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03화 (103/250)
  • #103. 우물 안 개구리 (3)

    “선택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유니언 스튜디오를 따를 제작사는 없죠. 작가님이 집필하시는 동안 부족함 없이 서포트 하겠습니다.”

    송지현 작가를 잡는 데 실패해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박현호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송지현에 비견될 작가를 물색했으니 바로 오연옥 작가였다.

    공모전에 막 당선된 후 인턴 작가 시절, 남들은 단막극을 써 오는 동안 120부 일일극을 썼다는 전설적인 이야기 속 주인공이 그녀였다.

    단막극 6편, 일일 연속극 8편, 주말 드라마 3편까지. 남들보다 늦게 시작해 드라마계에 입문한 그녀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집필을 하면서 쪽박을 차도 최소 시청률 20퍼센트는 나온다는 명실상부 드라마계의 대모였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드라마 제작사에 소속되어 있는 것과 달리 그녀는 특이하게도 드라마 제작사가 아닌 엔터테인먼트사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가족이 운영하는 이름하야 1인 기획사였다. 하니 박현호는 아예 이 소속사를 인수하는 방향으로 오연옥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제작사로 평가받는 유니언 스튜디오가 자신을 위해 자신의 소속사까지 거액에 인수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보니 오연옥의 마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지시.

    결국 오연옥은 유니언 스튜디오의 식구가 되기로 결정한다.

    서필진이 떠나고 없는 마당에 졸지에 박현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입장이 돼 버린 오진원 대표는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오연옥을 데리고 왔으니 자신의 할 도리는 다했다며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그런 그를 보던 오연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뭐,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죠. 근데 듣기론 송지현 작가를 먼저 접촉했다고요? 송 작가 잡으려고 애를 많이 쓰셨다고 들었는데요. 아닌가요?”

    “아, 저도 그 소문 들어서 알고 있죠. 근데 그거 잘못 알려진 겁니다. 사실 송 작가가 다 언론 플레이를 한 겁니다. 아시잖아요. 송 작가가 친한 기자들도 많고 매체에 자주 접촉하는 거요. 스튜디오 글로리 대표가 재벌집 아들이라고 하더니 몸값 올리고 싶었나 보죠. 저희 쪽에서 접촉했다는 것도 결국 기사가 잘못 나가서 사과하러 간 거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소문이 난 건지 참…….”

    “그래요? 송지현 작가, 보기하곤 다르네. 난 또 송지현 작가 놓치고 꿩 대신 닭이란 생각에 나한테도 기회가 왔는 줄 알았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어떻게 오연옥 작가님을 앞에 두고 저울질을 했겠습니까? 작가님도 아시다시피 이 바닥이 좀 좁잖아요. 송 작가와 아예 등 돌리고 살 것도 아니라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하고 저희가 참 곤란했죠.”

    유니언 스튜디오의 대표 오진원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애써 웃음 지었다.

    송지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오연옥에게는 송지현을 향한 라이벌 의식 같은 게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결이 달랐으니.

    송지현은 젊은 남녀의 로맨스가 기본이 되는 미니 시리즈가 주력이라면 오연옥은 일일 드라마, 혹은 주말 드라마의 보다 긴 호흡의 드라마에서 강세를 보였다.

    아무래도 시청률은 오연옥 작가의 작품이 더 나왔는데 그건 일일 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이지 실력 차이라고 할 순 없었다. 거기다 광고의 영향을 받는 주 소비층인 2049세대의 선호도는 송지현이 더 높은 탓에 광고 효과가 더 낫다고 보는 송지현을 업계에서 선호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 시청률은 자신이 앞서 있는데도 고료가 송지현이 더 높은 탓에 자신이 밀린다고 생각한 오연옥은 송지현을 라이벌로 생각,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결국 유니언의 품속으로 들어온 이유를 따지자면 돈도 돈이지만 이만한 제작사의 도움을 받는다면 송지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도 영향을 미쳤다.

    “어쨌든 괜한 소문에 휩싸이지 마시고 드라마 집필에만 전념해 주세요. 아, 듣기론 작가님 다음 작품 구상하고 계시다 들었는데요.”

    “네, 안 그래도 지금 시놉시스 쓰고 있어요.”

    “그 말씀드렸듯이 작가님 새 작품을 채널 DBN의 개국 드라마로 생각하고 있는데 어떠십니까?”

    “솔직히 종편 드라마, 좀 그러네요. 뉴스에서 떠들고는 있어도 사람들 관심 밖이잖아요.”

    “그거야 언론사를 좋게 보지 않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죠. 솔직히 작가님 정도면 종편이든 지상파든 가릴 것 없잖습니까? 오히려 작가님의 종편행이 화제가 될 겁니다.”

    “그거야 그렇죠.”

    “물론 저희 쪽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할 계획입니다. 만약 작가님의 드라마가 개국 드라마가 된다면, 그래서 유의미한 성적을 거둔다면 송지현 작가를 뛰어넘어 명실상부 드라마계의 일인자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요?”

    한껏 어깨가 올라간 그녀의 모습에 오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땀을 훔쳤다.

    * * *

    겉으로 보기엔 거친 남자지만 마음 속은 여린 남자 창희, 사랑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고 결국 꽃뱀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여자 애수,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애타의 시대>.

    창희는 죽은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애수를 보며 연민을 느껴 챙겨 준다.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애수는 그런 창희의 모습에 자꾸만 흔들린다. 애써 외면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애수는 창희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어차피 밑바닥 인생, 둘이 버둥거려 봐야 나아질 것 없다 생각한 창희는 애수를 애써 밀어내는데.

    경우를 비롯해 김종수와 몇 몇 PD들이 모인 회의실 한가운데에 강도열이 서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던 그가 지시에 따라 눈을 떴다. 거기엔 강도열은 없었다. 거칠 것 없는 한 마리의 야수가 된 창희가 서 있었다.

    상대를 위협하는 건달부터 애수를 챙겨 주는 모습을 거쳐, 애수를 밀어내는 장면까지 줄줄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그의 연기를 지켜봤다.

    “너 때문에 나는 지옥으로 떨어졌는데 나만 죽을 수 없잖아. 너 죽이고 나도 죽으면 그만이야. 알아?”

    “갚을 능력이 없으면 돈을 쓰지 말았어야지. 정 안 되겠으면 몸으로 갚든가. 아직 젊고 쓸 만하잖아.”

    “멀쩡하게 생겨서 이런 짓을 왜 하냐? 하긴, 그 웬수 같은 돈 때문이겠지. 그래, 우리 한 몫 단단히 챙겨서 이 바닥 뜨자.”

    “그 새끼는 왜 사람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 기다려, 내가 배로 갚아 준다.”

    “상처 그렇게 놔두면 덧나. 이거라도 바르든가, 말든가.”

    “요 앞에서 할머니가 팔고 있길래 사 왔어. 어차피 난 옥수수 안 좋아하니까 너나 먹든가.”

    “내가 네 속을 왜 걱정해? 빈속에 술 마신 거 뭐 한두 번이야? 난 안 먹으니까 너나 먹어. 먹기 싫음 버리든가.”

    “이딴 걸 뭐 하러 사 와? 돈이 썩어 나냐? 쓸데없는데 돈 쓰지 마. 그런 식으로 돈 쓰다가 결국 이 바닥에서 못 뜨는 거야. 한 몫 챙겨서 시골 간다며?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다며? 할머니 생각은 안 하냐?”

    “너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래? 남의 등쳐 먹고 사는 사채업자 똘마니야, 내가. 근데 나 같은 거 좋아해서 뭐 할라고. 왜? 전에 너 데리고 놀다 차 버린 그놈처럼 나도 똑같이 해 줄까? 나는 뭐 그 새끼랑 다를 거 같아? 어차피 남자 다 똑같아. 정신 차려, 이 기집애야!”

    “받아 주긴 뭘 받아 줘? 사람 말 못 알아듣냐? 붕어 새끼야? 그래서 나랑 뭘 어쩌자고? 어차피 우리 둘이 만나 봐야 뻔한 거 아냐?”

    “결국 너도 울 엄마처럼 나 버리고 도망칠 거야. 너 꼭 우리 엄마 닮았어. 그래서 나는…… 네가 싫어.”

    마치 한 편의 모노드라마와 같았다.

    제대로 된 상대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트가 마련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말과 표정만으로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해 낸 강도열은 연기를 마치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결국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모습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돌아오자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창희는 온데간데없고 순박한 청년 하나가 서 있을 뿐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의 경우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어, 일단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회의 마치는 대로 결과 알려 드릴게요.”

    “오늘요?”

    “어차피 빨리 끝내는 게 좋겠죠?”

    “……네.”

    그렇게 강도열이 다른 사람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간 사이, 자리에 남아 있던 이들의 열띤 토론이 시작되었다.

    “참, 묘하네요. 생긴 건 건달 역할이 찰떡인데 건달 쪽 연기는 오히려 평범했죠?”

    “평범하다기보다 저는 오히려 선량한 사람이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채업자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일부러 더 험악한 척하는 것 같달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확실히 의도한 게 보이네요. 그런 설정이라 그런가? 멜로가 더 애절해지는데요?”

    “아, 진짜 인상만 조금 덜했으면 멜로 장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전 오히려 인상 때문에 더 기억에 남아요. 두 번은 없을 것 같잖아요.”

    “근데 문제는 시청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죠. 아무리 개성 시대라고는 하지만 직진남하고 스토커는 결국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요?”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건지 아는데 사람 생긴 거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맙시다.”

    걸리는 점도 있었지만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어차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경우였기에 모두 그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기다리는 그때 드디어 경우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우리 지금 제작 들어가는 드라마 뭐가 있을까요?”

    스케줄 표를 참고한 김종수가 답했다.

    “김해영 작가 신작요.”

    * * *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그렇게 한참이 더 흐르고 흐른 뒤에야 대표실로 불려 간 강도열은 경우가 안내한 자리로 가 앉았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드라마 제작사입니다. 배우를 케어해 주는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아니고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케어를 해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해 줄 수 없다는 말에 강도열의 얼굴에 실망감이 역력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한 오디션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구나 싶었을 무렵 경우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희 제작사에서 제작 중인 드라마 출연을 우선적으로 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예?”

    “다음 달에 김해영 작가님의 신작이 제작되거든요. 아, <곰과 여우 사이>를 집필했던 작가님이신데 이번에 차기작에 들어갑니다. 이미 MBS와 편성까지 협의해 놓은 상황이라 스케줄은 확실하고요. 작가님께 배우님 캐스팅 건으로 의논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멍한 채 눈만 끔뻑끔뻑하는 강도열의 모습에 경우가 그를 불렀다.

    “배우님?”

    “네, 네?”

    “김해영 작가님 신작이 제작될 거라고요. 아까 연기하신 거 김해영 작가님이 보시고 이번 드라마 남자 주인공 친구 역할이 있다며 거기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마침 캐스팅이 펑크 나서 물색 중이었다 하더라구요. 작가님이 배우님 연기를 참 인상 깊게 보셨는데…… 저기 괜찮으세요?”

    “저 그럼 된 건가요?”

    “네. 캐스팅을 말씀하시는 거면 그렇습니다. 배우님의 색다른 매력을 시청자들께도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앉아 있던 강도열이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러는 줄도 모르고 강도열은 경우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아하기엔 이른 것 같은데요.”

    어리둥절해하는 강도열을 보며 경우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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