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01화 (101/250)
  • #101. 우물 안 개구리 (1)

    수행 비서와 함께 걸어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재경그룹 김회장 모친인 손주옥 여사였다.

    눈속임이라고 해도 현재 경우가 만나고 있는 강희주 검사의 외할머니였으니 경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여사님, 안녕하셨습니까?”

    “민 작가가 공항엔 어쩐 일로? 혹시 어디 가요?”

    “지인이 출국을 해서요. 배웅하러 나왔습니다. 여사님은 어디 가십니까?”

    “연말에 집에만 있기 그래서. 하와이나 좀 다녀오려구. 민 작가는 요즘 어때요? 그쪽 일은 연말이 더 바쁘다고 하던데?”

    “연말, 연초 상관없이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쉴 새가 없긴 합니다.”

    “그렇게 바빠서 우리 애 항상 기다리게 하는 건가?”

    “네?”

    “듣자하니 민 작가가 먼저 연락한 적은 없다죠?”

    “아, 그게…….”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남자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는 법이 없어? 이런 눈치도 없는 사람 뭐가 좋다고. 쯧쯧.”

    “…….”

    “민 작가, 내가 손자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푸념 같은 거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알았죠?”

    “네.”

    “남자가 너무 눈치가 없어도 매력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눈만 끔뻑끔뻑하는 하는 경우를 향해 손 여사가 찡긋 윙크했다.

    “그럼 난 이만 갑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돌아오시면 제가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그럼 좋고.”

    그렇게 손주옥까지 사라지고 공항을 빠져나온 경우는 영종도를 달리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이내 전화를 걸었다.

    “강 검사님? 괜찮으시면 저랑 저녁이나 하시죠.”

    경우의 얼굴 위로 미소가 잔잔하게 퍼졌다.

    * * *

    “우리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다사다난했던 2010년이 가고 2011년이 밝았다.

    연말엔 더욱 바쁜 연예계 특성상 망년회를 대신해 신년회를 하는 ‘스튜디오 글로리’의 전통에 따라 새해가 되자 제작사 식구들은 부어라, 마셔라 서로 권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곱창집에 10여 명 예약을 하던 초반 소규모 회식과 달리 제법 식구가 늘어난 ‘스튜디오 글로리’는 식당 전체를 전세 내고도 부족할 정도였다. 거기다 단합이 얼마나 좋은지 자율 참석이라고 해도 거의 빠지는 사람이 없었다.

    작가들부터 PD를 비롯해 수많은 스탭들에 사무를 보는 직원들까지 한데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경우 역시 그들과 섞여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온 그때 부재 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두 한 사람, 우재환이었다.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경우는 그 즉시 우재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민경웁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니고…….]

    어쩐지 전화 속 그의 목소리가 밝지 않아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은 경우는 걱정이 되었다.

    지난번 만남에 그는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싶어 그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그것도 모자라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를 하라고 했던 덕에 지난번 촬영장에서의 사고가 난 직후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갔던 그였다. 당시 경우는 우재환이 생각보다 많이 다치지 않아 안도했었다.

    운명을 달리한 2010년이 지나가고 해가 바뀌었으니 그에게 불행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어디 다쳤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작가님께 의논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럼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누죠. 언제쯤 시간이 괜찮으신가요?”

    약속을 잡은 경우는 전화를 끊고 다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 * *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우재환은 어색해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경우가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다친 데는 좀 어때요? 보기엔 괜찮은 거 같은데.”

    “아, 많이 좋아졌어요. 내일부턴 다시 촬영도 하기로 했구요. 정말 작가님께 감사드려요. 작가님 말씀 아니었으면 큰 사고 날 뻔했어요.”

    “뭐 제 덕분이기야 하겠습니까? 우 배우님이 조심하신 덕분이죠. 그래도 그만하길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 저한테 달리 해 주실 말씀이 있다거나 그런 건 없나요?”

    “흐흐, 앞으로 승승장구하실 텐데요, 뭘. 뭐 오토바이는 사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위험하잖아요.”

    “안 그래도 이번 일 겪고 무서워서 못 탈 것 같더라고요. 이런 걸 트라우마라고 하나요? 사고가 안 났으면 모르겠지만 한번 경험하고 나니까 알겠어요.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건데 PD님께도 이 씬은 못 찍을 것 같다고 했어요. 다행히 이해해 주셔서 스턴트로 대체하기로 했구요.”

    “잘하셨어요. 배우가 연기에 열정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을 생각해서 촬영하는 게 더 중요하죠.”

    병원에서 만남 후 처음이었던 터라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런데 저한테 상의할 일이 있으시다고요?”

    “네. 실은…… 저와 배우 생활을 같이한 형이 하나 있는데요.”

    우재환은 이제 겨우 20대 후반.

    배우로서 일찍 성공한 것 같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배우를 꿈꾸며 온갖 오디션을 거친 탓에 그의 무명 생활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런데 그와 같이 시작한 친구가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친구로서 우재환 역시 답답한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다 그만두겠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이쪽 길이 아닌 것 같다고. 그 형 형편을 잘 알아서 더 권할 수 없었어요. 사실 잘되면 좋긴 하지만 잘 안 되면 계속 엑스트라나 보조 출연으로 생계를 이어 가야 하는데 그런 상태에서 미래를 꿈꾸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렇죠.”

    “그동안 그 형이 들인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깝긴 했지만 이해했어요. 그래서 형이 선택한 길을 응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요?”

    “작가님 드라마를 뒤늦게 봤다나 봐요. 작가님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데 미련이 많이 남은 모습이었어요.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저하고 동고동락한 형이라 모른 척하기가 그래서…….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작가님을 만나 보게 해 주고 싶어서요. 한번 만나 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친구를 위해 고개를 숙이는 우재환의 모습에 경우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카페 안에 사람도 많은 상황에서 힐끔거리는 다른 손님들의 모습에 경우는 손사래를 쳤다.

    “아, 고개 좀 드세요. 사람들이 쳐다봐요.”

    “아, 죄송합니다. 작가님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쨌든 그분을 한번 만나 보면 되는 거지요? 제 드라마에 출연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입니다.”

    “그럼요. 형한텐 이야기도 안 했어요. 아마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 거 부탁할 위인도 못 되거든요. 만약 작가님 눈에 배우로서 영 아니라고 하시면 깔끔하게 포기할 겁니다.”

    “제가 보기엔 배우님이 더 미련이 남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솔직히 저만 잘돼서 미안한 마음도 있거든요.”

    “좋습니다. 그럼 언제 저희 ‘스튜디오 글로리’로 나오라고 해 주세요. 그 전에 그분 프로필을 좀 알았으면 하는데요. 그동안 출연한 작품을 보면 도움이 될 거 같네요.”

    “아…….”

    “왜 그러시죠?”

    “아니, 그게 아니라…… 보시면 아실 테지만 큰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

    그렇게 우재환과 헤어지고 사무실로 돌아온 경우는 우재환이 메일로 보낸 친구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그는 프로필 속 친구가 출연했다는 영화와 드라마를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러다 보니 우재환이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연기력을 보여 줄 만큼 출연 분량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판단할 수 있는 건 단정하게 찍은 프로필 사진 한 장이 사실상 전부.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경우는 고심하고 있었다.

    솔직히 배우상은 아니었다. 배우 할 얼굴이 따로 있는 건 아니라지만 이왕이면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이미지가 중요했다. 이미지에 맞는 역할이라고 해 봐야 조폭이나 깡패가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인상이 날카로웠다.

    조각미남은 아니더라도 소년미가 있어서 모성을 자극했던 우재환과는 달랐다. 우재환의 친구인 탓에 자꾸 비교가 되는 것도 문제였다.

    거기다 아무리 과거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해도 이전 생에 이런 배우를 알지 못했으니 이쪽으로는 잘 풀리지 않은 그냥저냥 하다 사라진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우는 생각에 잠겼다.

    되지도 않는 일에 괜한 희망을 갖게 하는 게 옳은 일인가, 아니면 마음의 상처를 받더라도 단념하게 만들어서 빨리 자신의 길을 찾으라고 하는 게 나은 일인가?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한 사람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악역을 자처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단단히 마음 먹고 전화를 하려던 바로 그때, 프로필의 마지막 목록에 있던 영화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 * *

    “나비야, 천천히 먹어.”

    서울 시내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탑방, 어느새 하늘에선 툭툭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외투를 입지 않은 채 밖에 쪼그려 앉은 강도열은 자신이 준 먹이를 허겁지겁 먹는 고양이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꼭 내가 쓰다듬으려고 하면 도망가면서 배가 고프면 나를 찾는구나. 가만 보면 못됐어, 나비.”

    “그거야 형이 쟤한테도 얕잡아 보였으니까 그렇지. 생긴 거 하고 다르게 형은 그런 작은 것들에 약하더라. 그러니까 쟤도 그걸 이용하는 거야. 형이 호구인 거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반가운 얼굴, 우재환이 서 있었다. 가족보다 더 자주 만나는 사이였음에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강도열은 그를 무척 반가워했다.

    “어쩐 일이야? 촬영 다시 시작해서 바쁘다고 했잖아.”

    “다쳤다고 컨디션 생각해 주는 거겠지. 오늘은 일찍 끝났어.”

    “이야, 스타는 역시 대우가 다르네.”

    “스타는 무슨. 그리고 형! 동물들한테 사람 먹는 거 주는 거 아냐. 사람 입맛에 맞게 양념한 게 고양이한테 좋을 리 있겠어?”

    “그래? 평소엔 잘 안 오다가 오랜만에 와서는 밥 달라고 하도 울어 대서 급한 대로 내 비상식량을 준 거지. 나도 생활비 떨어지면 먹으려고 아껴 둔 참치 캔인데…….”

    “됐으니까 다음엔 이거 먹여.”

    우재환이 내민 봉투를 살펴보니 고양이 사료가 잔뜩 들어 있었다.

    “야, 나 먹을 건 없냐?”

    “자기 먹을 거 털어서 동네 길고양이들 밥 주는 거 생각해서 사 왔더니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형이 꼴 그 꼴이구만.”

    “치사한 자식. 예전에는 먹을 것도 잘 사 주고 그러더니 스타 됐다고 변했어.”

    강도열이 투덜대던 그때였다.

    “배달입니다.”

    언제 주문을 한 건지 족발에 보쌈은 물론 마트에서 주문한 식재료까지 한가득 도착했다. 팔짱을 낀 채 자신을 째려보는 우재환을 향해 강도열이 두 손을 모았다.

    “아이고, 형님. 재환이 형님. 크나크신 은혜에 이 아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강도열의 너스레에 우재환도 그만 웃고 말았다.

    * * *

    어느새 술병 하나가 빈 채로 굴러 다니고 배달 음식도 바닥을 보일 때쯤 담담하게 이야기한 우재환의 모습에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은 강도열이 귀를 후볐다.

    “다시 말해 봐. 뭐라고?”

    “작가님이 형 만나 주시겠대.”

    “정말? 아니 그보다, 네가 직접 작가님한테 부탁했어?”

    “그래, 내가 형 생각해서 별짓을 다한다, 진짜.”

    “재환아……. 내 동생 재환아…….”

    “그러니까 잘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해 보란 말이야.”

    “알았어, 재환아. 내가 네 얼굴에 먹칠하지 않게 잘할게. 진짜 고맙다. 정말 고마워.”

    우재환은 기뻐하는 강도열의 모습에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경우는 어디까지나 그를 보기만 하겠다는 거였지 드라마 출연을 약속한 게 아니었으니 혹시 이번 일로 그가 마음 상하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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