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92화 (92/250)
  • #92. 노블레스 오블리주 (2)

    <역전의 정수> 마지막 회 촬영을 앞두고 촬영 현장을 찾은 경우는 최무성과 어느 부분에 초점을 두고 촬영해야 하는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경우에게도 이전 생에서 다뤄 보지 못한 드라마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듯 최무성에게도 이번 드라마는 특별했다.

    주인공의 삶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부당에 항의했고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니 누구보다 잘 마무리하고 싶었고 주인공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길 바랐다.

    이야기를 나누던 경우는 문득 방송국 안에서 최무성의 입지가 걱정이 되었다. 지금이야 드라마를 하고 있으니 여러 지원을 받는 처지였지만 드라마가 끝이 나면 혹시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어차피 기회를 준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었으나 그를 여기까지 끌어들인 장본인이 자신이었으니 그냥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다.

    “PD님 요즘 방송국 내에서 어떠세요?”

    “갑자기 그게 무슨?”

    “드라마 끝나면 어떻게 될지 솔직히 걱정돼서요. 전에 하셨던 말씀도 있잖아요.”

    “이거 작가님께 괜한 걱정까지 끼쳤나 보네요.”

    “제가 원래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라.”

    “근데 그거 모르셨나 보네요.”

    “?”

    “방송국에서는 말이죠. 무조건 시청률이 갑입니다. 우리 드라마가 요즘 SBC 드라마국 먹여 살린다고 하잖아요. 다들 어찌나 작가님 소개 좀 해 달라고 하는지. 참, 작가님 저희 SBC랑 무슨 프로젝트 하기로 하셨다면서요.”

    “그렇죠.”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작가님하고 제가 무슨 도원결의를 했다나 뭐라나…… 작가님 소개 좀 해 달라고 매달리는 통에 솔직히 좀 피곤합니다.”

    너스레를 떠는 최무성에 모습에 경우는 안심이 되면서도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최무성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번 드라마 찍으면서 저도 생각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제가 참 좋아하더라구요. 집사람한테 미안한데 솔직히 집사람 얼굴 보는 것보다 드라마가 더 설레더라구요. 이 맛을 다시 알아 버렸는데 쫓아내기 전까진 제 발로 절대 안 나갑니다. 못 나가요.”

    “그럼 시청자들도 설레 뒤집어질 정도로 멋진 장면 한번 찍어 보죠.”

    “네. 일 한번 거하게 쳐 봅시다.”

    그리고 잠시 후 <역전의 정수> 마지막 회 촬영이 시작됐다.

    * * *

    “이거 진짜 뭐 하자는 시츄에이션이지?”

    송지현은 인터넷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며칠 전 자신이 유니언 스튜디오 사람과 만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오해를 푸는 자리였건만 어느새 새 작품 조율하는 자리로 둔갑해 있었다.

    두문불출하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스타 작가였던 송지현은 팬들과 기자들의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제작 발표회는 물론 인터뷰도 자주 했기에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그녀의 얼굴은 유명 연예인 못지않게 알려진 편이었다.

    그러니까 시작은 인터넷 모 커뮤니티였다.

    누군가 우연히 송지현 작가를 목격했다면서 한 장이 올라왔다.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 이었는데 남자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가 그 남자를 안다며 댓글이 달린 것이었다.

    그렇게 송지현이 ‘유니언 스튜디오’ 관계자와 만났다는 소식은 카더라가 아닌 증거가 있는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이 소식이 인터넷 기사화까지 되면서 그녀의 채널 DBN 개국 드라마 집필설도 탄력을 받게 되었다.

    “누가 이딴 사진을 올려서는.”

    “선생님. 이러다가 정말 그 종편 드라마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미쳤니?”

    “그래도 사람들 반응이 심상치 않은데 안 하셨다가 나중에 선생님이 무슨 소리를 들을지 좀 걱정돼요.”

    “욕을 먹어도 내가 먹고 밥줄 끊겨도 내가 끊겨. 사람은 주변 상황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그렇게 함부로 뒤집는 건 안 된다고 본다, 난. 그러니까 넌 걱정 마.”

    “그래도…….”

    “그렇게 한가하면 글이나 써. 너도 입봉 해야 할 거 아냐? 지난번에 나 보여 준 기획안 수정했니?”

    “아, 아직.”

    “딴생각할 시간에 그거 해. 나 잠깐 커피 사러 다녀올 테니까.”

    “제가 다녀올게요.”

    “내 말 뭘로 들었어. 넌 네 일 해. 바람 좀 쐴까 해서 나가는 거니까 넌 그냥 있어.”

    말은 그렇게 했어도 답답한 마음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녀는 일단 밖으로 나갔다.

    사실 이 모든 일은 그저 우연이 겹쳐서 생긴 일이 아니었으니 전부 다 대진일보 박현호의 계획이었다.

    대진일보의 종편 채널 DBN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싶었던 박현호는 그러려면 드라마가 잘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하니 누구보다 대한민국 톱이라 할 수 있는 송지현을 데리고 오고 싶었다.

    마침 오래 몸담고 있던 제작사와 결별로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송지현은 만나 주지조차 않았다.

    오랜 궁리 끝에 박현호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일단 기사부터 내. 송지현이 DBN 개국 드라마 준비 중이라고 말이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러다 송지현 작가 측에서 알면 거부감을 일으킬 게 분명합니다.”

    “당연히 모르게 해야지.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내부 관계자의 말이 와전된 거라고 후속 기사 쓰면 될 거 아냐. 유니언 스튜디오가 DBN 개국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했다면서.”

    “그래도…….”

    “이봐 서 과장, 왜 이렇게 안 된다는 말이 많아? 우리가 언제 된다는 가능성만 보고 덤볐나?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일단 기사부터 내. 우리 쪽에서 일부러 낸 게 아니라고 잡아떼면 송지현도 뭐라 하지 않겠지.”

    “그런다고 송지현이 움직여 줄까요?”

    “지도 사람인데 별수 있어? 작가나 연예인이나 사람들 인기를 먹고 사는건 똑같잖아. 그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뭐야? 사람들 이목이잖아. 기사 난 거 사과한다면서 일단 만나. 만날 기회를 얻어야 다음도 있는 거지.”

    “…….”

    “참, 그 보조 작가 먼저 접촉하는 거 잊지 말고.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메인 작가로 입봉하게 해 준다고 해 봐. 송지현 스케줄 술술 불걸. 일은 그렇게 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아, 사진 잘 찍는 사람 하나 섭외해서 우리 쪽하고 송지현 접촉하는 거 사진으로 찍고. 기사 말고 커뮤니티 같은 곳 있지? 그런데 올려. 우연히 발견한 척, 그림 되잖아. 전방위 압박을 해 보자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좋아. 무슨 일이 있어도 송지현 한번 잡아 보자고.”

    박현호의 지시 사항을 처리한 서필진은 괜한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지난번 SBC 드라마 <마지막 사랑> 실패 이후 박현호는 어딘지 모르게 쫓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탓에 전에 하지 않던 실수까지 하니 이러다 그의 뒤치다꺼리만 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 *

    촬영을 마친 <역전의 정수> 팀은 마침 경우가 예약해 놓은 회식 자리로 다들 모여들었다. 힘들었던 방송 초반을 지나 바람을 타고 승승장구하기까지, 이들에겐 지나온 시간들이 모험이고 추억이었다.

    함께 먹고 마시며 그동안의 있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역전의 정수> 제작을 맡은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의 모기범 PD가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고는 놀란 듯 입을 열었다. 경우가 오기 전부터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그는 결국 제작 PD가 되어 있었다.

    “어? 송지현 작가님, 역시 유니언 스튜디오로 가시는구나.”

    “뭐? 누가 어딜 가?”

    “송지현 작가님이요, 유니언 스튜디오로 가실 건가 봐요. 요즘 우리 드라마 제외하면 송지현 작가님 기사밖에 없는 것 같아요.”

    “확실히 난사람은 난사람이야. 웬만한 배우 못지않은 주목을 받잖아.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정도 유명세는 타 보고 죽어야 하는데…….”

    “우리 회사도 좋은데. 이왕이면 우리 회사로 오시지.”

    “누가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모기범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 경우가 서 있었다. 마침 주변을 돌던 경우는 모기범 옆에 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고 앉았다.

    “작가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나누십니까?”

    “송지현 작가님요. 요 며칠 계속 송 작가님 거취가 기사로 나오네요. 아무래도 유니언 스튜디오로 가실 건가 봐요.”

    “아, 그래요? 확정된 건가 보죠?”

    “그건 아니지만…… 어차피 확정된 거나 다름없지 않아요? 이렇게 계속 기사가 나는 걸 보면 말이에요.”

    “글쎄요.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죠.”

    “우리 회사도 좋은데……. 송 작가님 차라리 우리 회사로 오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근데 그건 송 작가님 의견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그렇죠.”

    모기범의 잔을 채워 준 경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모기범의 말에 따라 기사를 확인한 경우. 하지만 어디에도 송지현이 유니언 스튜디오와 계약했다는 소식을 보이지 않았다.

    ‘박현호, 많이 급했나 보네.’

    살짝 미소를 지은 경우는 문득 귀가 간지러운지 긁적였다.

    “이상하게 요즘 들어 귀가 자주 간지럽단 말이야. 누가 또 내 욕하나?”

    경우는 술잔을 들이켰다.

    * * *

    작업실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고르던 송지현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본다. 그곳엔 ‘내일 프로덕션’의 정명도 대표가 서 있었다.

    “정 대표? 여긴 어쩐 일이에요?”

    “작가 섭외하려고 왔다가…… 가만, 송 작가 작업실도 여기였어요? 하긴 예전엔 방송국이 다 여의도에 몰려 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잠깐 괜찮으면 차나 한잔하죠?”

    그렇게 두 사람은 카페 안에 자리를 잡고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 시간 방송가에 몸을 담았던 이들이었던 만큼 그들은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정명도의 아버지가 ‘내일 프로덕션’을 운영하던 시절, 그가 제작 PD, 송지현이 신인 작가로 딱 한 번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번번이 의견이 맞지 않아 평생 싸워야 할 싸움을 다 했던 그들이었다.

    그 뒤로 함께 일한 적은 없었지만 드라마에 대한 취향이 서로 달랐던 것이었을 뿐 드라마를 제외한 나머지는 소위 말해 쿵짝이 잘 맞는 편이었다.

    “참 오래 살고 볼일이에요. 정 대표하고 나하고 이렇게 마주 앉아서 차를 다 마시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세상이 개벽할 일이에요. 근데 송 작가. 정말로 ‘유니언 스튜디오’로 가는 거예요?”

    “또 그 소리예요?”

    “내가 언제 물었다고 그러십니까? 처음입니다만.”

    “정 대표님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어딜 가나 나만 보면 그 이야긴데 골치 아파 죽겠어요.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화진 픽쳐스랑 오래 일한 걸로 아는데. 재계약은 왜 안 한 거예요? 재계약만 했더라도 이 난리는 없었잖아요.”

    “새로 온 김 대표가 마음에 안 들어서요.”

    “아.”

    화진 픽쳐스를 오랫동안 이끌어 왔던 김현기 대표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그의 아들이 뒤를 이었지만 아버지만큼 일을 잘하진 못했으니 송지현의 눈에 찰 리 없었다.

    “유니언 스튜디오 괜찮을 것 같은데. 참고로 우리 내일 프로덕션으로 모실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아요.”

    “그것 참 다행입니다. 서로 의견이 맞아서.”

    “그나저나 고 작가 일은 참 안 됐어요. 고 작가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고 작가가 잘못한 건 맞으니까 괜찮습니다.”

    “정 대표님 못 본 사이에 성자가 되셨네요. 예전엔 안 그러지 않았나?”

    “저도 이번 일로 느낀 게 많거든요. 젊은 대표한테 한 방 먹은 거죠.”

    “젊은 대표라면……?”

    “스튜디오 글로리의 민경우라고. 고 작가와 안 좋게 얽힌 대표가 하나 있죠. 그 친구 덕분에 드라마 제작사 대표로서의 소임, 의무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됐죠.”

    이전과는 정명도가 확실히 달라졌다고 느낀 송지현은 그가 하는 이야기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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