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93화 (93/250)

#93. 노블레스 오블리주 (3)

우연히 만난 정명도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송지현은 민경우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도 경우가 돈 많은 재벌집 아들이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부모 잘 만나서 고생 모르고 자라 하고 싶은 거 하는구나 싶은 생각에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마저 느끼고 있었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으니.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명도가 그를 나쁘지 않게 말한 게 송지현은 의아했다.

어떻게 보면 ‘내일 프로덕션’에서 가장 오래 몸담았던 고명희를 퇴출시킨 게 바로 민경우였으니 앙숙이라고 할 만했는데도 저럴 수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송지현은 정명도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엔 꼴도 보기 싫었죠. 어쨌거나 주력이었던 작가를 둘이나 잃었으니까요. 나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주식 가지고 흔들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데 좋게 생각할 사람 어디 있겠어요? 근데 다 지나고 보니 결국 나한테 손해 나는 일은 아니었던 겁니다. 두 사람은 안고 가는 게 나한텐 더 손해였으니까요.’

‘잠깐의 욕심에 흔들리지 말라더군요. 잘 몰라서 그렇지 세상에 인재는 많다고요. 전 같았으면 적당히 인기 있는 작가들한테 드라마 쓰게 하면서 시청률 높이기에만 급급했을 거예요. 잘나가는 작가들 중에 자기가 써보고 검증된 이야기만 재탕하듯이 쓰는 작가들 더러 있잖아요. 결국 그게 드라마 자체의 질을 떨어뜨리는 행동인데 당장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니 잘못을 반복하게 되는 거죠.’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근데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기성 작가와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다 보니까 내가 왜 이 일을 했는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나는. 유니언 스튜디오를 뛰어넘고 싶은 생각에 진짜 목표를 잊었던 거죠.’

그 정도면 꿈보다 해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명도가 여러 일을 겪으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 거겠지.

그렇게 정명도의 말을 듣는데 그녀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연극을 하겠다고 했을 땐 반대했지만 막상 딸이 쓴 드라마가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좋아하시던 어머니.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 같은 사람들이 병마의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재미있어야 할 드라마를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보니 송지현은 민경우에 대해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저녁을 먹은 뒤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실 송지현은 그동안 한 번도 <역전의 정수>를 보지 못했다. 바쁘기도 했고 남의 드라마를 챙길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역전의 정수> 마지막 방송이 있는 날, 작가는 어차피 자신이 쓴 드라마로 생각을 대신 전달하는 것이었으니 민경우를 알기 위해선 그가 쓴 드라마를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드라마 전부를 볼 시간이 없었던 그녀는 이전 회차의 줄거리만 파악한 뒤 마지막 회를 보기로 한 거였다.

시계가 열 시를 알리자 TV에선 어김없이 <역전의 정수> 타이틀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긴 광고 후 마침내 드라마가 시작되자 송지현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저 멀리 횃불을 든 관군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그들이 들고 일어난 지 3년, 다섯 고을의 수령이 죽임을 당했으니 그들은 단순히 물자를 약탈한 비적이 아니었다. 통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역 집단으로 ‘반적’이었다. 하니 임금을 비롯한 지배층 또한 그들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 결국 어명에 따라 그들을 토벌할 계획이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번 전투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정수가 넘어온 시간의 터널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그도 꺽쇠도 산채 식구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이제 정수가 가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도.

“우리 걱정이랑 말고 성님은 어서 돌아가시오.”

“하지만…….”

“성님, 어차피 성님은 이곳 사람이 아니었소. 이제부터의 일은 우리들이 알아서 할 거란 말이요. 그동안 성님이 우리한테 베풀어 준 은혜 잊지 않을라요. 그쪽에서 성님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한테 그만 돌아가란 말이오.”

“정아…….”

“내내 꺽쇠라 부르더만 이제 와서 정이라 부르는 거요? 하여간 성님도 끈질긴 양반이요. 더 있다간 가고 싶어도 못 간다니깐! 배웅은 못 해 주겠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인지 꺽쇠는 그렇게 돌아섰다. 멀어지는 꺽쇠의 모습을 보던 정수는 하는 수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일렁이는 시간의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정수가 그 속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꺽쇠가 헐레벌떡 그 자리로 돌아왔다.

“염병, 그새 간겨?”

꺽쇠는 조금씩 작아지는 터널을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듯. 마침내 그가 일어나자 시간의 터널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울리는 사람들의 함성. 그것은 관군들이 내지르는 포효였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꺽쇠는 머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동료들과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목숨을 건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 * *

드라마가 끝이 나자 송지현은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정수가 떠나고 난 이후 산채 식구들과 관군들의 전투는 꽤 볼만했다.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간 정수는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하지만 덮어 두기로 한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끝났는지보다 기존 질서에 항거하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는 거라 여긴 탓이었다.

그리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할지라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단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피해 입은 자들과 함께 거대 기업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물론 그들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보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삶에 끝이 없듯 그들은 지금도 어딘가 부당에 항의하며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점이 그녀는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드라마가 끝난 후 송지현은 정명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에요, 송지현. 그 민경우 작가랑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다리 좀 놔줄 수 있어요?”

[왜요? 그쪽 제작사로 가게요?]

“아니, 그냥. 작가 대 작가로서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네.”

[좋아요, 내가 한번 연락해 보죠.]

전화를 끊고 그녀는 언제 방송될지 모르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차기작을 전면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명도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민경우와 약속을 잡았다는 소식에 송지현은 드라마 첫 방을 앞둔 것처럼 살짝 긴장감이 느껴졌다.

* * *

며칠 후, 송지현은 마포에 있는 ‘스튜디오 글로리’로 향했다. 저녁 시간대라 일하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아 고즈넉한 사무실로 발을 디딘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경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그때 그 문콕!”

사격장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나오던 참에 실수로 저지른 문콕을 그냥 넘어가 줬던 잘생기고 착한 차주가 바로 경우였던 것이다.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았는데 그때 그분이 송 작가님이셨군요.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정말이에요? 진작 알아봤는데 모른 척한 거 아니구요?”

“아닙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왜 그런 짓을. 그리고 그땐 노 메이크업이셔서 지금하곤 확실히-.”

썩어 들어가는 송지현의 얼굴에 경우는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똑같으시네요. 제 눈이 안 좋아서 사람을 잘 못 알아봅니다.”

송지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으나 사실 경우의 말뜻을 다 알고 있었으니.

지난번 유니언 스튜디오 관계자와의 우연한 만남이 찍힌 사진을 제외하곤 언론에 나오는 그녀의 사진은 주로 제작 발표회나 인터뷰 때 찍은 사진이 전부.

연예인들도 그렇겠지만 영원히 남는 사진 탓에 자칫 흑역사를 생길까 걱정했던 그녀는 전문가의 솜씨가 1000퍼센트 발휘된 최상의 상태에서만 사진을 찍었으니.

평소 전혀 화장을 하지 않았던 그녀의 맨얼굴을 경우가 못 알아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다.

어쨌든 썰렁해진 분위기를 돌려놓기 위해 경우는 송지현을 안내하며 입을 열었다.

“술 좋아하세요?”

“없어서 못 먹죠.”

“그럼 한잔하시죠. 여긴 야근하는 저희 직원들이 간단히 조리도 하고 배달 음식도 먹을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인데요. 제가 요즘 요리 배우는 게 취미라 몇 가지 준비해 봤습니다.”

경우의 말마따나 식탁 위엔 안주로 삼을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몇 가지 준비되어 있었고 냉장고에도 맥주, 소주, 막걸리까지 종류별로 채워져 있었다.

잘생기고 매너도 좋은데 거기다 요리까지 잘하는 경우를 보며 송지현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쨌든 두 사람은 술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난 민 작가가 생각하는 새로운 작가 시스템 반대해요. 드라마는 처음부터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 실수, 줄일 수는 있죠. 그런데 메인 스토리 잡아 주고 방향 잡아 주면 그런 작가가 발전할 수 있을까요?”

“아예 다 잡아 주는 건 아니죠. 제가 말했던 메인 스토리도 회의를 거쳐서 하는 겁니다. 신인 작가의 의견이 안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다만 경험이 많은 기성 작가들의 도움을 받는 겁니다. 부족한 부분을 도움받는다면 더 빨리 성장하는 거 아닐까요?”

“어쨌거나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잖아요. 작가마다 분위기나 색깔이 제각각 달라요. 그런데 같이 쓰다간 뚜렷한 작가들의 개성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그건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매력도 사라진다는 뜻이죠.”

“어차피 집필에 들어가는 건 신인 작가들입니다. 신인 작가들이 자기 색깔을 낸다는 건 무리가 있죠. 그리고 개성적이라는 작가들 특징, 모두 경력이 오래된 작가들뿐이잖습니까?”

“저는 어려운 일도 경험해 봐야 실력이 는다고 생각해요. 드라마 압박감, 경험해 보셔서 알겠지만 어마어마하죠. 힘들다고 어렵다고 도와주다간 결국 이도저도 안 된다니까요.”

의견이 좁혀지는 건 아니었으나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면서 송지현은 경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괜찮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신인 작가들을 키우고 싶어하는 모습이 더욱 그랬다.

사실 일이 잘되면 자기 혼자 잘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 텐데도 경우에게 그런 모습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새로 인연을 맺게 된 경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돌아선 송지현은 그와 함께 일하게 되는 신인 작가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는 한편, 이런 곳이라면 같이 일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송지현이 돌아가고 난 후 경우는 사무실에 남아 있던 직원들이 누가 있는지 살폈다. 마침 야근을 하고 있던 제작부 모기범 PD를 본 경우가 물었다.

“저기 모 PD님, 혹시 우리 제작사에 들어온 영화 시놉시스 명단 따로 보관해 놓은 게 있을까요?”

“그럼요. 혹시 몰라서 데이터베이스로 다 정리해 놓는데 왜요?”

“혹시 이래선 씨라고 그분 작품도 있는지 봐 주시겠어요?”

“잠시만요.”

목록을 살펴보던 모기범이 잠시 후 대답했다.

“아, 여기 있네요. 이래선 씨.”

“그분 연락처가 어떻게 됩니까? 혹시 주소도 나와 있나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경우의 다급한 모습에 모기범은 의아했다.

* * *

“송지현 작가, 스튜디오 글로리행?”

인터넷에 난 송지현의 기사에 박현호는 책상을 쾅 내리쳤다.

요즘 박현호의 계략에 그녀가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자 영세한 인터넷 신문사에서 특종을 잡기 위해 그녀를 따라붙던 중 그녀의 스튜디오 글로리 방문을 기사로 낸 것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송지현과의 일에 ‘스튜디오 글로리’가 끼어 있다는 사실에 박현호는 더욱 열이 받았다.

“민경우, 민경우, 또 민경우야? 도대체 그 자식은 전생에 나랑 무슨 원수가 졌길래, 지난번 신도현 작가 때도 그러더니 이번엔 송지현 작가야?”

“아직 계약을 구체적으로 한 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랬든 저랬든 상관없으니까 어떻게든 송지현만 잡으라고.”

“네.”

“가만. 가만있어 봐.”

잠시 생각을 하던 박현호가 이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차라리 잘되었어. 이 기사, 잘만 이용하면 그림이 좀 될 것 같은데 말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를 내던 그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는 모습에 서필진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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