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2)
그러니까 한성음료 안동성의 결혼식이 있기 직전 김강철은 마침 임석주의 수능 성적이 나온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경우의 집을 찾았다.
“성적은 잘 나왔대?”
“뭐라더라, 과목당 하나씩 틀렸다고 하던가?”
“그래?”
“그것도 일부러 틀리셨단다. 걔도 참 웃겨. 답을 알면 그냥 쓰면 되지 일부러 틀릴 건 뭐야?”
“주목받는 게 싫은 모양이지. 가뜩이나 불수능이네 뭐네 어렵다고 떠들어 댔잖아. 그런데 만점? 학교는 물론이고 방송국에서 인터뷰까지 난리 나는 거지.”
“왜? 방송에 얼굴 타면 좋지 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얼마나 좋아.”
이전 생에 석주가 방송을 타서 좋은 기억이 없었던 경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야 네 생각이고. 그래도 수능 안 보겠다고 했던 놈이 그 정도 성적 받았으니 다행이지. 그래, 가고 싶은 학교는 정했대?”
“아직. 고민 중인 모양이더라. 참 부럽네, 부러워. 어디를 갈지 고민을 해? 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게.”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경우,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던 김강철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참 신기하단 말이야.”
“또 뭐가?”
“아니, 그렇잖아. 아무리 석주가 머리가 좋다고 해도 걔가 돈 굴리는 걸 그렇게 잘할 줄 어떻게 알았냐 말이지. 내가 보기엔 석주나 그 꼬맹이나 비슷한 애들인데 어떻게 믿고 그 큰 돈을 턱턱 맡길 수 있냔 말이야?”
“…….”
“그것만 그랬다면 또 몰라. 근데 그 미국 드라마가 그렇게 성공할 줄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데? 가끔 너 보면 어떻게 저렇게 무모하나 싶은데 지나고 보면 그게 다 맞았거든. 꼭 앞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이번 주 로또 당첨 번호 좀 알려 주라.”
“뭐?”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넌 좀 신기가 있는 거 같아. 내가 저쪽에 용한 무당 하나 알고 있는데, 같이 갈-.”
“야!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뭐? 장난도 적당히 쳐라.”
“내가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다 했겠어. 하도 신기하니까 그런 거 아냐. <크리미널 리포트>만 해도 그래. 그때 그 미국 아저씨, 하고 있는 꼴을 보면 술주정뱅이같이 생겼는데 드라마 진짜 재미있더만.”
“봤어?”
“요즘 핫하잖아. 그래서 나도 봤는데. 와! 나 원래 드라마 안 봤잖아. 네 덕분에 요즘 드라마에 취미 붙이고 있는데 그거 진짜 재밌데. 도대체 넌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건가 내가 하도 신기해서 그러지.”
그거야 그 드라마가 얼마나 인기 있을 줄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경우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김강철을 바라봤다.
자신을 보는 경우의 눈빛이 날카로워 그가 움찔거렸다.
“왜? 또 뭐?”
“아니, 나도 아직 안 본 미국 드라마를 우리 김 비서는 어디서 봤을까? 아직 정식 수입도 하기 전인데 말이야.”
“…….”
“혹시 미국에 나 모르게 아는 사람이 있어서 DVD를 구해다 달라 했다던가 그런 거겠지?”
“…….”
“에이, 아무려면 우리 김 비서가 설마 요즘 애들이 인터넷에서 불법으로 다운 받고 그런다는데 그런 건 아니겠지? 그치?”
“그래, 다운 받아서 봤다. 어쩔래! 아, 그렇게 좀 보지 마. 그래, 내가 잘못했다. 미안해. 다음부턴 안 그러면 될 거 아니야. 이게 다 내가 너 걱정돼서 확인 차 본 거 아냐.”
“핑계없는 무덤 없다더니. 누가 보면 네가 투자한 줄 알겠다. 어차피 내 돈,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네가 왜 신경을 써?”
“신경 쓰이지. 이래 봬도 내가 전담 비서구만. 도련님이 망하면 되겠냐? 다행히 반응이 좋다고 해서 한시름 놓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봐야 알 거 아냐.”
“그래서 본 소감이 어떤데?”
“확실히 우리나라 드라마랑 달라. 우리나라 드라마는 무슨 드라마든 결국 주인공이 결혼하고 끝나잖아. 근데 거긴 그런 게 없어. 미국은 범죄 수사를 저렇게 하나 싶기도 하고.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왜 그렇게 날밤 새면서 보는지 알겠더라. 그러고 보니 네 드라마하고 약간 비슷하면서 살짝 다르네. 그 느낌, 뭔지 알지?”
“내가 알긴 어떻게 알아? 그래도 재미있게 봤다니 다행이네.”
“근데 이거 괜찮아?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그런 식으로 많이 보는 것 같던데? 그럼 우리한테 손해인 거 맞지?”
“그거 걱정되는 놈이 그렇게 봤냐?”
“아니, 나는 뭐…….”
“알아. 정식으로 수입된 게 아니니까 너도 어쩔 수 없었단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후 경우는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 드라마를 투자할 때부터 수입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투자는 경우 개인이 한 일이었으니 수입은 ‘스튜디오 글로리’를 통해 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드라마 집필하랴 신경 쓸 게 많아서 미국에서 반응이 좋다는 소식만 듣고 있었는데, 이제 한국 시청자들을 위해 일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미 본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경우는 생각이 많아졌다.
“이참에 미국 드라마 수입을 본격적으로 해 볼까 하는데 말이야.”
“미국 드라마? 재미야 있다만 돈 많이 드는 거 아냐?”
“생각보다 안 비싸. 편당 500만 원 정도? 예전 가격이라 올랐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비싸진 않을 거야.”
“500? 난 미국 드라마라 비쌀 줄 알았는데. 미국 드라마 만드는 데 얼마 안 드나 봐.”
“무슨. 편당 25억은 들어갈걸.”
“헥! 2, 25억? 근데 수입은 500? 너무 싸게 내놓는 거 아냐?”
“그렇지? 근데 몇몇 나라에만 파는 게 아니니까. 우리는 보통 해외 수출이라고 하면 중국, 일본, 아시아 몇몇 나라만 생각하지만 미국은 그게 아니잖아. 전 세계를 상대로 파는데 많이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지.”
“엄청난 자신감이네. 그래서 그렇게 돈 드는 게 아니니까 본격적으로 그쪽에 뛰어들어 보시겠다?”
“네 말 들어 보니까 요즘 사람들 미국 드라마 많이 본다며? 날밤 샐 정도로. 그럼 이것도 돈이 되지 않겠어?”
“그렇긴 하지.”
“그래서 말인데. 너 <크리미널 리포트> 다운 받을 때 자막은 어디서 구했어?”
“내가 잘못했다니까 그러네.”
“그게 아니라 그쪽 번역가한테 번역을 맡겨 볼 생각이거든.”
“뭐?”
경우가 한 말이 이상했던 김강철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재차 물었다.
“원래 그런 건 전문 번역가가 있지 않아?”
“있지. 근데 이왕 일 시작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하자는 게 내 원칙이라.”
영문을 모르겠다는 김강철을 보며 경우는 미드와 관련된 한 사건을 떠올렸다.
그것은 미국 방송사들이 그들이 제작한 드라마의 한글 자막을 인터넷에 퍼뜨린 아마추어 번역가들을 고소한 사건이었다. 자막 역시 저작권으로 보았으니 저작권법 위반이라는 혐의였다.
어찌보면 자신들의 콘텐츠를 지키려는 당연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었으니 자막을 만들어 퍼뜨린 이 아마추어 번역가들 덕에 미국 드라마가 흥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미국 드라마가 재미있다고 해도 영어를 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법. 그들의 맛깔나는 번역이 더해지니 미국 드라마의 부흥을 이끌었다는 평이 많았다.
아마추어 번역가들 역시 자신들 덕에 이후 다양한 미국 드라마가 수입되었으니 방송국 입장에서도 손해만은 아니란 주장이었다.
경우는 이 사건이 어떻게 종결되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대신 그 일이 있고 난 뒤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에 오역에 많다며 많은 이들이 항의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랐다. 아주 유명한 프로 번역가였는데 말이다.
“외국 드라마 볼 때 번역이 참 중요한 문제거든. 이왕이면 한 사람이 모든 걸 끌어안는 것보단 여럿이 나눠서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
“뭔 소린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찾아볼게.”
경우는 미국 드라마 수입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신 이걸 어떻게 내놓느냐는 게 문제였는데. 이왕이면 지금 미국 드라마에 익숙한 세대들의 이용 방식처럼 TV가 아닌 인터넷을 통한 스트리밍 서비스를 우리도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미국의 영화, 드라마가 인기지만, 경우는 언젠간 한국의 드라마가 미국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 먹히는 날이 오니 그때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미국의 미디어 분야를 잘 알고 있으면서 한국 쪽 사정도 밝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동성의 결혼식장에서 서필진을 만난 순간 자신이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그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 * *
서필진은 한동안 전화기만 들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성음료 경영기획본부장의 결혼식을 다녀온 이후 한참이 흘렀지만 경우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차나 한잔하자는 말에 금방이라도 다시 연락이 올 것 같았는데 감감무소식이었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경우가 했던 그 말이 자꾸 떠오른 서필진은 혹시나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해서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건 아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긴, 괜히 오해부터 해서 경계했던 건 본인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뭘.”
신경 쓰지 말자고 하는데도 어쩐지 신경이 쓰이는 그였다.
그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 보나마나 박현호 호출이겠지. 역시나 박현호의 비서였다.
서필진은 옷 매무새를 살피고는 본부장실로 향했다.
* * *
사무실 한가운데 테이블 위에 발을 올리고 앉은 박현호의 모습은 조금 열 받은 것 같았다. 넥타이까지 풀어헤친 모습이 제법 심상치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내가 지금 어딜 갔다 왔는 줄 알아?”
“회장님과 점심 약속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아버지하고 점심을 먹었지. 근데 그 자리에 형이 왜 끼어드냔 말이야. 어디서 무슨 소리를 어떻게 듣고 와서는 민경우 그 새끼한테 송지현 작가 뺏겼냐고 사람 슬슬 약 올리는데. 아, 열 받아. 아버지한테 점수만 뺏기고 말이야.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꼴에 형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
“내가 그 새끼 꼭 잡고 만다. 민경우한테 연락 온 거 없어?”
“네?”
“뭘 그렇게 놀래? 차나 하자면서? 연락 온 거 없냐고?”
“없었습니다.”
“그래? 하아. 그 자식 어떻게 코를 납작하게 해 주지?”
회장을 만나고 온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더니 기껏 불러서 한다는 소리가 하소연이라니.
어쩐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지금의 그가 다른 사람 같아 서필진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저기, 본부장님.”
“어, 왜?”
“내일부터 저 휴가입니다.”
“갑자기 연말에 웬 휴가?”
“전에 말씀드렸는데요. 미국에서 부모님이 오신다고요.”
“아, 맞다. 그랬지. 참. 올 초 뵙고 오랜만이겠네?”
“네.”
“그래, 부모님은 봬야지.”
그러더니 박현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수표 여러 장을 꺼냈다. 받으라는 듯 흔들며 내미는데 그 손을 서필진은 잠시 그대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런 서필진의 모습을 오해한 박현호가 웃으며 일어나 서필진의 손에 수표를 쥐어 주었다.
“괜찮으니까 받아. 부모님 오셨는데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좋은 것도 사 드리고 그래. 그럼 그만 퇴근해.”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온 서필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무슨 그지 새끼도 아니고.”
낮게 읊조린 서필진이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 * *
전날 있었던 일을 다 잊고 서필진은 공항으로 부모님을 모시러 마중 나갔다.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미국으로 갔기에 부모님이 한국에 오신 건 꽤 오랜만이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부모님을 향해 그가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 아버지! 여기에요, 여기!”
“필진아!”
“오시느라 힘드셨죠. 일단 집으로 가요. 피곤하실 텐데.”
주차장으로 향하려던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경우였다.
“서 과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민 작가님! 여긴 어떻게…….”
갑작스러운 경우의 등장에 서필진은 물론 어리둥절한 그의 부모님이 물었다.
“이분은 누구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서필진 과장님께 신세를 지고 있는 민경우라고 합니다. 오늘 서 과장님 부모님이 오신다고 해서 제가 편히 모시려고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제가 바로 이 앞에 차를 준비해 두었거든요.”
귀신에 홀린 듯 경우의 이끌림에 출구로 나가 보니 리무진 한 대가 서 있었다.
“서 과장님 차는 제가 대리 불러서 집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부모님 만나신 건데 한시가 아깝잖아요.”
서필진은 순간 경우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