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99화 (99/250)
  • #99.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4)

    서필진이 입을 열려는 순간, 베란다의 문이 열리고 서필진의 아버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추운데 거기서 뭣들 해. 들어와. 들어와서 과일 먹어, 응?”

    “네, 아버님.”

    안으로 들어간 경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필진은 하마터면 그의 손을 잡겠다고 그 자리에서 말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실로 들어가 과일을 먹고 순간에도 서필진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가족들과 경우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그는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 *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커피를 받아 든 경우가 자리를 물색하려던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님!”

    “우 배우님을 여기서 다 뵙네요.”

    그곳에 우재환이 서 있었다. <비밀의 계단> 촬영 이후 오랜만이었다.

    <비밀의 계단>이 유의미한 흥행 성적을 거두고 동시에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은 우재환은 이번 역할로 연기 변신에 성공, 치솟는 인기에 인터뷰는 물론, 화보 촬영에, 예능 출연까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회사에 들렀다가 잠시 짬이 난 우재환은 마침 경우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그를 붙잡았다.

    “사무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도 배우님 뵙기가 참 어렵군요. 요즘 바쁘시죠?”

    “이게 다 작가님 덕분이잖아요. 포기한 영화 다시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결과가 좋으니 다행이네요.”

    “근데 이 근처는 어쩐 일이세요? 혹시 저 만나러 오신 거예요?”

    “가끔은 기분 전환 겸 멀리까지 산책을 나오는 편이라…….”

    “에이, 하여간 작가님 거짓말 참 못하셔. 이럴 때 저 보러 왔다면 빈말이라도 해 주시지.”

    사실 경우가 사무실과 조금은 떨어진 이곳까지 산책 핑계를 대면서 온 것은 우재환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를 만나기 위해 경우는 김강철을 시켜 우재환의 생활 패턴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카페에서 우재환을 만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전 생에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해야 했던 우재환. 그 시기가 <비밀의 계단>을 촬영했던 그해 말이었으니 시기적으로 딱 지금이었다. 그때와 지금이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어쨌든 미리 대비를 해 두는 편이 낫지 싶었다.

    문제는 연말쯤 교통사고를 당한다는 것만 알았을 뿐, 정확히 언제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는 몰랐다.

    “그럼 새 작품은 아직 안 하시는 겁니까?”

    “왜요? 혹시 차기작 준비하시게요? 어? 그러고 보니까 드라마 끝난 지 얼마 안 되지 않으셨어요?”

    “저야 드라마 끝나고 곧장 다음 거 준비하기엔 시간이 이르죠. 뭐 회사 차원에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경우가 신인 작가들과 프로젝트를 한다는 소문은 익히 퍼진 상태였기에 우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새 작품 촬영 시작했어요. 드라마로요.”

    “아, 그렇습니까? 어떤 드라만지 궁금한데요?”

    “북한과 관련된 거대 비밀 조직의 테러를 막기 위해 싸우는 국정원 역할이에요.”

    그러고 보니 준 리차드에게 들어왔던 역할이 바로 이 드라마의 킬러였으니 잘했으면 한 화면에 담긴 두 사람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 어디까지나 주인공만 돋보이는 드라마였던 터라 두 사람의 맞대결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요즘 촬영 아니면 액션 스쿨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중인데 팔, 다리, 어깨,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그런 것 치고는 얼굴이 너무 말짱한데요?”

    “작가님은 항상 저를 좋게 봐 주시니까 그렇죠.”

    “제가 그랬습니까?”

    “네. 그러셨어요.”

    “아, 듣기론 김준원 작가님 작품이라죠?”

    “알고 계셨어요?”

    “자세히는 아니고 대충이요. 편성은 확정된 겁니까?”

    “네. KBC에서 내년 3분기에 방송하기로 했어요. 원래는 자체 제작하는 줄 알았는데 비용 문제 탓인지 갑자기 외주로 변경되었어요.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하기로 해서 PD님 미팅이다 뭐다 솔직히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유니언 스튜디오?

    그러고 보니 지난 식사 초대에 서필진이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올랐다.

    <마지막 사랑> 드라마 실패 후 절치부심, 사활을 걸고 새로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했다고 했는데 그게 이 드라마인 줄은 몰랐다. 경우는 새삼 이 바닥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잘될 겁니다.”

    “작가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다행이네요. 이상하게 작가님이 하신 말씀은 다 믿음이 가요.”

    “그렇다면 한 말씀 더 드려도 될까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괜히 긴장되네요.”

    “별 건 아니고, 연말이잖아요. 혹시라도 사고 나지 않게 조심하시라구요. 아무래도 연말엔 모임도 많고 마음이 풀어지는 시기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죠. 근데 드라마 촬영 때문에 모임 같은 건 꿈도 못 꿔요.”

    “다행이네요.”

    “이럴 때보면 작가님도 좀 사악하시네. 드라마 관계자라 그런가?”

    “어디까지나 배우님 걱정에서 그러는 겁니다.”

    “알죠. 그냥 투정 한번 부려 본 겁니다. 만날 액션 씬 준비에 오토바이 씬도 그렇고, 가뜩이나 체중 조절까지 하느라 사실 요즘 신경이 조금 곤두서 있었거든요.”

    “잠깐만요, 오토바이 씬이라구요?”

    “왜 그러세요?”

    어쩌면 우재환이 났던 교통사고라는 게 오토바이 사고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 * *

    아무리 좋은 일이었다고는 하나 연세도 있으신 분들이 전날 밤부터 굶은 상태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힘드시죠?”

    “아니야. 근데 병원 엄청 좋아 보이는데 검사비 많이 나오는 거 아냐? 우리 아들 돈 번 거 다 쓰고 가게 생겼네.”

    “자주 있는 기회도 아닌데 당신도 너무 돈 돈 거리지 마. 그럼 필진이가 얼마나 속상하겠어. 안 그래?”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나도 아는데…… 그래도 내 자식 고생해서 돈 번 거 생각하면 부모 마음이 그런 게 아니지.”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도 지난번에 저녁 먹으러 온 그 친구가 준 거예요.”

    “경우가?”

    초대를 받았던 그날, 어머님, 아버님하면서 친근하게 대했던 경우의 모습에 서필진의 부모는 정말 아들 친구처럼 경우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실은 이 병원이 그 친구 외가에서 하는 거라고, 아는 지인들한테 건강 검진권을 선물로 돌린다고 부담 갖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하는 걸 보면 잘사는 집 아들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 생각 못한 서필진의 부모는 병원 규모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지난번에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한 것도 실례였던 거 아니니? 난 친구라길래 고마워서 오라고 한 건데…….”

    “나는, 나 뭐 실수한 건 없냐?”

    걱정하는 부모님을 보며 서필진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음식 솜씨 좋으시다고 미국이 아니었으면 자주 와서 먹고 싶을 정도라고 했어요. 아버지도 유쾌하신 분이라 좋았다고 하더라구요.”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하긴 자신도 아직 민경우라는 사람이 편하지만은 않았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앞으로도 경우랑 잘 지내. 경우가 대단한 집 자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남의 부모 챙기는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대견해. 사람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런 사람과 가까이에 지낼 수 있는 것도 복이야.”

    “네, 알겠어요.”

    몇 가지 검사를 더 한 뒤 부모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던 중이었다. 서필진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네, 본부장님.”

    [서 과장. 지금 유니언 쪽에서 드라마 촬영하고 있는 거 알고 있지? 거기 좀 가 봐야겠어.]

    “본부장님, 저 지금 휴가 중인데요.”

    [알지. 내가 그거 모르겠어? 그치만 다른 것도 아니고 드라마 일이잖아. 내가 이 드라마에 얼마나 사활을 걸고 있는지 서 과장도 알 거 아냐?]

    “…….”

    [무슨 일인지 가서 보고 서 과장 선에서 해결해. 난 서 과장만 믿을게.]

    그렇게 전화가 끊기자 걱정스레 보고 있던 그의 부모님이 다가왔다.

    “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우리 걱정은 말고 어서 가 봐.”

    “우리 아들이 출근을 안 하니까 회사가 일이 안 돌아가나 보네. 하하하.”

    부모님이야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지만 힘드셨을 부모님을 챙기지 못한다는 사실에 서필진은 속이 상했다. 병원 앞에서 택시를 태워 보낸 서필진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전화부터 돌렸다.

    * * *

    “이거 봐요, 이거. 이러다 흉 지면 정말 어떻게 해요?”

    촬영장 오토바이 씬을 찍던 중 미끄러져 사고가 났다는 소리에 놀란 서필진은 배우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갔다는 병원으로 일단 향했다.

    휴가 중 자신을 불러낸 박현호에 대한 짜증도 잠시, 사고가 크게 나 드라마 촬영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병원에서 만난 건 진상을 부리고 있는 여주인공 유가희였다.

    스턴트 없이 오토바이 액션 씬을 찍던 차에 오토바이가 그만 미끄러져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남녀 주인공 모두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다행히 부상이 심각하지 않았고 그나마 더 다친 건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남자 주인공 우재환이었다. 그에 반해 여자 주인공 유가희는 이마 쪽에 살짝 생채기가 난 정도였는데도 팔, 다리에 찰과상을 입은 우재환을 앞에 두고도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여배우는 얼굴이 생명인 거 몰라요? 이거 어떡해. 흉 져서 다음 작품 못 하면 어떡할 거냐 말이에요.”

    유가희 진상 짓에 연출을 맡은 KBC 신지홍 PD는 물론 유니언 스튜디오의 제작 PD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신인 배우가 왜 이렇게 기고만장한가 했더니 요즘 박현호가 만나고 있는 여배우였다.

    그러니까 자기가 만나고 있는 여자가 다쳤으니 가 보라는 박현호의 지시를 알아차린 서필진은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유가희 씨?”

    서필진의 부름에 돌아본 유가희는 그가 박현호가 보낸 사람임을 알고 반색을 했다.

    “보니까 상처도 별로 깊지 않은 거 같은데 오늘은 들어가서 쉬시죠. 향후 일정에 대해서 매니저와 상의해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봐요, 내가 누군지 몰라요?”

    “유가희 씨는 눈이 없습니까?”

    “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우재환 씨 다친 거 안 보이냐 이 말입니다. 이렇게 다친 사람도 있는데 그 정도 생채기는 화장으로도 가려집니다.”

    “이것 봐요!”

    따지려는 그녀 앞에 한발 다가선 서필진이 험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 못하시겠으면 드라마에서 하차하시던가요. 유가희 씨 아니더라도 이 드라마 하겠다는 여배우들 많은 걸로 아는데요.”

    생각보다 단호한 서필진의 모습에 그녀의 매니저가 옆구리를 찌르자 짜증을 내며 씩씩대던 그녀가 나가 버렸다.

    유가희가 나가 버리자 안도의 한숨을 쉰 신지홍 PD와 제작 PD에게 간단히 이야기를 해 상황을 정리한 서필진은 많이 다친 우재환이 걱정돼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참이었다.

    우재환도 우재환이었지만 그의 뒤쪽에 서 있던 경우를 뒤늦게 발견한 그는 창피함에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우재환의 상태가 먼저였기에 의사의 설명을 듣고 우재환의 매니저와 이야기를 마친 서필진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우에게 다가갔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민 작가님이…… 여긴 어쩐일로.”

    “우재환 배우님이 다쳤다고 해서 와 봤습니다. 뭐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못 볼 꼴을 보여 드렸네요.”

    “이 바닥에서 일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죠. 더 심한 것도 봤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어요?”

    “제 선에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본부장님 지시가 있었으니 그 지시에 따른 겁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안 경우의 걱정 어린 시선에 서필진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을 유능하다고 한 그에게 겨우 이런 모습이나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참, 부모님은 언제 미국으로 가십니까?”

    “이번 주말에 가실 예정입니다.”

    “괜찮으시면 제가 공항에 배웅 나가도 될까요? 그사이 정이 들었는지 그래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 혹시 제가 너무 나갔나요? 이럴 땐 서 과장님과 진짜 친구였으면 좋았겠네요. 그럼 부담 없이 인사드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부모를 챙긴 그의 모습에 서필진은 병원에서 한 부모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남의 부모 챙기는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대견해. 사람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런 사람과 가까이에 지낼 수 있는 것도 복이야.’

    “……민 작가님.”

    “네.”

    “오늘이 세 번째 만남입니다. 저한테 그 질문 다시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서필진도 느끼고 있었다. 경우는 오늘이 아니면 더는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하지 않을 거란 걸. 그러니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무언가 결심을 한 듯한 서필진의 얼굴에 경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필진 과장님, 저와 같이 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한번 해 보죠.”

    서필진이 손을 내밀자 경우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나눴다. 긴장감이 감돌았던 두 사람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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