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94화 (94/250)
  • #94. 노블레스 오블리주 (4)

    송지현 작가가 스튜디오 글로리와 물밑 접촉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타 작가의 인기를 다시금 실감할 정도로 네티즌 사이에서 그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물론 그중의 일부는 박현호 쪽에서 사람을 시켜 송지현이 유니언 스튜디오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몰아가려는 의도도 있었다.

    - 이건 좀 아니지. 스타 작가라고 여기저기 너무 간 보는 거 아냐?

    - 계약하기 전인데 무슨 상관. 저것도 능력임. 서로 모셔 가려고 안달이잖음.

    - 송지현 회당 고료가 너님 연봉보다 많을걸. 신경 끄셈.

    - 드라마 작가들 그렇게 많이 버는 거였어? 세상 부럽.

    - 오늘부터 내 목표는 드라마 작가!

    └ 모두 그런 거 아님, 얼마 못 버는 작가가 훨씬 많음.

    - 유니언 스튜디오인가 거긴 낙동강 오리알 신세?

    └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드라마 제작사 아닌가? 낙동강 오리알은 무슨.

    └ 드라마 제작사보다 파워가 쎈 드라마 작가? 후덜덜.

    인터넷 기사를 보며 댓글을 한참 확인하던 경우는 의사가 다가오는 기척에 휴대폰을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습니까?”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요. 영양실조도 극심하고 신장도 한쪽이 거의 망가져서 수술로 제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생명엔 지장이 없는 겁니까?”

    “살려 봐야죠. 지금 같은 시대에 영양실조로 사람이 죽는다면 너무 비극이잖아요.”

    의사가 환자에게 돌아간 사이 경우는 다시 자리에서 앉았다.

    그러니까 송지현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문득 이전 생에 송지현이 했던 인터뷰를 떠올렸다.

    기자는 업계 최고 수준의 고료를 받는 그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작가를 꿈꾸고 있다며 제2의 송지현을 꿈꾸는 이들에게 좋은 말씀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

    드라마를 잘 쓰는 비법이라든지 아니면 작가 십계명을 알려 줄 거란 예상과 달리 송지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작가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친구인 시나리오 작가가 생활고 때문에 지병을 앓다 사망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처럼 고액의 고료를 받는 이도 있지만 누군가는 원고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최소한의 생계 유지도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녀의 성토는 결국 묻히고 말았다. 사람들은 생활고로 세상을 떠난 이름 모를 작가 보다 그녀가 받는 거액의 고료에 관심이 간 탓이었다.

    그러다 그 이후 젊은 예술가들이 연이어 사망하자 그녀의 인터뷰가 재조명되었고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 과거 사건이 떠오른 경우는 혹시나 싶은 생각에 송지현의 친구인 시나리오 작가를 찾아보기로 한 거였다.

    다행히 이름이 특이해 기억하고 있었으니 제작사에 그녀가 지원했던 시나리오 덕분에 정보가 남아 있어서 그녀를 도울 수 있었다. 만약 데이터가 없었다면 송지현에게 온갖 핑계를 대 결국 알아냈을 테지만 그나마 일이 이렇게 마무리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때 복도 저쪽에서 김강철의 손을 붙잡은 한 노파가 걸어오고 있었다. 시골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이래선의 모친이었다. 경우는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에게 딸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힘없이 주저앉아 손수건을 눈물을 찍어 내는 모친의 모습이 안타까웠으니 딸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 * *

    전화를 받은 송지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잠시 멍해 있던 그녀가 곧 정신을 차리고 외투를 챙겨 방을 나왔다.

    “선미야, 나…….”

    그런데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보조 작가 곽선미가 자리에 없었다. 화장실을 간 건가 싶었는데 어디선가 조곤조곤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 옆 다용도실에서 선미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무척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오늘은 오전에 출근하셔서 계속 작업실에만 계셨어요……. 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럼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돌아선 곽선미는 그 앞에 서 있던 송지현의 모습에 마치 저승사자를 만난 것만큼이나 놀랐다.

    “헉! 서, 선생님…….”

    “너 지금 뭐 하니? 설마 내 스케줄 일러다 바친 거야? 누구한테?”

    “아, 아니에요. 오해세요.”

    “그래? 그럼 전화기 이리 줘 볼래?”

    “아니, 저기 그러니까…….”

    머뭇거리던 곽선미에게서 전화기를 빼앗은 송지현은 최근 통화 목록에서 조금 전까지 통화하던 전화번호를 발견한다.

    이 선생이라고 적힌 전화번호를 자신의 전화기로 눌러봤더니 이미 저장되어 있던 번호가 나왔다. 유니언 스튜디오 이진호.

    “어쩐지 요즘 나갈 때마다 만나는 통에 얼마나 기다렸을까 미안해했는데 이제 보니까 내 스케줄 알고 있었던 거였네. 그치?”

    “…….”

    “하도 전화가 와서 안 받으려고 저장해 두었던 것을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서슬 퍼런 그녀의 모습에 곽선미는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기 시작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그쪽에서 선생님 스케줄만 알려 주면 입봉하게 해 주겠다고 해서…….”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한 나를 팔아먹어?”

    “그냥 선생님 만나 뵙고 싶다고 얼굴만 뵈면 되니까 스케줄만 알려 달라고 사정사정하니까……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

    “선미야, 네 마음 모르는 거 아냐. 제작사에 붙어 있을 땐 해마다 드라마 나왔으니까 너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 안심했겠지. 근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서 편성은 언제 잡나 너한테까지 기회가 올까, 내가 맘 변하면 끈 떨어진 연 신세 되는 거 아닌가 싶은 거잖아.”

    “죄송해요…….”

    “네 맘 이해해. 근데 이런 식으로 너 이용해서 사람 뒤나 캐는 제작사가 제대로 된 곳이라고 생각하니?”

    “선생님…….”

    “너를 못 믿어도 나를 믿었어야지. 됐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미안하지만 지금 너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내가. 오늘은 안 오니까 그렇게 알아.”

    송지현은 그렇게 휙 돌아섰다.

    운전을 할 경황도 없었던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친구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으로 향했다.

    * * *

    “그렇게 힘들었으면 도와달라고 하지. 이게 뭐야?”

    “힘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약까지 먹고 있는 줄은 몰랐어. 래선이 얼마나 건강했니?”

    “가난이 예술가의 동력이라는데 동력은 개뿔. 먹고살기도 버거우니까 이일저일, 당연히 몸이 축나지.”

    소식을 듣고 이래선의 동료와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모두 같은 대학을 다니며 함께 연극을 하던 사이였다. 수술을 받아야 했던 이래선은 아직 중환자실에 있었다. 환자도 없는 빈 병실에 남은 친구들은 혹시 면회 시간에 친구의 얼굴이나 볼 수 있을까 싶어 기다리고 있었다.

    송지현은 드라마 작가의 길을 걸으며 잘 풀린 케이스였지만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예술만 해서 먹고사는 이들은 드물었다. 오로지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생계를 위해 투잡을 뛰다 결국엔 이 바닥을 떠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지현이 넌 잘나가서 다행이다.”

    “그래, 우리 중에 제일 성공했지.”

    “요즘 계속 제작사 이야기 나오던데 어디로 갈 거야?”

    “아무래도 유니언 쪽 아니겠어? 거기다 낫다잖아.”

    어느새 이야기의 중심에 자신이 되자 송지현은 불편해졌다. 한쪽에 딸의 쾌유를 비는 어머니가 계셨기에 더욱 그랬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를 본 그녀는 놀라고 말았다.

    “민 작가?”

    “아, 송 작가님.”

    그렇게 두 사람은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 * *

    “송 작가님이 연극을 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진작에 그만뒀죠. 제가 생각해도 연기를 못해도 너무 못했거든요. 근데 민 작가야말로 래선이를 어떻게 알아요?”

    “아, 저희 회사가 영화도 제작하거든요. 지원한 영화 시놉시스를 보다가 마음에 들어서 집으로 찾아갔다가 우연히…….”

    “원래 작가들 집도 찾아가고 그래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고마워서 그래요. 민 작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면서요. 정말 고마워요, 민 작가.”

    고마워하는 한편 송지현의 얼굴은 씁쓸해졌다.

    “사실 래선이 형편 어려운 거 알고 있었어요. 처음엔 몇 번 도와주기도 했는데 언제까지 내가 도와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길이 아니면 차라리 가지를 말지. 다른 일 하면 먹고살 수는 있을 텐데 그렇게 쉽게 생각했어요.”

    “…….”

    “그러다 연락이 끊겼어요. 아마 내 마음을 알았던 거겠죠. 연락이 오지 않으니까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홀가분했어요. 친구가 돼서 못됐죠?”

    “작가님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겠죠. 열심히 일하셨잖아요. 해마다 드라마 방송되려면 몸도 그렇지만 마음의 여유도 없다는 거 잘 압니다. 정상의 자리에 계셨으니 스트레스가 말도 못 했을 거란 거 잘 알고요. 본인 챙기기도 힘든데 친구까지 어려운 거죠.”

    “나보다 한참 어린 후배님한테 이해받을 줄 몰랐네요. 고마워요.”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하잖아요. 작가님 혼자서 사실 힘든 일이죠. 이건 근본적으로 시스템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맞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고요. 적어도 이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게.”

    “?”

    경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송지현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르는 그때, 경우는 사실 생각해 둔 것이 있었으니.

    이전 생에서 이래선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생활고를 이유로 젊은 예술가들이 요절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때 어느 시나리오 작가가 비정상적인 현실을 꼬집자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시나리오를 2,000만 원에 받고 팔기로 계약하죠. 시나리오 한 편에 2,000만 원이면 많은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시나리오가 그냥 나오나요. 최소 몇 달 고생을 해야 나오죠. 쉽게 말해 연봉이 2,000만 원이에요. 근데 그것도 다 받지 못할 때가 더 많아요.’

    ‘계약금으로 얼마를 받습니다. 제작에 들어가야만 잔금을 받을 수 있어요. 그나마 월급처럼 달에 100만 원씩 나눠서 주는 제작사는 나은 편입니다. 어떤 곳은 계약금으로 한 500만 원 주고 그 이후로는 나몰라라, 그렇게 몇 년 지나다 결국 영화 제작 무산되면 500만 원만 받고 끝나는 겁니다. 좋은 시나리오를 묶어두려고 기약도 없는 제작 일정까지 작가 같은 약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거라구요.’

    칸에서 주목 받는 박종연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계약만 되어 있는 채로 지급 받기로 한 돈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작가들이 많은 게 이 바닥의 현실이었다.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놓인 이들이 많았다.

    경우는 현실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다.

    최소한 사회적으로 일상 생활을 유지할수록 소득을 보장해 준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예술인 복지법이었다.

    이전 생에도 그런 법안이 발의되기는 했지만 확정되기까지 자그마치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물론 법안이 확정된다고 해도 현실이 쉽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같이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라고 경우는 확신했다.

    “법으로 보장을 해야죠. 그럼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이런 일에 적합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경우는 그 즉시 한석인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이미 지난해 발의된 법안이 있어요. 이슈가 되지 않으면 국회에서 계류되다 말 겁니다. 그러니 작가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론전을 벌이라 이 말이군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근데 제가 이야기해서 먹힐까요?”

    “음, 욕은 좀 듣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비교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까요. 그래도 요즘 한창 주목을 받고 있으니 작가님이 말씀하시면 영향력이 좀 있을 것 같은데요.”

    “욕먹는 거야 뭐, 내 전문이죠. 민 작가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저 지금도 욕 많이 먹어요. 드라마 너무 가볍다, 결말이 왜 그러냐, 서사가 없다, 순전히 대사빨이다, 작가 정신이 이상한 거 같다……. 어느 정도 단련돼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의기소침해 있던 그녀가 다시 힘을 내는 모습에 경우는 다행이라 여겼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예술인들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문제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대진일보 연예부에서 낸 기사가 그 화제의 중심점이었다. 기사를 읽은 박현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서 과장, 이 기사 뭐야?”

    “송지현 작가님…… 기사네요?”

    “내가 이 여자 못 알아봐서 서 과장한테 물은 줄 알아?”

    “…….”

    “당장 이 기사 쓴 기자 놈 내 앞에 불러와,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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