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90화 (90/250)
  • #90. 카인과 아벨 (5)

    “뭐?”

    걱정 어린 김예신의 보고에 윤정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많이 다쳤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현장에서 바로 병원으로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차 대기시켜. 내가, 내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네, 그리고…….”

    서둘러 외투를 챙기던 윤정숙은 말을 잇지 못하는 김예신의 모습에 그녀를 돌아봤다.

    “현장에 민정현 본부장님이 같이 계셨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다가 그만…….”

    “하!”

    윤정숙은 저도 모르게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 *

    윤정숙의 친정인 유진 그룹 산하에 있는 병원에 그녀가 들어선 순간 이미 대기해 있던 원장과 그 이하 의사들이 그녀를 맞았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윤정숙은 앞질러 걸으며 물었다.

    “우리 애 어디 있죠?”

    “지금 VIP 병실에 입원해 계십니다.”

    재빨리 윤정숙의 옆에 붙은 원장이 그녀를 안내했다. 병실을 가는 길에 원장은 경우의 상태를 뭐라 설명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병실 앞, 민경우라고 쓰인 이름을 본 윤정숙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환자복을 입고 침실에 앉아 있는 경우가 우적우적 빵에 주스까지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팔에 한 깁스가 눈에 띄었지만 다행히 상태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 어머니 오셨어요?”

    “너, 지금 뭐 하니?”

    “저녁을 안 먹어 가지고……. 먹어도 된다고 해서요.”

    걱정돼서 와 봤더니 기껏 하는 소리에 윤정숙은 어이가 없었다.

    안심이 된 탓이었는지 시선을 돌리자 경우의 수발을 들고 있는 김강철과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는 민정현과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윤정숙의 눈빛에 김강철은 꾸벅 인사를 했다.

    “잠깐 경우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 좀 비켜 주겠어?”

    윤정숙의 말에 김강철이 서둘러 나갔다. 이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민정현이 목례를 하곤 윤정숙을 스쳐 나갔다. 아주 잠깐 시선이 스쳤지만 그 찰나의 시간이 두 사람에겐 무척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윤정숙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래, 생각보다 많이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걱정하셨어요?”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인데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

    “현장에 정현이도 있었다며?”

    “형은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실수해서 그런 거예요.”

    “내가 뭐라고 했니? 누가 보면 내가 정현이를 잡는 줄 알겠다.”

    “…….”

    “이번 기회에 회사로 들어와. 지난번에 말했듯 건설 쪽에 자리를 만들어 놓으마.”

    “어머니!”

    “건설 쪽 일은 하나도 모른다고 해서 네 말대로 시간을 줬다. 처음엔 네 말도 틀린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만 지금 하는 걸 보니 그만하면 되겠다 싶어. 지금 너한테 건설을 맡기겠다는 게 아니야. 지금 하는 것처럼 건설도 그렇게 하나둘 배우면서 하도록 해.”

    “싫습니다.”

    “이미 말했을 텐데. 사람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어머니가 뭐라 하셔도 저는 회사에 들어갈 생각 없습니다. 지금이 좋아요.”

    “준호까지 저리 된 마당에 나 또한 널 포기할 생각은 없다.”

    “어머니는 기어이 어머니 원하시는 대로 하시겠단 말씀이시군요.”

    “그래. 네가 싫다고 한다면 난 네 두 손을 자르고 두 발을 잘라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앉힐 작정이다. 내가 그러길 원하니?”

    그렇게 말하면 기가 꺾일 줄 알았다. 하지만 경우는 미소 짓고 있었다.

    “한번 해 보세요. 저도 어머니 하시는 대로 지켜만 보고 있진 않을 겁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내가 안심이 되는구나. 내 아들이라면 응당 그렇게 나와야지. 할 얘기 다 했으니 이제 그만 가마. 간병인 곧 도착할 테니 그리 알고.”

    자리에서 일어선 윤정숙이 병실 밖으로 나가자 재빠르게 김강철이 들어왔다.

    “어휴, 여기 왜 이렇게 춥냐? 난방 좀 올릴까?”

    “됐어.”

    “그래도 네가 걱정되긴 되셨나 보다. 근데 뭐라셨어?”

    그의 말에 경우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선전 포고를 받았으니 이쪽에서도 그에 맞게 대응할 준비를 갖춰야 했다.

    그사이, 병실 앞에선 윤정숙이 민정현과 마주하고 있었다.

    다친 사람은 경우였는데 오히려 민정현의 안색이 다 죽어 가는 꼴이었다. 이런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가려다 결국 돌아선 윤정숙이 입을 열었다.

    “너는…… 괜찮은 거니?”

    “……네.”

    “그럼 됐다. 간병인 불렀으니 그만 들어가 봐. 집에서 걱정하겠다.”

    그렇게 윤정숙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선 민정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었다.

    * * *

    민정현이 집으로 들어서자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던 그의 아내가 물었다.

    “도련님은? 괜찮아요?”

    “어. 팔만 조금 다쳤어. 금방 나을 거래.”

    “그나마 다행이네.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괜히 당신이랑 같이 있다가 오해 살 뻔했잖아.”

    오해가 아니었다. 분명 자신 때문에 경우가 위험에 처할 뻔했다.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안도했지만 마음 한편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아내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근데 당신 얼굴 왜 그래요? 무슨 다른 일 있는 거 아니죠?”

    “여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묻는 거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

    “왜 그래요? 당신 요즘 이상한 거 알아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당신 나 사랑해? 내가 새명 아들이라서, 새명 후계자라서 나랑 결혼한 거야? 새명이 없으면 나 버릴 거야?”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예요?”

    “묻는 말에 대답해. 나한텐 중요한 문제니까.”

    그러자 그를 한심하다는 듯 보는 아내가 입을 열었다.

    “난 그런 거 몰라요. 나한테 물어도 대답해 줄 수 없어.”

    “당신 생각을 묻는 건데 왜 대답을 못 해?”

    그러자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당신이나 나나 무슨 생각이 있다고 그래요? 우리는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왔던 사람들이잖아. 이거 해야 한다, 저거 하면 안 된다. 정해진 틀 안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살아왔어. 안 그래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는데?”

    “…….”

    “나는 새명의 안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님 뜻에 따라 당신이랑 결혼했어요. 그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고. 그런데 하루아침에 내 생각을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까? 당신은? 당신이라면 이럴 때 뭐라고 대답할 거야? 할 수 있기는 해요?”

    주어진 삶.

    아내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새명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에게 주어진 삶은 새명이었다. 이제와 다른 길을 갈 수도 없다.

    그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당신 말이 맞아. 내가 잘못 생각했어. 난 그냥…… 확신이 필요했어. 당신이든 뭐든 내가 앞으로 할 일에 대한 확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힘들어하지 마. 내가 옆에 있어 줄 테니까 우리 멀리 돌아가지 마요. 응?”

    “그래. 그럴게. 이젠 흔들리지 않아. 그러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

    그날부터 민정현은 달라졌다. 더 이상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좋은 사람인 척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냈고 조금 더 공격적으로 변모했다. 그 모습이 모험가적인 스타일로 카리스마가 느껴지게 했다.

    그게 사람들에겐 긍정적으로 비춰졌다. 회사를 이끌어 갈 책임자가 되려면 너무 안주하기보다 모험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런 민정현의 변화는 윤정숙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 * *

    경우의 퇴원을 기념해 인도에 있는 준호를 제외한 일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래, 이제 다 나은 거냐?”

    “애초에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요, 뭘.”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야. 앞으로 더욱 조심하도록 해라.”

    “네, 아버지.”

    자신과의 대화가 있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 가는 경우를 보던 윤정숙의 시선이 큰며느리 배예원에게 향했다.

    “그래 큰애는 요즘 뭐 하고 지내니?”

    “병원에 다니고 있어요.”

    배예원의 말에 누구보다 민 회장이 놀랐다.

    “병원? 혹시 어디 안 좋은 거냐?”

    “아니요. 아이를 가질까 해서요. 미리 준비를 해야 건강한 아이를 낳잖아요.”

    “그래, 잘 생각했다. 결혼한 지 꽤 됐는데 아이 가질 때도 됐지, 암.”

    기뻐하는 민 회장과 자신의 아내를 사랑스러운 듯 보고 있는 민정현. 그런 그들을 못마땅하게 보던 윤정숙이 화제를 돌리려고 경우를 바라본 순간,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경우가 선수를 쳤다.

    “참,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새명물산의 제 지분을 누나에게 넘길까 합니다.”

    폭탄선언과도 같은 경우의 발언에 가장 놀란 건 지선이었다.

    “야!”

    “누나한텐 뭐라고 하지 마세요. 누나가 시킨 게 아니에요. 순전히 제 뜻이니까. 어차피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물려주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 마음대로 하고 싶습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어차피 저에게 필요 없는 거니까요. 저는 지금도 앞으로도 새명에서 일할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새명물산 지분도 필요 없구요. 그럴 바에야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게 지선이다?”

    “보셔서 아시잖아요. 누나 능력. 새명유통 하나에만 그치기엔 아까운 실력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 온 새명이 더욱 발전하기를 원하구요.”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거냐?”

    “네. 그래서 아버지께도 부탁드려요. 새명의 후계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 사심은 빼시고 새명과 새명에 딸린 식구들을 더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고만 치던 막내가 이런 말을 하니 민 회장도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정에 이끌리지 말고 오로지 실력으로 판단하라니.

    아들의 말 한마디에 정에 이끌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지만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한바탕 소란이 인 식사 자리가 끝나고 민지선은 경우를 따로 불러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런 일을 하려면 애초에 나하고 상의를 하던가?”

    “어차피 언젠간 할 일이었잖아.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니까. 누나는 그냥 하던 대로만 해. 필요한 건 내가 다 서포트 해 줄게.”

    “세상 참 든든하네. 됐고, 사고나 치지 마. 알겠어?”

    “하여간 아직도 나를 그렇게 보는 건 누나뿐이라니까.”

    누나와 이야기를 마친 경우는 홀로 앉아 있는 민정현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미안해요, 형. 결국 이렇게 끝내서.”

    “미안해할 거 없어. 네가 뭐라 하든 나도 절대 새명 포기하지 않을 거거든. 내 인생에 다른 길 따위는 없어.”

    “그게 형이 원하는 거예요?”

    “그래. 그럼 넌 지선이 편에 서서 지선이가 후계자가 되도록 도울 생각이야?”

    “형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기 전까지는요. 어쨌든 건투를 빌어요.”

    “나도. 물론 넌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테지만 말이야. 새명은 내 차지가 될 거거든. 그럼 지선이도 네 덕분에 새명유통까지 빼앗기겠지. 난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차지할 거야.”

    “글쎄요, 쉽지 않을 거예요.”

    “그거야 두고 보면 아는 거고.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민정현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날 일은 내가 미안했어. 그땐 너무 경황이 없어서 미안하단 말도 못했다. 널 위험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알아요.”

    “그럼 다행이고.”

    경우의 어깨를 툭툭 친 민정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가?

    물론 그가 새명을 포기하길 바란 건 아니었다. 새명에 모든 것을 건 사람에게 새명 밖에도 나름 괜찮은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평생 새명에 얽매인 그는 새명에서 결국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경우는 못내 안타까웠다.

    잠시 혼자 앉아 생각을 정리하는 그때 집안일을 돌봐 주고 있는 사람이 경우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사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드디어 최종 보스 등판인가?

    어머니를 만나기도 전에 진이 빠진 것 같은 경우는 기압을 넣고 어머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윤정숙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경우가 그 앞으로 가 앉자 그녀가 신문을 내리고 시선을 맞췄다.

    “이게 내가 한 요구에 대한 너의 답이니?”

    “네. 어머니가 뭐라 하시든 전 절대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래, 오늘 보니 새삼 네가 내 아들이라는 실감이 났다. 때론 승부를 던질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 너는 너대로 네 갈 길을 가거라. 나는 나대로 내 갈 길을 갈 생각이야.”

    경우는 깨달았다. 어머니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과거라면 모를까 자신 역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경우는 어머니께 깨우쳐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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