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00화 (100/250)
  • #100.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5)

    “울지 말고 얘기를 해야 알지.”

    “서 과장이? 그래서? 알았으니까 전화 끊어! 끊으라니까!”

    가뜩이나 바쁜데 유가희가 전화를 해서는 울고불고 하소연하는 소리에 박현호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만하면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봐 줄 만해서 데리고 다닌 건데 드라마에 꽂아 줬다고 마누라라도 되는 줄 아는지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귀찮아지고 있었다. 하니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일 처리하라고 보내 놨더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게 다 서필진 탓이란 생각에 박현호는 전화기를 들었다.

    “이봐, 서 과장. 내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보내 놨으면 뒷말 나오지 않게 제대로 처리했어야 할 거 아냐?”

    [다친 배우들 치료를 마쳤고 당분간 촬영하지 못한 우재환 씨 스케줄 고려해 제작 PD와 촬영 일정까지 논의해 스케줄 조정까지 다 해결했습니다.]

    “그 말이 아니잖아. 유가희 말이야.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저래?”

    [유가희 씨는 크게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히스테리로 스탭들을 곤란하게 하고 있어서 귀가 조치시켰습니다.]

    “여주인공이잖아. 잘 달랠 수도 있는 거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배우들 컨디션까지 고려하지 못한 점은 송구하게 생각하지만 유가희 씨는 도가 지나쳤습니다. 진상도 정도껏 부려야지요.]

    “지, 진상?”

    [분명 제 선에서 해결하라는 본부장님 지시대로 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휴가 끝나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직 휴가가 끝이 아니라서요. 그럼.]

    그러더니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여보세요? 이봐, 서 과장? 뭐야, 전화 끊은 거야? 나참, 어이가 없네. 그래, 휴간데 일시켰다고 열 받았다 이거지? 출근만 해 봐라. 가만두나!”

    유가희도 그렇지만 갈수록 기고만장해지는 서필진의 태도에 출근을 하면 그의 정신 교육을 단단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참이었다.

    “그러게 이렇게 바쁜 연말에 왜 휴가를 내냔 말이야, 휴가를!”

    2000년, 다른 언론사들과 달리 뉴스 위주의 보도 전문 채널을 개국한 대진일보는 얼마 전 종편채널 사업자로 선정돼 ‘대진TV’라는 채널명을 ‘채널 DBN’으로 바꾸고 내년 말 개국 준비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이야 모회사인 대진일보의 셋방살이 신세로 9층 미디어 사업부를 채널 DBN으로 간판만 바꿔 단 것뿐이었지만 대진일보와는 엄연히 별개의 회사였기에 드디어 자신의 꿈에 한발 다가간 박현호는 기분이 남달랐다.

    개국도 해야 하고 셋방살이를 벗어나려면 신사옥도 지어야 했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해야 할 일이 산재해 있는 하필 이런 중요한 시점에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서필진이 휴가로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가족들이 미국에 있는 탓에 박현호는 남들이 쓰는 여름 휴가가 아닌 설 명절 전후로 휴가를 썼다. 그랬던 것을 이번엔 부모님이 한국에 오시는 바람에 연말연시로 바꾼 것을 두고 박현호의 불만은 커져 가고 있었다.

    * * *

    지난번 아마추어 미드 자막부원들이 모인 이래로 그날 참석했던 전원이 번역 일을 하겠다며 소식을 전해 왔다. 어차피 나가는 돈은 편당 한 사람의 몫이었으니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번역의 퀄리티는 높아질 게 분명했다. 해서 경우는 거기 참석한 모든 인원이 긍정의 의사를 표시해 오자 다행이라 여겼다.

    서필진도 오겠다고 했고 번역가도 구했으니 이제 중요한 건 미드를 볼 수 있는 스트리밍 플랫폼이 문제였다.

    미리 이번 사업에 대해 경우에게 들었던 김종수가 우려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쪽에 대해 제가 아는 건 없지만 드라마를 보려면 매끄러운 영상 전달이 중요할 것 같은데요. 그 영상 끊기는 걸 뭐라고 하죠?”

    “버퍼링이요?”

    “맞아요. 버퍼링. 오죽했으면 그런 걸 개그 소재로 삼았겠어요?”

    “저도 그 문제점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제 소신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소신이라면?”

    “약사는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이런 건 이 분야 전문가에게 물어야죠.”

    뭔 소린가 싶어 김종수가 의아해하는 그때 그들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제멋대로 뻗어 나간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에 두꺼운 뿔테 안경,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상당히 앳된 한 남자였다.

    “김광현 교수님 소개로 오신…….”

    경우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남자가 꾸벅 인사를 했다.

    “이정진이라고 합니다.”

    경우의 안내로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가고 은밀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혹시나 방해될까 싶어 들어가지 못하고 궁금한 마음에 김종수는 한참이나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화를 끝냈는지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이 회의실을 나오고 남자가 돌아가자 김종수가 경우를 붙잡았다.

    “저 사람, 누굽니까? 보기엔 그냥 학생 같은데.”

    “학생 맞습니다.”

    “네? 아깐 전문가라고 하셨잖습니까?”

    “당연히 전문가죠. 카이스트 전산학부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는데 수업이 따분하다고 수업 시간에 교수 컴퓨터를 해킹했답니다.”

    “예? 그래도 된답니까?”

    “저 학생을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해킹당한 교수님이었는걸요. 아직 학생이긴 하지만 실력은 꽤 좋은 모양이에요.”

    수긍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김종수에게 경우가 뒷말을 붙였다.

    “다른 건 다 됐고 천만 명이 동시에 접속해도 영상 끊김 없이 볼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처, 천만 명이요?”

    “좀 적죠?”

    “아니요, 많은데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미드를 보지는 않을 텐데요.”

    “앞으로 이쪽 사업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데 이 정도는 준비해야죠. 뭐 서버만 잘 구축되어 있다면 플랫폼 자체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더군요. 이참에 강원도 쪽에 서버만 따로 관리할 수 있는 건물을 하나 지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문제군요.”

    도무지 경우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김종수는 자신이 들었던 것보다 규모가 커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긴 휴가를 끝내고 서필진이 복귀한 후, 박현호는 대진일보 미디어 사업부의 본부장에서 채널 DBN의 전무가 되었다.

    테이블 위에 작은 꽃바구니를 놓은 서필진이 박현호에게 다가가 살짝 목례를 했다.

    “전무로 영전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이제 서 과장도 승진해야지. 말만 해. 무슨 자리를 원해? 내가 봤을 땐 본부장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말이야. 부서는 어디로 할까? 편성? 제작? 아, 사업 본부도 있구나.”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나도 서 과장한테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먼저 말씀하시죠.”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과 시간 보내려고 휴가까지 낸 서 과장 불러다 일 시킨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한국에 오신 지 10년 만이었습니다.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온 걸 빼면 20년 만이었죠.”

    “……그랬어? 어쨌든 뭐 그건 내가 미안하게 생각해. 그런데 일은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안 되지. 그날 유가희가 나한테 전화해서 얼마나 하소연했는지 알아? 명색이 내가 말이야-.”

    “그런 사소한 감정에 휩싸여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과 사는 엄연히 구분해야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자신의 말을 끊고 자기 할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박현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거야?”

    “전무님이 되셨으니 지위에 맞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서 과장 많이 컸네.”

    “하실 말씀 다 하신 것 같으니까 제 용건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뭔데?”

    서필진은 대답 없이 흰 봉투를 박현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싶어 열어 보는데 안에는 흰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를 꺼내 본 박현호의 얼굴이 실망으로 굳어졌다.

    “이제 지금 무슨 짓이지?”

    “오늘부로 그만두겠습니다. 이미 이 비서와 김 대리에게 인수인계했습니다. 내일부터 제가 출근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에는 아무 지장 없을 겁니다.”

    “이봐 서 과장, 갑자기 왜 이래? 유가희 때문에 그래? 휴가 때 불러내서? 서 과장 원래 이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이었어?”

    “그런 게 아닙니다. 현실을 깨달은 것뿐입니다.”

    “현실? 현실이 어떤데?”

    “전무님, 우리 뉴욕에 있었을 때 기억나십니까? 그때 전 본부장님 참 매력적인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저한테 그러셨죠.”

    ‘언제까지 사람들이 신문을 볼 것 같아? 학창 시절 새벽에 신문 배달하면서 용돈 벌고 낮엔 공부했단 거 이제 옛날 얘기가 될 거야. 신문을 보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겠지.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보지도 않는 신문에 광고를 실을 기업은 없어. 그럼 자연히 신문사는 사양 산업이 될 거야.’

    ‘영상 미디어. 앞으로 사람들은 손에 들고 다니면서 TV를 보게 될 거야. 들고 다니면서 보기 편하게 짧게 편집된 형식도 나오겠지. 신문에 난 기사보다 TV에 나온 방송인의 말 한마디에 대한민국이 들썩이게 될 거라고.’

    “그래서?”

    “전 제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굳이 제가 아니어도 된다는 걸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표 쓰고 여기 나가면 뭘 어쩔 건데?”

    “제가 꼭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갈 생각입니다.”

    “거기라고 다를 것 같아? 사람 사는 거 똑같아.”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그냥 내 밑에서-.”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서필진의 모습에 심상치 않다고 느낀 박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불렀다.

    “야, 서필진! 너 그렇게 가면 후회할 거야, 내가 가만둘 것 같아?”

    그러자 서필진이 우뚝 멈춰 서 천천히 돌아봤다. 그 눈빛이 너무 서늘해 박현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있어서 충언을 하나 드리자면 말이죠…….”

    단정하게 맨 넥타이를 잡아 흔들며 느슨하게 한 서필진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껏 불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말끝마다 반말이야, 반말이. 현호야, 내가 너보다 한 살 형이야. 그래, 나 1년 꿇었다. 미국에선 다 이름 부르니까 그렇다고 치자. 한국 와서는 상사라고 나는 꼬박꼬박 존댓말 쓰는데 너는 말끝마다 반말이더라. 장유유서는 어디 날려 먹은 거야.”

    “…….”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말하면 형이 안 참아. 이제 너 내 상사 아니니까 너도 나한테 말 똑바로 해라. 알았냐?”

    그렇게 휙 돌아서 나가더니 문을 열려다 말고 확 뒤돌아보자 박현호가 움찔했다.

    “왜? 불만 있어?”

    “아니……요.”

    “그래, 그럼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렇게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몸담은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시원할 줄로만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서필진은 마지막으로 대진일보 본사를 올려다봤다. 하늘과 곧 맞닿을 것 같은 높이의 빌딩을 뒤로 하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 * *

    가족들과 보냈던 명절 연휴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면 공항에서 부둥켜안고 눈물, 콧물을 다 쏟았었다.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 미국에 함께 간다고 하니 서필진의 부모님은 선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대신 그들의 미국행이 적적하지 않도록 공항을 배웅 나온 사람이 있었으니.

    서필진의 부모님은 마치 친척과 작별 인사를 하듯 경우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마지막을 아쉬워했다.

    “경우야, 몸 건강하고. 언제 미국 올 일 있으면 꼭 와. 맛있는 밥 해 줄게.”

    “내가 펍은 꽉 잡고 있으니까 투어 시켜 주마. 그 꼬장꼬장한 코쟁이 놈들도 내가 다 휘어잡았다는 거 아냐, 하하하.”

    “네. 미국 갈 일 있으면 꼭 갈 테니까 어머님, 아버님 건강하세요.”

    그렇게 부모님과 인사를 나눈 후 경우와 서필진은 부모님과 떨어진 곳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바로 미국으로 돌아갈 줄은 몰랐습니다.”

    “놀라고 보내 드리는 거 아닙니다. 좋은 작품 많은데 다른 데서 사 가기 전에 선점해야죠.”

    “걱정 마세요. 될 수 있는 대로 싼 가격에 싹 쓸어 보겠습니다.”

    “아무거나 막 사시면 안 되고요.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걸로 합시다. 제가 빠뜨리면 안 되는 목록 보내 드릴 테니까 참고하세요.”

    “네. 걱정 마세요.”

    환하게 웃으며 출국장 안으로 세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경우 역시 돌아섰다.

    공항을 나가려는 그때 익숙한 얼굴의 한 사람이 공항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경우가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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