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노블레스 오블리주 (1)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지분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기 위해 민지선의 사무실로 경우는 물론 김기영 변호사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번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 경우가 보유한 지분의 절반을 담보로 돈을 빌리겠다는 일종의 차용증을 작성한 것이었을 뿐, 실질적으로 경우가 보유하고 있었던 만큼 이번에 그것과 함께 나머지 절반의 지분까지 모두 넘기기로 했다.
“공짜 아닌 거 알지. 계산은 될 수 있는 한 철저하게 하자고.”
“지난번에 반은 줬으니까 이번엔 남은 거 주면 되잖아. 10원짜리 한 개도 안 빼먹을 테니까 걱정 마.”
“근데 누나 돈 많은가 봐. 한두 푼이 아닌데.”
“이럴 때를 대비해서 나도 돈 좀 굴리고 있었지. 비자금 같은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아무렴 내가 책잡힐 짓이야 하겠니?”
“당연히 아니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
“뭐?”
“아니, 내 말은 누나가 그만큼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이거야.”
두 사람의 모습에 지켜보던 김기영 변호사가 풋 하고 웃었다.
“뭐야? 왜 웃어?”
“아니, 현실 남매라고 할까? 너도 동생이랑 있으니까 영락없는 누나라서.”
“큼큼. 처리는 금방 되는 거지?”
“그럼. 걱정 마.”
“기분이 어때, 누나?”
“기분이랄 게 뭐 있겠니. 솔직히 실감은 안 난다.”
“그래도 이제부터가 진짜야. 누난 아버지 말고도 어머니도 넘어야 할 산이고.”
“알아. 세상 사람들이 너처럼 생각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알아주니 다행이네. 참, 돈은 바로 입금되는 거지? 외상은 절대 안 돼.”
“너는 나를 뭘로 보고. 너야말로 돈 생겼다고 흥청망청 쓰면 안 돼. 알았어?”
“내가 무슨 어린애야.”
“돈 앞에 애고 어른이고 어디 있어. 한꺼번에 액수가 많아지면 자기도 모르게 혹하게 되는 거란다.”
“걱정마. 안 그래도 사고 싶은 게 있어서 돈이 필요하던 참이었거든.”
“뭔데? 설마 슈퍼카 뭐 이런 거 아니지?”
“미쳤어. 그걸 왜 사? 지금 타고 다니는 차도 멀쩡한데. 그리고 누나가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같은데 나 이래 봬도 유명인이야. 내가 그런 거 몰고 다녀 봐.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재벌집 자식이 돈지랄한다고 할 거 아냐.”
“우리 동생 많이 컸네. 사람들 이목도 다 생각하고. 근데 뭘 사려고 그러는데?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진작 말을 하지.”
“왜? 사 주려고?”
“미쳤어? 잔소리하려고 그러지.”
“그럼 그렇지. 내 돈 내가 알아서 쓸 테니까 신경 끄셔.”
“아무래도 수상한데.”
“쓸데없는 데 쓰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 투자할 거야. 가진 거라곤 돈뿐인데 나도 돈 불려야지.”
“투자? 설마 어디 안 좋은 애들한테 엮여서 사기당하는 거 아니지?”
“그런 거 아니래도. 잔소리할 거면 나 그만 갈래.”
어떨 때 보면 고지식한 사람이 바로 민지선이었다. 그런 사람한테 비트코인에 투자한다는 말, 절대 못 하지. 어차피 민지선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닌 새명일 테니 굳이 권할 생각도 없었다.
경우는 여윳돈을 남겨두고 나머진 모두 비트코인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가늠할 수 없이 치솟는 비트코인의 가치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아쉽지 않아? 이것까지 다 넘기면 정말 새명에 한발 걸치던 것도 떨어지는데.”
“누나야말로 괜찮겠어? 후계자 경쟁 시작되면 누나를 대놓고 경계하는 사람들도 생길 거야. 진짜 전쟁이 시작되는 거지.”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 새명을 먹는 일인데 쉽지 않을 거란 거 잘 알아.”
“사람들이 지금의 누나 얼굴을 봐야 하는데. 완전 다 씹어 먹겠다는 얼굴이잖아.”
“솔직히 나한텐 없던 기회가 왔잖아.”
“잘해 봐, 지금처럼. 실수하지 말고.”
“고맙다.”
솔직히 이게 누나에게 좋은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누나의 표정에 조금은 안심하며 경우는 그녀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 *
휴식기라도 차기작 준비를 위해 느지막이 작업실로 출근한 송지현 작가는 오랜 시간 함께하고 있는 자신의 보조 작가 곽선미를 찾았다.
“선미야, 나왔어.”
“오셨어요.”
“오늘은 어땠어? 연락 온 거 있어?”
“아니요. 오늘은 조용했어요.”
“그래? 이제 떨어져 나간 모양이네.”
현재 제작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완전 자유의 몸인 송지현은 자신들과 함께 일하자며 연락해 오는 수많은 제작사 탓에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었다.
그녀 역시 오랫동안 함께 일해 왔던 곳이 있었으나 얼마 전 계약 기간이 끝이 나고 재계약을 하지 않자 그 이후부터 조용한 그녀의 삶에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드라마 작가였다.
썼다 하면 흥행, 출연한 배우들은 주연은 물론, 조연까지 씬 스틸러라며 주목을 받았다. 당연히 배우는 물론 방송국에서도 그녀와 함께 일하고 싶어했다.
그런 그녀를 잡을 수 있다면 편성은 물론 PPL까지 알아서 들어올 정도였으니 제작사로서는 이런 대어를 놓칠 수 없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래도 유니언 스튜디오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제작사 중에서는 손에 꼽히잖아요. 듣기론 업계 1위라고 하던데.”
“다른 작가들 사이에서 평판이 괜찮나 보네?”
“이왕이면 큰 제작사로 가고 싶어하잖아요.”
“그럼 지들이나 가라 그래. 나는 싫으니까.”
“왜요?”
“거기 대표가 오진원이었지, 아마? 제작사 하면서 돈 많이 벌었을 거야. 톱 배우 데려오면서 몸 값 올려주고 스타 작가 고료 높여 주고. 덕분에 경쟁적으로 몸값이 올랐잖아. 나도 그 덕에 고료 올라서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그 사람이 돈이 넘쳐나서 그랬겠어? 아니, 제작비는 그대로 두면서 그렇게 쓴 거야. 스탭이나 조연들은 남은 돈 나눠 가져야 하는데 사람이 그럼 못써.”
“정말요?”
“내가 이 바닥에서 일한 게 몇 년인데? 그 오진원 대표가 카메라 들고 다니던 시절부터 방송밥 먹은 사람이야, 내가. 근데 그 유니언 스튜디오, 쉬쉬하고 있지만 대진일보에 넘어간 거 모르는 사람 있나? 너는? 설마 몰랐니?”
“아니요. 듣는 귀가 있는데 모를 리가 있겠어요.”
“그렇지. 너도 아는 일이잖아. 거금을 받았다지, 아마? 난 돈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이랑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 특히 그 대진일보 그놈도 맘에 안 들어. 아니, 돈 많은 것들은 하여간 다 맘에 안 들어.”
“근데 작가님은 예전부터 돈 많은 사람 싫어하셨잖아요. 왜 그런 거예요?”
“내가 작가 되기 전에 뭐 했는지 말했던가?”
“네. 상고 졸업하고 세무사 사무실에 취업하셨다고 그러셨어요.”
“그랬지. 그때 별의별 꼴을 다 봤거든, 내가.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해.”
지금이야 원고료가 대한민국 톱을 다투는 스타 작가였지만 송지현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소녀 가장이었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그녀는 상고를 졸업한 후 곧장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세무사 사무실에서 일하고도 밤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두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자 그녀 역시 일을 그만두고 2년제 전문대에 입학한다.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꿈이 있었으니 바로 연극 배우.
학창 시절 소풍을 대신해 극장에 연극을 보러 갔던 그녀는 눈앞에서 열연하는 배우들의 연기에 매료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배우를 꿈꿨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으니 자신에게 연기에 대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대신 다른 재능을 발견했으니 글이었다. 연기 대신 그녀는 희곡을 썼다.
졸업 작품 발표회에서 그녀가 쓴 희곡을 좋게 본 드라마 제작사 PD의 눈에 띄어 드라마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이후 그녀는 말 그대로 승승장구.
“앞으로도 제작사에서 제의가 들어올 것 같은데 안 들어가실 거예요?”
“글쎄다. 지금은 딱히 가고 싶은 데가 없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띠롱, 휴대폰 문자 메시지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화는 물론 곽선미의 전화까지 울리자 송지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뭐야, 나 무슨 사고 쳤니?”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해요?”
“혹시나 싶어서. 뭐지? 무슨 일이지?”
발신자를 확인하니 자주 알고 지내던 기자였다.
“주 기자, 어쩐 일이야?”
[그거야 내가 묻고 싶은데. 송 작가 정말 DBN으로 가기로 한 거야?]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뉴스도 안 봐. 지금 인터넷에 난리 났잖아. 송지현 작가, 종편 DBN 개국 드라마 조율 중이라고.]
“누가? 내가?”
[아니야? 그럼 그렇지. 송 작가 같은 사람이 종편에 갈 리가 있나. 난 또 송 작가가 나 모르게 다른 데 특종 준 줄 알고 기분 상할 뻔했어. 정말 아니지?]
“아니라니까. 내가 미쳤어? 알았으니까 일단 전화 끊자.”
기자와 통화를 마친 송지현은 인터넷에 뜬 기사를 확인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실시간 검색어에도 오를 만큼 송지현 작가의 DBN 개국 드라마에 대한 화제성은 단연 톱이었다.
“허! 이게 뭐 하자는 수작이야?”
진드기처럼 사람을 귀찮게 하더니 끝내는 이런 수법까지 쓰는구나 싶었던 송지현은 코웃음을 쳤다.
예전에 어떤 드라마의 남자 배우 캐스팅으로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녀는 자신이 이미지를 생각하는 배우도 아닌데 이런 저질 수법에 쉽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영 집중이 되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컴퓨터를 꺼 버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런 날 쓰긴 뭘 쓴다고. 선미야, 나 그만 퇴근할란다.”
“벌써요? 출근하신 지 얼마 안 되셨는데요?”
“당장 대본 넘겨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오늘은 그냥 재껴. 너도 좀 쉬고.”
“어디로 가실 건데요? 혹시 거기 가세요?”
“응. 스트레스 풀 땐 역시 거기만 한 곳이 없지.”
송지현은 그렇게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건망증 탓에 차를 어디다 주차해 뒀나 두리번거리던 그때 그녀의 앞을 누군가 가로 막았다.
“송지현 작가님?”
돌아보니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누구시죠?”
“이런 사람입니다. 송지현 작가님과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요.”
남자가 건넨 명함을 보고서야 상대가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나온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인터넷에 뜬 기사 때문에 열 받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되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카페로 들어간 두 사람.
그때 송지현은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 그들의 사진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 * *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괜찮았던 송지현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유니언 스튜디오 관계자와 만나 자신들의 내부 논의가 의도치 않게 외부로 흘러간 것 같다며 단단히 사과를 받은 참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난 후 송지현이 들른 곳은 그녀의 취미 생활 중 하나인 사격.
실내 사격장으로 가 쌓인 스트레스를 잔뜩 풀고 나왔는데 기분이 너무 업된 탓이었는지 하필 문을 열다 그만 옆에 주차된 차에 문콕을 하고 만 것이었다. 평소 조심성이 부족한 편이었던 그녀는 하필 피해 차량이 외제차라는 점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색이 살짝 까진 것에 불과했으나 외제차인 탓에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당장 차주에게 전화를 걸어 해결하고 싶었으나 그 시간을 조금만 미루고 싶어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훤칠하니 큰 키에 배우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의 차주를 본 송지현은 하마터면 본분을 잊고 물을 뻔했다.
‘자네, 배우 해 볼 생각 없나?’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은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 죄송한데요. 제가 실수로 문콕을 했거든요. 도색이 좀 까졌는데 보험 처리해 드릴게요.”
그랬더니 남자가 슬쩍 도색이 까진 부분을 보더니 송지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별로 티도 안 나는데요. 그냥 놔두세요.”
“아니,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중에 이의 제기 안 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럼.”
그렇게 말하고는 쿨하게 떠나 버린 남자.
“세상에. 있었어. 잘생기고 착한 남자가.”
다시 기분이 좋아진 송지현 역시 차를 타고 현장을 벗어났다.
룸미러로 송지현이 떠나는 모습을 확인한 경우가 살짝 미소 지었다. 경우에게 차는 안전하게 잘 굴러가기만 하면 그만, 도색이 살짝 벗겨진 정도야 별문제는 아니었으니.
사무실로 들어가던 경우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는데. 누구지?”
하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자 금세 잊고 말았다.
경우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