에서 첫사랑 얘기하는 걸 듣는데 그 오빤 어떻게 사나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날 거의 날밤 새면서 친구들 SNS를 뒤졌죠.”
경우는 순간 김해영의 눈빛에서 어떤 광기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교회 같이 다녔던 친구들 SNS 위주로 찾다가 결국 사진 한 장을 찾아냈죠.”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요? 첫사랑에 대한 환상이 바사삭 부서졌죠. 옛날 그 오빠가 아니더라구요. 배도 나오고 머리숱도 좀 없고…….”
“아!”
“순정 만화까지는 아니었어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교회 오빠 이미지였는데 그게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제 첫사랑 생각하면 기억 속 그 오빠가 아니라 사진 속 아저씨가 떠올라요.”
“저런.”
“근데 반대로 생각하니까 나도 마찬가지더라구요. 주름도 늘고 기미도 생기고…… 언제까지고 파릇파릇한 청춘은 아니잖아요. 지금은 예전에 사귀던 남자들 안 만났으면 싶어요. 나도 모르게 늙어 버려서 미안하달까?”
“그런 말씀 송 작가님 앞에서 하시면 큰일 납니다.”
송지현에 비해 김해영은 어린 축에 속했으니.
경우의 말에 김해영이 피식 웃었다. 좀 씁쓸한 김해영의 모습에 경우가 입을 열었다.
“첫사랑은 떠났어도 드라마는 남았잖아요. 그 일이 아니었으면 작가님이 이런 드라마 생각 못 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죠. 근데 솔직히 말하면 후회는 돼요.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었을 추억이 사라진 거니까. 그만큼 충격이 컸나 봐요.”
“아, 그래서 남의 첫사랑도 망쳐 보겠다는 심보로-.”
“아니에요. 그냥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발끈하는 김해영의 모습에 다들 웃었다. 그러다 김해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드라마 아이템 회의 당시를 떠올린 경우는 이 <얼어 죽을 로맨스>가 곧 제작에 들어간다는 말에 혹시나 싶어 김해영을 불렀다.
마침 사무실에서 집필에 열중하던 김해영은 안민교 역할을 하기로 했던 배우가 개인 사정으로 하차를 하는 바람에 심란한 상황이었다.
마땅한 배우를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 속 강도열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안민교가 그리 비중이 큰 역할도 아니었고 감초 역할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강도열의 연기를 녹화한 영상을 본 김해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이런 캐릭터의 배우는 없었으니까.
“이, 이 사람 누구예요?”
그렇게 강도열은 <얼어 죽을 로맨스>에 합류하게 되었다.
* * *
드디어 <얼어 죽을 로맨스>의 첫 촬영일.
자신을 향한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낀 강도열은 신경이 쓰였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단역만 전전하던 그였기에 배우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얼굴을 아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이미 다른 배우가 대본 리딩까지 마친 상황에서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반면 스탭들은 그의 오디션에 참가한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을 들은 탓에 그 주인공이 누군지에 대한 호기심에 그를 힐끔거렸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자신을 향한 조심스러운 시선을 애써 외면한 강도열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대본을 살펴보며 나름 연기 분석에 매달렸다.
분장팀이 입혀 준 옷에 뿔테 안경까지 조금은 어색했지만 거울을 보니 호전적인 이미지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어쨌든 이번 역할을 잘 해내야겠다는 마음 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번 만남에서 경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희가 봤을 때 배우님은 한 번도 자신이 가진 특기를 살려 볼 기회도 얻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가요?’
‘그동안 오디션은 많이 보셨죠?’
‘그럼요. 한 7, 80번은 될 겁니다.’
‘주로 어떤 역이었죠?’
‘악역이죠. 주인공 괴롭히는 역으로다가…….’
‘저희가 배우님 연기를 보고 분석했는데 배우님은 악역보다는 멜로에 더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예? 멜로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가 처음 목격했던 영화 촬영 역시 조폭 이야기였고, 인상이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온 탓에 조금이라도 이미지에 맞는 역할을 찾아 오디션을 보러 다녔지만 낙방.
연기력이 부족한가 싶어 영화를 통째로 외울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를 분석하고 대사를 외우고 표정과 발성까지 따라 하려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니. 강도열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에 <얼어 죽을 로맨스>에서 배우님이 맡은 안민교가 순정남이거든요.’
첫사랑끼리 재회해 툭하면 싸우는 남녀 주인공과 달리 안민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 첫사랑이 이혼하고 돌아오자 누구보다 가슴 아파한다. 여자에게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하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키다리 아저씨처럼 여자 곁을 지켜 준다. 어떻게 보면 세상 답답한 남자였다.
주인공에게는 남자가 그래서 되겠느냐, 초반에 확 휘어잡아야 한다며 조언하지만 정작 자신은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으니.
‘솔직히 말씀드리죠. 배우님을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하는 드라마 전속 배우로 기용하는 게 어떨까 하는 의견이 딱 반반으로 나뉘었습니다.’
드라마에, 그것도 단역이 아닌 조연이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경우가 한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그래서 이번 역할을 하시는 걸 보고 앞으로 전속 배우로 제안드릴까 하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 그렇다는 건 이번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네. 물론 어떻게 배우님이 하시느냐에 달렸죠.’
강도열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다.
‘이 드라마를 오디션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가지시진 않으셔도 될 겁니다. 굳이 저희가 아니더라도 배우님 연기를 보고 다른 쪽에서 연락 올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마침 제작부에서 드라마 대본을 가져왔다. 경우가 그에게 대본을 주며 말했다.
‘소속사는 따로 없으신 거죠?’
‘네.’
‘그럼 가실 때 저희 제작부와 촬영 스케줄 논의하시죠. 아마 첫 촬영 날짜가 잡혔을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얼떨떨해하는 강도열을 보며 경우가 미소 지었다.
‘오늘 연기 좋았습니다. 딱 오늘만큼만 하시면 될 것 같아요.’
‘네. 저기……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이전에 봤을 때까지만 해도 저 부르실 때 이름에 씨를 붙였었는데 지금은 배우님이라고 하셔서요.’
‘그땐 배우로서의 강도열 씨에 대해 잘 몰랐거든요.’
‘지금은요?’
‘아주 조금? 그러니까 본 게임 시작되면 확실히 보여 주세요.’
‘알겠습니다.’
어쩐지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강도열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많은 소속사에 생각보다 다양한 배우들이 포진해 있는데 굳이 배우를 전속 계약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의견에 경우는 생각했다.
어떤 역할 하면 딱 그 배우가 생각나도록, 그 배우가 아니면 이만큼 할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의 그런 배우로 키워 보고 싶다고.
마침내 큐 사인이 들어가고 강도열이 연기를 시작했다. 그가 분석한 안민교의 모습을 경우가 지켜봤다. 경우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들어갔다.
띠링.
문자가 온 소리에 혹시나 현장을 방해할까 싶었던 경우는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오연옥 작가가 유니언 스튜디오를 택했다는 아는 기자의 문자였으니.
“오연옥? 겨우 생각한 게 오연옥 작가였구나 너는.”
예전이었다면 이런 소식에 긴장했을 수도 있겠지만.
경우는 뒤를 돌아봤다. 한창 촬영에 열중하는 강도열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자신도 박현호와 다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알고 있는 미래 정보들을 이용해 검증된 작가들을 불러 모으고 실패하지 않을 배우들을 캐스팅하면서 안주하려고만 했다. 그걸 성공이라 생각했고 그 힘으로 스튜디오 글로리를 이만큼 키워 왔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게 끝일까?
이러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도 모두 끝이 나면 그다음엔?
강도열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모험이었다. 경우는 이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경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아, 이정진 씨. 플랫폼 개발 진행 사항은 어떻게 되는지 체크하려 전화드렸습니다. 아, 거의 다 되었다고요. 알겠습니다. 네, 네. 그 부분은 저희 쪽에서 이미 준비 중에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럼.”
미국으로 간 서필진이 <크리미널 리포트>를 시작으로 불법 다운로드의 인기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다수의 드라마를 확보한 이후 번역가들의 번역까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거기다 플랫폼까지 완성된다면 그의 계획에 첫 단추가 끼워지는 것이었으니 경우는 다음을 생각하며 현장을 벗어났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얼어 죽을 로맨스>가 첫 방송을 탔다.
김해영표 현실 로맨스가 회를 거듭할수록 호평이 쏟아졌다. 남녀 주인공은 물론이고 조연들의 연기까지 주목받는 가운데 안민교 역의 강도열 역시 서서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 그 사람 누구? 안민교? 첨엔 주인공 이간질하는 흑막인 줄.
└ 이 드라마 최대 반전.
- 그런 얼굴에 이렇게 짠내 날 줄 누가 알았냐고!!
- 딱 유행가 가사 속 주인공 같네.
- 사랑이 죄지, 사랑이 죄야…
- 남자의 순정에 오늘 나도 모르게 눈물이 ㅠㅠ
- 안민교 분량 좀 늘려 줘라, 너무 짧다!!!
└ 옳소!
└ 222
- 예전에 나 버리고 간 그 여자 생각이 나네. 잘 먹고 잘 사냐?
- 아, 나도 누군가의 첫사랑이고 싶다!
강도열이 배우로서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