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1)
더 퍼스트 밀레니엄 호텔.
안동성의 결혼식에 참석한 경우는 손님을 맞이하며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안동성을 발견했다. 마침 경우를 본 안동성 역시 그를 무척 반가워하며 버선발로 뛰어올 기세였다. 오히려 경우는 그런 그가 살짝 부담스러웠다.
2년 전 연말 모임에서 그를 만났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의 사이가 이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럴 때보면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다.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왔어? 바쁜데 시간 내 줘서 정말 고맙다.”
흰 장갑을 낀 안동성이 경우의 두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주변의 시선에 경우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준 뒤 손을 내렸다.
“결혼 축하한다. 근데 결혼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빠르기는 무슨. 오히려 늦은 거지. 결혼은 진작부터 하고 싶었는데 본부장 맡고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결혼까지 한다고 할까 봐 늦어진 거야.”
“어쨌든 잘 살아라.”
“정말 고맙다. 들어가서 앉아 있어.”
수많은 재벌가 자제들이 정략결혼을 하는 것과 달리 안동성은 미국 유학 시절부터 오래 만난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상대 역시 만만치 않은 재력가 자식이었기에 결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사실 안동성이 한성음료 경영기획본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을 때만 해도 우려가 많았다. 회장 아들이라 실력도 검증 안 된 상태에서 중책을 맡겼다며 실수하기만을 바라는 시선 속에 그는 적잖이 속앓이를 해야만 했다.
특히나 회사에 오랜 기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역들은 그들의 오랜 라이벌인 부길식품을 앞지르는 걸 숙원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만년 2등이 1등으로 올라서는 건 어려운 일. 상대를 맞닥뜨리게 되면 기부터 죽는 게 다반사.
지금껏 그들도 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어떻게 해낼 수 있는 건지 안동성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만난 것이 경우, 그리고 준 리차드였으니 그들을 보는 순간 안동성은 느낄 수 있었다. 부길식품의 시그니쳐와도 같은 그 이미지를 넘어설 수 있는 모델이 눈앞에 있다고.
하지만 모델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으니.
오랜 논의 끝에 준 리차드가 카메오로 출연했던 드라마 <역전의 정수> 속 섹시한 빌런 이미지를 이용해 컨셉을 잡고 완성된 광고를 보는 순간, 한성음료 사람들은 예감할 수 있었다.
어쩌면 부길식품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마침내 TV를 통해 준 리차드의 첫 번째 광고가 나오자 15초 안팎의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효과는 고스란히 매출 상승으로 이어졌으니.
오늘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경우와 준 리차드 두 사람 덕이라고 안동성은 생각하고 있었다.
연신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던 안동성은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드디어 중요한 인물이 참석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준 리차드였다. 핫한 모델의 등장에 주변에선 카메라부터 들이대고 있었다.
안동성은 그를 반가워하며 맞았다.
“준, 와 줘서 고마워요.”
“본부장님 결혼식인데 당연히 참석해야죠.”
“안에 민 작가 와 있으니까 들어가 봐요.”
준은 안동성의 안내에 식장 안으로 들어가 경우와 인사를 나눴다.
“경우 형, 오랜간만이에요.”
“왔어? 요즘 바쁘지?”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긴 해도 평생 살아온 미국 문화에 익숙했던 준 리차드는 생각지도 않았던 한국에서의 연예계 생활로 문화 차이를 극복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해서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이자 제작자인 경우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구해 가며 도움을 받고 있는 덕에 작가님과 배우님은 어느새 형, 동생이 되어 있었다.
밀려오는 여러 제안에 아예 매니지먼트사와 계약을 하도록 소개해 준 것도 경우였다.
“형만큼 바쁘기야 하겠어요? 아, 이제 드라마 끝나서 여유 좀 생겼겠어요.”
“아주 잠깐. 벌여 놓은 일이 바쁘니까 많이 쉬진 못해.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고민 있어?”
“참, 나 형한테 의논하고 싶은 거 있어요.”
“뭔데?”
“드라마를 하자고 시놉시스가 몇 개 들어왔거든요. 근데 그중에 뭐가 나을지 좀 고민이에요.”
“회사에선 뭐라고 하는데?”
“두 쪽으로 나눠서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더 고민이에요.”
“어떤 드라만데?”
“한쪽은 killer? 북한과 관련된 거대 비밀 조직의 킬러예요. 주인공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인물이죠. 다른 쪽은 재벌집 아들이고 여자 주인공이 힘들 때마다 위로해 주고 도움 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인물이에요. 아, 그렇다고 주인공은 아니에요.”
“혹시 그 드라마들 작가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킬러는 김준원 작가님이었고 재벌은 홍정미 작가님이요.”
아!
이름을 들으니 경우는 감이 왔다. 두 드라마 다 흥행에 성공하는 드라마들이었다. 하지만 성향은 전혀 다른 드라마였으니. 회사에서도 고민하고 있다는 게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경우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 같으면 여자 주인공을 위로해 주는 재벌집 아들을 선택할 것 같은데.”
“왜요?”
“킬러, 어떻게 보면 참 매력적이야. 그런데 이미 <역전의 정수>에서 광고까지 나쁜 남자 컨셉을 유지해 왔잖아. 사람들이 기대하는 컨셉이기도 하지만 식상해질 수도 있거든. 너한테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도 보여 줘야지.”
“아, 저희 실장님도 그런 말씀 하셨어요.”
“어쨌든 배우는 이미지로 먹고사는데 너무 한 가지 이미지만 고착되는 거, 나는 별로라고 봐. 준이 얼마나 다양한 매력이 있는데. 한쪽으로만 쏠리는 건 좀 안타까워.”
“그렇군요.”
“그리고 멜로가 주된 서사로 나오는 드라마엔 서브 병에 걸리는 여자들이 의외로 많아.”
“서브 병?”
멜로 드라마엔 남자, 여자 주인공이 확실하다. 돌고 돌아도 결국 여자 주인공과 이어지는 건 남자 주인공. 그런데도 서브 남자 주인공과 이어지길 원할 정도로 매력적인 서브 남주에 빠지는 걸 서브 병이라 일컬었다.
신인이나 다름없는 준 리차드가 아직 주인공 자리까지 꿰차기에는 힘들 거라 생각한 경우는 차라리 남주보다 더 매력 있는 서브남을 맡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홍정미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는 초반 개차반 남주 탓에 서브남이 인기 있는 서브남 맛집으로 유명했다. 준 리차드라면 남주를 뛰어넘은 서브 병 유발자가 될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뭐, 내 의견이 그렇다는 거지. 결정은 준이 회사와 잘 상의해서 하도록 해.”
“네. 그래도 역시 형한테 묻길 잘한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다. 아, 나 잠깐 실례 좀 할게.”
어차피 식이 시작되면 식사도 같이할 테니 경우는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화장실 옆으로 난 계단 쪽에서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호기심에 그의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계단 아래쪽엔 서필진이 전화 통화 중이었다.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크리스마스 시즌엔 좀 바빠서 못 갈 것 같아요. 아, 그러지 마시고 아버지랑 연말 쯤에 한국으로 오시는 건 어때요?”
경우는 그가 통화를 마칠 때까지 계단 옆 벽에 기대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통화를 마친 서필진이 올라오자 그를 본 경우가 미소 지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서필진 과장님.”
갑작스러운 경우의 등장에 서필진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겼다. 서필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부터 살폈다.
“왜요? 혹시 현호가 보면 안 되기라도 합니까? 어떻게 보면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건데 오다 가다 인사를 나눌 수도 있는 거죠.”
“그냥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런 곳에서 서 과장님 곤란하게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서필진은 경우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이도 아니고 박현호를 따라 다니다 보니 모임에서 그를 우연히 몇 번 보고 인사를 나눴던 게 다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해서는 다짜고짜 자신을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말했다. 솔직히 지금 박현호 밑에서 일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탓에 그의 제안에 혹하기는 했다.
그런데 한국에 온 이후 뚜렷한 성과를 보인 것도 아니었으니 그런 자신을 스카우트하려는 그의 저의가 궁금했다.
어쩌면 자신이 알지 모르는 박현호와의 악연 탓에 자신을 빼 가려는 속셈이 아닌가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고 해도 박현호와 갈라서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 그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자신은 쓰임을 다해 쫓겨나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 선뜻 그의 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경우는 잊을 만하면 한번씩 전화를 해 그의 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냥 좀 안타까워서요. 제가 듣기로 뉴욕대에서 미디어 관련학을 공부하셨다고 들었는데 솔직히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미디어와 관련이 거의 없잖아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런 제안을 드렸던 겁니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그에 대한 서필진의 경계심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때 마침 두 사람을 목격한 박현호가 저쪽에서부터 무서운 기세로 걸어오고 있었다. 누가 보면 경우가 해코지도 한 것처럼 박현호는 서필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오랜만? 우리가 스카우트하려는 작가들 중간에 빼돌려 놓고 너 참 낯짝도 두껍다?”
“누구? 아, 송지현 작가? 너네 스카우트하려고 했어? 몰랐네. 나는 송지현 작가가 먼저 제안한 거거든. 우리 회사로 오고 싶다고. 오고 싶다는 사람 말릴 필욘 없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지현 작간데.”
“…….”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누가 들으면 네 거 뺏어 간 줄 알 거 아니야. 그러게 진작 송 작가한테 잘하지 그랬어. 오죽했으면 나한테 와서 귀찮게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계약하자고 했겠어?”
살살 약을 올리는 통에 남의 결혼식에서 싸울 수도 없고 박현호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경우는 박현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열심히 해. 자존심만 너무 세우지 말고. 그러다 보면 이번 계약 끝나면 송지현 작가가 너네랑 하자고 할지 누가 아냐? 뭐, 쉽지는 않겠지만.”
저 자식을 때릴 수도 없고.
돌아선 경우를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이 올라간 그때 경우가 돌아봤다. 엉거주춤 손을 내리는 박현호를 힐끔 보고 미소 짓던 경우는 박현호의 뒤쪽에 서 있는 서필진을 향해 말했다.
“괜찮으시면 언제 차나 하시죠.”
그렇게 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를 보던 박현호의 시선이 천천히 서필진에게 향했다.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 서필진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박현호가 물었다.
“저 새끼랑 무슨 얘기했어?”
“별 이야기 안 했습니다. 동종 업계 사람인데 인사나 하자고…….”
“진짜지?”
“네.”
하지만 박현호의 마음속엔 자신도 모른 사이에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고 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싹트고 말았다.
* * *
“형, 저분이 형을 너무 부담스럽게 보고 있는데요?”
경우는 결혼식은 보지도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박현호의 뜨거운 눈빛을 느끼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놔둬, 원래 저런 놈이니까.”
결혼식을 보며 식사를 하던 경우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준 리차드에게 말했다.
“깜빡했는데 네가 말한 그 남자 대진일보 사람이야. 아마 종편 시작하면 그쪽으로 옮기겠지. 앞으론 종편에서도 시놉시스가 들어올 텐데 그쪽에서 일하면 만날 수도 있겠네. 미리 알아 둬.”
“네, 형.”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나 박현호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준 리차드는 그쪽은 무조건 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테이크의 맛을 음미하며 결혼식 내내 행복해하는 안동성을 보던 경우는 지난번 그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수씨 엄청 미인이네.’
‘그렇지? 내가 첫눈에 보고 반해서 쫓아다녔다는 거 아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하더니 결국 성공했네.’
‘성공은 무슨. 말도 마라. 연애 한번 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쫓아만 다녔으면 어림없지.’
‘그럼?’
‘처음엔 죽자 사자 쫓아다녔거든. 근데 아무리 봐도 넘어올 기미가 안 보이잖아.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 뒤로 쌩깠지. 연락도 안 하고 앞에 나타나지도 않고.’
‘잘됐다고 생각한 거 아냐?’
‘그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매일 찾아와 귀찮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니까 궁금해하고 자기가 너무 심하게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나중엔 걱정했다고 하더라. 그러던 차에 다시 짠 나타나니까 마음이 흔들려서 받아 준 거지. 연애에도 기술이 필요한 거야.’
그게 꼭 연애에만 써먹으라는 법 있나?
어차피 사람 마음이야 다 똑 같은 법이거늘.
서필진을 힐끔 본 경우는 살짝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