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98화 (98/250)
  • #98.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3)

    “우리 아들 한국 가더니 성공했네.”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어머니 손이 무척 거칠었지만 서필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 지었다.

    미국으로 막 건너간 후부터 서필진의 부모님은 세탁소를 운영하셨다. 밤이고 낮이고 부지런히 일을 하신 덕에 곱던 손은 얼룩을 제거하는 각종 화학 약품들로 어느새 거칠어져 있었다.

    거친 손은 열심히 살아오셨다는 증거였으니 그는 그런 어머니의 손이 자랑스러웠다.

    재작년 일이 고되고 두 분 모두 연로하셔서 세탁소는 접고 대신 마트를 새로 시작했다. 하지만 마트 역시 상품을 나르고 정리하느라 허리 펼 새가 없어선지 올 초 뵈었을 때보다 더 늙으신 것 같아 서필진은 속상했다.

    성공해서 편히 모시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따라 주지 못했다.

    “근데 아까 그 잘생긴 청년은 누구야? 이런 차를 다 보내 주고. 혹시 너랑 같이 일한다는 그 사람이야?”

    “아니에요. 그냥…… 친구에요. 부모님 오신다고 했더니 이런 걸 다 준비했네요. 한국 오신 건 정말 오랜만이잖아요.”

    “좋은 친구를 뒀네. 언제 집으로 불러. 엄마가 가기 전에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아이, 그러실 것 없어요. 괜찮다니까.”

    “그래도 그런 게 아니야. 사람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고마워. 다른 건 못해도 엄마 요리 솜씨는 알아주잖니. 엄마 마음 편하려고 하는 거니까 불러. 알았지?”

    “네, 알았어요.”

    “근데 이건 뭐냐?”

    모자간의 상봉엔 뒷전, 서필진의 아버지는 언제 이런 차를 또 타 보겠냐 싶어 호기심에 이것저것 살펴보던 중이었다.

    “어? 이거 냉장고다. 뭐 들어 있는데?”

    “저이가 참. 아까부터 뭘 그렇게 자꾸 열어 봐요.”

    “샴페인이야. 아주 시원해. 우리 마시라고 넣어 둔 건가?”

    “그냥 놔둬요. 그것도 다 돈이야. 호텔에서도 냉장고 속에 있는 음료수 마시면 엄청 비싸잖아.”

    “괜찮아요. 드셔도 돼요. 어차피 차량 제공할 때 다 포함되어 있으니까 마음껏 드세요.”

    “그, 그래?”

    “우리가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 보겠어. 이왕지사 한잔 마십시다. 오, 마침 여기 잔도 사람 수에 맞게 딱 세 잔 있네. 자 당신도 한잔합시다. 아, 받으라니까.”

    “그럼 조금만 줘 봐요.”

    “자, 우리의 행복한 한국 여행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차 안에서 펼쳐진 조촐한 축하 파티에 서필진의 마음이 흡족해졌다. 무엇보다도 늘 걱정만 하고 계신 부모님이 그의 한국 생활에 안심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서필진은 조금 전 공항에서 만난 경우를 떠올렸다.

    생전 처음 본 리무진에 부모님의 시선이 팔려 있는 사이 경우는 서필진에게 작은 봉투를 건네주었다. 바로 어제 사무실에서 박현호가 건넨 수표를 떠올린 서필진의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

    “이게 뭡니까?”

    “실은 지난번 결혼식장에서 서 과장님 부모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별건 아니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외가 쪽에 병원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에 부모님 한국에 오신 기념으로 건강 검진을 받으셨으면 해서요. 어르신들은 건강이 제일 아닙니까? 거기로 전화만 하시면 원하시는 날짜에 예약 없이 바로 검진이 가능합니다.”

    “건강 검진이요?”

    “미국은 의료비가 비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포분들 중에는 일부러 한국에 오셔서 건강 검진을 받는다고 하더라구요. 서 과장님 부모님께 어떤 선물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준비해 봤습니다.”

    미국이 의료비가 비싸다는 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이런 일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꼭 필요한 일이었음에도 자식인 자신이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그의 마음을 오해한 경우가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아, 저 잘 아는 해장국집 사장님께도 매해 보내 드리는 거거든요. 별로 대단한 건 아니니까 받으셔도 괜찮습니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선물까지 주면서 왜 이렇게 저자세인 건지 서필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제가 뭐라고.”

    “촉한의 유비도 난양에 은거하고 있던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잖아요. 서 과장님 같은 인재를 모시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민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저 그렇게 유능하지 않습니다.”

    “그 판단은 제가 하는 겁니다. 서 과장님이 아니라.”

    “…….”

    “전에 말씀드렸죠? 해외 사업부를 신설할 거라고. 시작은 미국 드라마를 수입하는 것부터 할 건데 제 꿈은 미국 드라마를 사다가 보여 주는 걸로 끝내진 않을 겁니다. 우리가 집에서 미국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미국이 우리 드라마를 리메이크하고 종단엔 미국 가정에서 우리 드라마를 보는 날이 오도록 그렇게 만들 겁니다. 그럼 우리나라 사정도 미국 사정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겠죠.”

    “그게 저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동안 전화는 많이 했지만 얼굴 보고 제안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저랑 같이 일해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

    “여기서 답하라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시구요. 앞으로 두 번은 더 남았네요.”

    그렇게 미련 없이 떠나 버렸던 사람.

    서필진은 자신이 경우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대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성별, 연령, 전공 등등 다 제각각이었다.

    카페에서 자막 부원으로 활동하는 이들 중 참석한 이들은 총 열 명. 경우는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호기심에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따분해하면서 왜 불렀는지 어서 용건만 말하라는 눈빛도 분명 있었다.

    경우는 더 뜸 들일 것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는 앞으로 미국 드라마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사이트를 개설할 생각입니다.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미국 드라마를 볼 수 있도록 말이죠. 거기엔 이미 여러분들이 번역 작업을 했던 드라마도 포함될 겁니다.”

    “그래서요?”

    “여러분들이 번역한 것을 그대로 쓰고 싶어서요. 당연히 고료를 지급할 생각이구요.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요.”

    역시 돈 이야기가 나오니 심드렁하던 사람들도 이내 집중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줄 건데요?”

    “프로 번역가들이 받는 평균을 드릴 생각입니다.”

    솔직히 프로가 얼마나 받는지 모르지만 아마추어인 자신들에게 프로만큼 주겠다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물론 여러분 한 사람에게 프로만큼 주겠다는 건 아닙니다. 드라마 한 편당 프로들과 동일하게 지급하겠다는 거죠. 번역에 참여하신 모든 이들이 나눠 갖는 셈입니다. 그래도 편수가 많아지면 돈도 쌓이겠죠.”

    나눈다는 말에 실망하던 이들도 결국 경우의 말에 수긍했다.

    솔직히 지금도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돈까지 준다니 손해는 아니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일하시게 되면 그 이후부터 인터넷에 자막을 배포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돈을 지불했는데 돈도 지불하지 않은 사람들과 공유할 생각은 없거든요.”

    개중에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배포를 막는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 지금까지 하던 대로 프로 번역가한테 의뢰하면 되잖아요. 왜 번거롭게 우리한테 이렇게 합니까?”

    삐딱하게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물었다. 그를 날카롭게 바라본 경우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구려서요.”

    순간 정적.

    이내 풉하고 웃음이 터지자 다른 사람들 역시 웃기 시작했다. 그들도 느꼈던 사실을 경우가 콕 집어 말하니 웃을 수밖에.

    한 가지 일에 익숙해지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수입도 되지 않은 미드가 열풍이 일어난 건 분명 이들의 노고도 한몫했다고 경우는 봤다.

    사실 국내에서의 VOD시장도 이미 치열한 상황이었으나 국내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해외 다양한 콘텐츠를 확보한 미국의 스트리밍 사이트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성장했던 게 아니었겠나.

    결국 미디어 산업에서 중요한 건 더 많은 자본과 콘텐츠였으니 미국이 미디어 산업에서 세계 시장을 지배한 것도 결국 그 이유였다.

    경우는 일단 미국 드라마를 사들이는 것으로 콘텐츠를 확보해 나갈 생각이었다. 이후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한 드라마를 시작으로 영화까지 영역을 넓혀 갈 계획이었다.

    미국의 스트리밍 사이트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는 아직 몇 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 경우는 그 전에 시장을 선점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마침 경우의 사념을 깨듯 아까부터 삐딱하게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제안을 안 받아들여도 상관은 없는 거죠?”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희 쪽과 함께 일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하시는 것처럼 번역 일을 계속하시면 나중엔 문제가 생길 겁니다.”

    “문제라니요?”

    “저희가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할 방침이거든요.”

    경우의 강경한 대응에 회의실은 술렁였다.

    “여러분은 미드를 좋아하시고 더 많은 사람들과 즐기고 싶어서 선의에 해 오신 일이라는 거 잘 압니다. 하지면 엄연히 따지면 저작권법 위반이거든요. 제가 나서지 않아도 머지않아 미국 방송사에서 나설 겁니다.”

    “미국이 이런 조그만 나라까지 신경 쓸까요?”

    “우리나라 사람들만 우리나라를 과소평가하는 거 아십니까? 작은 시장이 아닙니다. 돈이 된다면 물불 안 가릴 사람들이죠. 그래서 미리 경고드리는 겁니다. 소정의 고료를 받을지, 그만둘지, 불법적인 일을 계속할지는 여러분이 선택할 일입니다.”

    경우의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국 무엇을 선택할지는 그들의 몫이었지만 결과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경우가 덧붙였다.

    “아, 물론 원하신다면 사이트엔 여러분의 이력을 자세히 넣어 드리겠습니다. PR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그렇게 미팅을 마친 번역가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맨 마지막으로 일어선 삐닥하게 앉아 질문을 쏟아내던 남자가 경우에게 다가왔다. 경우가 품 안에서 돈 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바람잡이를 위해 미리 섭외해 두었던 사람이었다. 시의적절한 질문과 분위기 조성이 그가 맡은 역할이었다. 거기다 아직 남은 역할이 있었으니.

    “번역 계속 하실 생각이라구요?”

    “돈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 없죠. 그리고 그쪽 마인드가 괜찮은 것 같아서요.”

    “?”

    “번역이 구린 건 사실이잖아요. 도저히 못 봐 주겠어서 나선 거거든요, 내가. 저 사람들도 적당히 부추겨 주면 되는 거죠?”

    “네.”

    “좋습니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팬덤까지 형성한 나름 그쪽에서 유명한 인물까지 포섭한 상태이니 경우는 일이 잘 풀릴 거란 예감이 들었다.

    회의실을 나가려던 그때 경우의 전화가 울렸다.

    * *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소하지만 선물을 좀 가지고 왔습니다.”

    “그냥 와도 되는데. 저녁 아직 전이죠? 이쪽으로 와요.”

    쭈뼛대는 서필진을 대신해 그의 어머니가 경우의 손으로 잡고 거실로 이끌었다. 거실 한가운데 상다리가 부러지게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잘 먹겠습니다.”

    넉살 좋게 앉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서필진의 부모님은 흡족해했다.

    “우리 필진이 친구라고요?”

    “……네, 그러니까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안절부절못하는 서필진을 본 경우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고 그가 곤란하지 않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우리 필진이가 혼자 한국으로 간다고 할 때만 해도 우리가 걱정 많이 했지. 평생 끼고 살 건 아니지만 미국에서 한국이 가까운 거리도 아니잖아.”

    “그렇죠.”

    “그래도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돼. 그래서 요번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서 과장님, 일하는 것도 꼼꼼하고 능력 좋으십니다. 일하다 알게 된 사이거든요. 그러니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고 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경우의 태도에 잔뜩 긴장했던 서필진도 한시름 내려놓았다.

    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잠시 베란다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서필진의 곁으로 경우가 다가갔다.

    “어머님께서 음식 솜씨가 훌륭하시네요. 아버님도 참 재밌으시구요. 화기애애해서 보기 참 좋습니다.”

    “자식밖에 모르시는 분들이세요.”

    “저런 분들 두고 한국까지 오기 쉽지 않으셨겠어요.”

    “그만큼 한국행은 저한테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성공하고 싶기도 하고요.”

    “이 타이밍에 이런 말씀 그렇지만. 저와 같이 일하시면 과장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가 서포트 해 드리겠습니다.”

    “…….”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서필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이 두 번째인 거 아시죠?”

    경우가 서필진을 향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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