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노블레스 오블리주 (5)
「송지현 작가, 열악한 환경에 놓인 예술인들을 위한 통큰 기부」
인기 드라마 작가 송지현이 어려운 예술인들을 위해 3억 원을 기부했다.
송지현 작가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아직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전하며 어려운 형편에 놓인 예술인들을 위해 쓰이길 바란다며 3억 원을 기부했다.
드라마와 영화, 음악이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서 사랑 받는 문화 강국으로 성장하는 이 시점에 아직도 수많은 예술인들은 88만 원 세대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면서 이들에게 최소한의 생계 유지가 가능하도록 도와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예술인 복지법이 통과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부탁했다.
이에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 글로리’의 민경우 대표와 ‘내일 프로덕션’ 정명도 대표가 동참한 가운데 소식을 듣고 유명 예술인들의 기부 또한 이어지고 있다.
대진일보 연예부 이성철 기자.
* * *
“이성철 기자님?”
“네? 네!”
자신을 바라보는 박현호의 눈빛에 이성철은 바짝 얼어붙었다. 사주의 아들이자 종편의 수장이 될 사람이었으니 긴장이 되는 건 당연했다.
“이 기사 뭡니까? 아, 내 말은 이 기사를 쓴 경위가 어떻게 되냐 묻는 겁니다.”
“연예인들 응급실행 기사라도 쓰려면 속도전이 생명이라 병원에 간호사 몇 명을 섭외해 놨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지현 작가가 왔다길래 취재 나갔습니다. 데스크에서 송지현 작가 기사는 특별히 쓰라는 지시가 있어서요. 취재를 요청했더니 개인적인 일보다 이 사안이 더 급한 것 같다며 이런 식의 기사를 써 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송 작가가 기사 요청을 했다구요?”
“네.”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 보세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이성철을 박현호가 다시 불렀다.
“혹시 이 기자님, 다른 쪽 빨대는 아니죠?”
빨대, 내부 정보원이란 뜻의 은어였으니 다른 사람도 아닌 송지현이 기사를 써 줄 것을 요청했다는 이성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가 어려웠다. 유니언 스튜디오 사람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송지현이었다. 그런 그녀가 대진일보 기자에게 기사를 의뢰했다니 의심이 갔다. 유니언의 모회사가 대진일보임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공교롭게도 눈앞의 이성철 기자는 지난번 SBC 전효상 국장이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마지막 사랑> 역사 인식 문제를 거론한 기사를 낸 사람이었으니 이 또한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이성철은 박현호의 물음에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빨대라니 그 무슨 말씀을. 대진일보 월급 받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말 믿도록 하죠. 그만 나가 보세요.”
박현호의 방을 나와 자신의 자리에 돌아온 이성철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여간 묘하게 촉은 좋아 가지고. 하마터면 콩닥거리는 심장 탓에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참이었다.
이성철은 주변을 살펴보며 다들 자기 일에 정신이 빠져 있음을 확인하고는 열쇠로 잠가 놓은 서랍을 열어 안에 숨겨둔 2G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김강철에게 문자를 남겼다. 박현호가 의심하는 것 같으니 당분간 연락은 사절한다고.
뛰는 놈이 있으면 나는 놈도 있기 마련.
기자 정신? 그런 거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어차피 대진일보에서도 자신에게 요구하는 건 기자 정신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기사를 써내는 것이었을 뿐.
필요할 때 이용하는 건 박현호나 김강철이나 똑같았다. 그렇다면 실속을 차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 줄타기나 잘하면서 통장에 쌓일 액수를 생각한 이성철은 마음이 흐뭇해져 있었다.
이성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박현호는 내선 전화를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연예부 이성철 기자한테 사람 붙이세요. 아무래도 조금 수상합니다.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좀 알아봐야겠어요.”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자 박현호는 화면에 띄워 놓았던 이성철의 기사를 다시 한번 읽으며 그 밑에 달린 댓글을 일일이 확인했다.
- 다른 사람이 아니라 회당 몇 천씩 받는 송지현이 이야기하니까 되게 설득력 없네.
└ 자기 실력으로 받는 건데 돈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옴? 몇 년 전에도 생활고 때문에 죽은 연극배우 있었음. 송지현 같은 사람이 나서줘야 조금이라도 관심을 받는 거 아님?
- 그래 봤자 새 발의 피. 돈도 많으면서 겨우 저 정도?
└ 그러는 너는 100원이라도 기부해 봤냐? 하지도 않은 것들은 입 좀 닫자.
- 그 와중에 스튜디오 글로리, 좋은 일하네.
- 유니언 스튜디오는 등판 안 하냐?
- 전부터 스튜디오 글로리, 이런 사회 문제에 관심 많았음. 거기 민경우 작가 기부도 많이 함.
└ 그러고 보니 지난 드라마 <역전의 정수>도 사회 약자에 관심 쏟는 내용이었네. 좀 다시 보인다.
- 잘생겨, 돈 많아, 착해, 진정으로 다 가진 이 시대의 남자.
- 민경우랑 결혼하는 법, 민경우의 뺨을 때린다 나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 님, 그러다 철컹철컹 은팔찌 차요. 조심하셈.
- 차라리 송지현이 유니콘보단 글로리 갔으면 좋겠다.
└ ㅋㅋㅋ 유니콘은 또 뭐냐?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들보다 한참 아래인 스튜디오 글로리와 비교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쁜 박현호는 그대로 컴퓨터를 꺼 버렸다.
거기다 화력을 집중해도 대진을 제외한 다른 언론은 송지현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술계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였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쪽에 관심이 쏠리도록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박현호는 이제 다른 것보다도 이성철 기자가 의심스러웠다.
제 얼굴에 침 뱉기지, 다른 곳도 아닌 이 대진일보에서 어떻게 유니언 스튜디오를 까는 기사를 쓸 수 있는 건지.
그때는 그냥 화가 나서 다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넘어가 버렸는데 만약 이게 누군가의 사주로 쓰인 기사라면 그냥 둘 수 없었다. 사주를 한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한성음료의 안동성이었다. 모임에서 가끔 만나는 것 말곤 교류가 없는 그가 전화를 했단 사실이 의아했다.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어쩐 일이야? 결혼이라도 해?”
[어떻게 알았냐? 맞아, 나 결혼한다.]
“뭐?”
[그러니까 결혼식에 꼭 오라고.]
“참, 너 결혼식에 민경우도 부를 거냐?”
[온다던데.]
“벌써 전화했어? 나보다도 먼저?”
[뭐래. 내 은인한테.]
“은인?”
[너 몰랐구나. 올 3분기 우리 매출 엄청 오른 거. 그거 다 민경우 덕분이잖아. 경우가 준 리차드라는 대형 신인을 소개해 준 덕분에 말이지. 어쨌든 올 거지?]
“알았으니까 그만 끊어.”
박현호는 어이없어하며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준 리차드?”
한성음료의 새로운 모델이 핫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을 다름 아닌 민경우가 소개해 줬다는 사실에 박현호의 김이 팍 새고 말았다.
또 민경우.
도대체 민경우가 안 끼는 데가 없었으니.
“그나저나 안동성의 결혼식에 민경우도 온다 이거지?”
이성철 기자의 문제에 있어서 심증은 없지만 가장 의심 가는 놈이 있다면 역시 민경우였다.
어느 날 갑자기 드라마를 쓴다더니 제작사 대표가 되어 있질 않나, 자신이 원하는 작가를 중간에 가로채질 않나, 하는 일마다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아주 이상한 놈이었다. 분명 이전에는 그런 놈이 아니었는데…….
최근엔 선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엔 어쩐지 다른 얼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만나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 * *
“수고 많으셨습니다.”
“인터뷰 좀 한 게 수고랄 게 있나요. 민 작가가 기자까지 섭외해 준 덕분에 저야 뭘 한 것 같지도 않네요.”
“그나저나 기부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민 작가 말을 듣고 생각이 많아졌거든요.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돈밖에 없더라고요. 가장 쉬운 방법이죠.”
“선뜻 나서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러는 민 작가야말로 나보다 훨씬 많이 해 놓고 무슨. 내가 다 부끄러워질 지경이네요.”
“아닙니다. 작가님 아니었으면 다른 분들이 그렇게 나서 주지 않았을 겁니다. 덕분에 시선도 집중돼 법안 처리가 빨리 가능할 것 같다고 한석인 의원이 말하더군요. 예술 분야는 여야 가릴 것 없으니까 금방 통과될 겁니다.”
“고마워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쪽 회사에서 나 좀 받아 주면 안 되나?”
“예?”
“아무리 생각해도 스튜디오 글로리 만큼 괜찮은 회사는 없는 것 같더라구요. 혼자 있으려니까 사람들이 너무 귀찮게 하네, 나를.”
“……작가님이 오신다면 두 팔 벌려 환영이죠.”
“이상하게 잠깐 정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여간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건 민 작가밖에 없다니깐.”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기분 탓입니다, 기분 탓.”
며칠 후 예술인 복지법이 통과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송지현 작가가 ‘스튜디오 글로리’와 함께 하기로 전속 계약을 마쳤다는 기사기 인터넷을 휩쓸었다.
기사를 읽던 경우는 이래선이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다는 소식에 그녀의 병실을 찾았다.
“어머니께 말씀 들었어요. 감사드려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공짜 아닙니다.”
“당연하죠. 퇴원하는대로 제가 일해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저희와 전속 계약을 하시는데 어떨까 싶은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작가님 시나리오 꽤 괜찮더라구요.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어졌습니다. 영화 수익으로 대신 갚으셨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경우의 말이 믿기지 않았는지 이래선의 눈에서 눈물이 톡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주책없이 자꾸 눈물만 나오네요. 이렇게 도와주신 것도 감사한데 그런 제안까지…… 기쁘긴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제가 작가이기 이전에 장사꾼 아들이거든요. 이득이 나지 않으면 지갑을 벌리지 않는 게 장사꾼들 특징이죠. 전 이런 일에 적선 같은 건 안 합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이래선을 향해 경우가 씩 웃었다.
* * *
“자, 이거 먹어라. 원하는 대학 꼭 합격하길 응원하마.”
수능 시험을 하루 앞둔 어느 날, 경우는 그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자산관리사 겸 현재 고3인 임석주와 그의 친구 심달윤을 따로 불러내 찹쌀떡을 내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고기라도 사 주고 싶지만 그러다 컨디션에 지장 있으면 안 되니까 커피로 대신 하자. 니들도 커피는 마시지? 싫으면 과일 주스도 있고.”
“굳이 이렇게 안 부르셔도 되는데요.”
“알지. 너한텐 별일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나고 보면 이러는 것도 다 추억이다. 그리고 이건 선물.”
경우는 두 사람에게 나름 백화점에서 심혈을 기울여 고른 만년필을 선물로 내밀었다.
“우와, 저도 주시는 거예요?”
“석주 친군데 당연하지. 우리 석주가 네 도움 많이 받는다며?”
“친구끼리 도움은요. 그냥 석주가 저한테 조금 의지하는 편이죠.”
“내가 언제?”
“부끄러워하기는. 알아, 임마.”
“찹쌀떡도 주셨으면서 이건 뭐 하러요.”
“이제 성인인데 그걸로 싸인하면 폼 나잖아. 앞으론 싸인할 일도 더러 있지 않겠어?”
그런가?
임석주가 살짝 의아해하는 사이 카페 문이 열리며 김강철이 안으로 들어왔다. 경우가 찾아올 때면 항상 함께하는 김강철의 뒤늦은 등장에 심달윤은 그를 무척 반가워했다.
“두목님, 여깁니다!”
그의 두목님 발언에 모두가 김강철을 쳐다보자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익어 버렸다. 창피함에 그대로 뛰쳐나가려는 그를 심달윤이 기어이 잡아 왔다.
경우는 그런 김강철을 보며 물었다.
“너 이제 학교도 접수하고 다니냐?”
“아니거든.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들이 처음 만났을 당시 괴롭힘 당하던 그들을 경우가 구해 준 것과 달리 김강철은 지켜만 보고 있던 탓에 심달윤은 아직도 김강철이 두목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야, 꼬맹이! 너 호칭 똑바로 안 해?”
“두목님이 싫으시면 아저씨?”
“너, 자꾸 나한테 아저씨 할래?”
“두목님한테 형님 할 수는 없잖아요. 호형호제라니, 저는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아닙니다.”
“오냐, 예의 있는 놈아, 밖에선 나 아는 척하지 마라. 허리를 확 접어 버릴 라니까.”
“시험보는 애한테 별소릴 다 한다.”
“수능이 벼슬이냐?”
“괜찮습니다. 마음 넓은 제가 이해하고 넘어가야죠.”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의 모습에 김강철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 보던 대로 보는 거 알지?”
“고등학교 입학하면 모의 고사만 몇 번을 보는지 아세요? 시험에 있어서는 우리가 형님보다 전문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걱정 안 해. 근데 왜 이렇게 떨리냐?”
긴장하는 경우와 달리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한 임석주는 스스로 난이도를 조절해 가며 수능 시험을 치렀다. 불수능이라 불릴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지만 성적이 좋게 나오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첫눈이 내린 얼마 후 한성음료 안동성의 결혼식 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