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89화 (89/250)
  • #89. 카인과 아벨 (4)

    띠리리리. 띠리리리.

    깊은 밤, 방 안을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민홍준은 잠에서 깨어났다. 협탁에 놓은 시계를 확인해 보니 새벽 세 시.

    아직 한창 잘 시간에 도대체 누가 전화를 한 건가 싶어 봤더니 첫째 정현이었다. 이 새벽에 전화할 아이가 아닌데 한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은 마음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그래,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그때 들려오는 건 영문 모를 소리.

    혹시나 술에 취하지 않았나 싶었지만 목소리는 의외로 말짱했다. 그러자 별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는 한편 짜증이 확 올라왔다.

    “무슨 일이야? 알아듣게 설명해야지. 그보다 지금 시간이 몇 신지 알고 있는 게냐?”

    [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제 인생을 망친 건 아버지 탓이라구요.]

    “정현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 들을 소리를 해야지.”

    [차라리 저를 낳지 말지 그러셨어요. 아니면 어머니가 저를 미워하든 싫어하든 그냥 내버려 두지 그러셨어요.]

    “정현아, 네 어머니가 너한테 뭐라고 하든?”

    [어머니 탓이 아니에요. 다 아버지 탓이에요. 다…….]

    그러더니 전화는 뚝 끊겨 버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화.

    민홍준은 다시 전화를 걸려 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아들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너무 달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준호 이야기를 꺼내더니 그게 안 먹히자 그새 정현이에게 집사람이 무슨 짓을 저질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한 소리 해야겠다 싶은 그때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윤정숙과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버지 민판섭을 따라 그는 한창 일을 배우고 있었다. 한동안 집을 떠나 있기도 했고 회사 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던 탓에 내내 아버지 옆에 붙어 다니며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연히 다른 직원들보다 일찍 출근했고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피로가 쌓여 컨디션이 좋지 않자 그는 오히려 이런 상태가 주변에 피해만 준단 생각에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에 왔더니 집안일을 돌봐 주는 아주머니와 베이비시터는 어디 간 건지 정현이 혼자 거실에 앉아 있었다.

    마침 주방에서 아내 윤정숙이 아기 그릇에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당신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좀 쉬려고. 근데 일하는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소?”

    “잠깐 장 보러 가셨어요.”

    “근데 그건 뭐요?”

    “꿀물이요. 정현이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러자 그 말을 듣고 놀란 민홍준이 서둘러 아들을 안아 들었다.

    “당신 제정신이야?”

    “여보…….”

    “장이 덜 발달된 애들은 꿀을 먹이면 식중독에 걸릴 수 있어! 애들한테 식중독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아?”

    “모, 몰랐어요. 전 그저 엄마가 저 감기 기운 있으면 항상 꿀물을 주셔서…….”

    모든 여자들이 하루아침에 엄마가 되는 건 아니었다.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하나둘 배워 가면서 엄마가 되는 준비를 하는 거였으니.

    하지만 민홍준은 윤정숙이 준비도 없이 하루아침에 엄마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친아들이 아닌 탓에 조심성이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당신한테 정현이 보라고 강요하지 않아. 그냥 모르겠으면 가만히 있어. 아주머니든 베이비시터든 어차피 당신 말고 애 돌볼 사람은 많으니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이야. 애 위한답시고 괜히 나서지 말란 말이요, 알았소?”

    그때 아내의 얼굴은 분명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건 그녀가 잘못한 게 맞았으니까.

    호되게 혼이 났으니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거란 생각만 들었다.

    그에게 아내의 감정보다도 아들의 상태가 더 중요했으니까.

    거기다 어쩐지 아내가 정현이를 돌보는 게 탐탁지 않았다. 꼭 죽은 아내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죽은 사람에게 미안했다. 그녀는 비록 떠났지만 이렇게 자신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데도 그 빈자리를 채우고 그녀의 흔적을 지우는 것 같아서.

    그런 자신의 태도가 지금의 아내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어차피 사랑 없이 조건만 보고 한 결혼이었으니 아내가 상처받을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내에겐 새명의 안주인이라는 자리가 주어졌으니까.

    뒤늦게 그 일이 떠오른 건 어째서였을까?

    민홍준은 처음으로 그때의 일이 후회되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처럼 그날 이후 그들 부부의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했으니까.

    만약 그때 자신의 행동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렇게 화를 내지 않고 좋게 이야기했더라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괜찮아질 수 있었던 두 사람 사이를 자신이 갈라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요즘 회사에 우리도 모르는 무슨 일 있어요, 과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렇잖아요. 본부장님 요즘 매일같이 야근하시고 안색도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전에 이런 일 없었잖아요. 그리고 전보다 차가워지신 것 같아 조금 눈치 보여서요.”

    새명물산 경영기획본부의 서 대리는 직속 상관인 윤 과장에게 평소와 다른 사무실 공기에 하소연을 하는 중이었다.

    서 대리의 말에 본부장실을 슬쩍 본 윤 과장이 입을 열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딱 보면 몰라. 본부장님 저러시는 건 분명 사모님하고 다툰 거야.”

    “본부장님이요? 애처가라고 소문 나셨잖아요.”

    “애처가는 뭐 부부 싸움 안 하나? 평생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만나 한 집에 사는데 당연히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는 거지. 집에 들어가기 싫으셔서 늦게 퇴근하시는 거 아냐.”

    “본부장님이 부부 싸움이라니 상상이 안 돼요.”

    “원래 싸우면서 사이가 더 돈독해지는 거야. 난 오히려 너무 사이가 좋아서 걱정했구만. 어쨌든 서 대리가 괜히 그러면 본부장님 마음이 편하시겠어? 모른 척해 드리자구.”

    “네.”

    살짝 걱정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윤 과장은 남의 가정 일에 관심을 끊는 게 오히려 도움을 주는 거란 생각에 부하 직원들을 챙기며 모른 척했다.

    그 시각 본부장실.

    민정현은 책상 위 쌓여 있는 서류들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꾸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하려 했다.

    새명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새명을 벗어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이 불행한 게 새명 때문이라고?

    좀처럼 경우의 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민정현은 보던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모든 게 평화로워 보였다. 예전엔 누구도 함락하지 못하는 견고한 성 안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경우의 말 때문이었는지 지금의 자신이 어쩐지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이 밖을 나가면 불행이 끝이 나고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아내는? 그럼 나는?

    그럴 리가 없다.

    새명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믿으면서도 혼란스러웠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바로 경우 때문에.

    그날 밤 결국 술에 잔뜩 취한 그는 경우의 사무실이 있는 마포로 향했다. 경우를 만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발걸음이 인도하는 대로 와 보니 그곳이었을 뿐.

    몸을 가누기 힘들어 잠시 화단에 걸터 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개를 들어 보니 그곳에 경우가 서 있었다.

    “형, 여긴 어쩐 일이에요? 혹시 나 만나러 온 거예요? 그럼 전화를 하지 그랬어요.”

    “경우야, 내 동생 경우야…….”

    “어휴, 술냄새.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차는요? 운전하고 온 건 아니죠?”

    “내가 너냐? 아무리 취해도 그런 짓은 안 해.”

    “다행이네요. 걸을 수 있겠어요? 아니다. 여기 잠깐 있어요. 내가 차 가지고 올게요.”

    돌아서려던 경우를 민정현이 붙잡았다. 그의 손길에 경우가 돌아봤다.

    “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했어? 행복이니 불행이니 나한테 왜 그런 소리를 했냐고?”

    경우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를 바라보는 경우의 눈빛도 깊어졌다.

    “그러는 형은 나한테 왜 찾아온 건데요?”

    “뭐?”

    “형으로서 나를 걱정했다고요? 진심이에요? 망나니처럼 인생 막 살던 나를 걱정하는 척 본인은 다르다며 위안을 받았던 건 아니고?”

    “…….”

    “그래 놓고 나한테 도움 받고 싶어서 온 거잖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새명물산 지분, 그게 탐이 나니까 그것만 있으면 새명의 주인이 될 수 있으니까. 안 그래요?”

    어린 동생에게 자신의 속내를 뻔히 들킨 것 같아 민정현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래, 그랬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너한테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려 보려고 왔다고. 근데…… 너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됐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이 되었다고.”

    “정말 그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너 때문이야. 이제야 알겠네. 너도 결국 어머니와 똑같았던 거야. 나를 새명에서 밀어내려는 거지. 나는 바보처럼 그것도 모르고 네 말 한마디에 휘둘려서는…….”

    “밀어내려는 게 아니에요.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형은 이미 충분히 힘들었다고요. 알고 있잖아요!”

    그랬다.

    새명의 후계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아내가 이혼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사라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이미 그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경우의 말은 그저 현실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설령 그랬다고 해도 너만 아니었으면 나는 아무것도 몰랐을 거야. 새명의 주인이 되어서 모든 걸 누리면서 그렇게 살았을 거라고.”

    “새명이 형에게 모든 걸 주지 않아요. 형이 새명을 가진다면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점점 더 늘어날 겁니다. 그럼 형은 더 불행해질 수 있어요.”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쳐. 그럼 지선이나 준호는? 걔들도 마찬가지 아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경우는 두 사람과 민정현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결핍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맹목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자신은 깨닫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시끄러. 헛소리 집어치워. 어머니 사주받고 이러는 거지? 내가 새명에 붙어 있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잖아. 아니, 나는 절대 새명 포기하지 않아. 네가 아무리 나를 새명에서 밀어내려고 해도 새명을 차지하고 말 거라고. 반드시!”

    “형!”

    순식간이었다. 위태로웠던 민정현을 그저 붙잡으려고 했던 것뿐이었는데 되려 그가 뿌리친 강한 힘에 경우가 뒤로 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 그가 넘어진 곳은 도로 위.

    빠앙!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약속이나 한 듯 경적이 울렸다. 경우는 속으로 욕을 했다.

    이런 드라마에 나올 법한 클리셰를 봤나!

    경우는 애써 아니란 생각을 하며 돌아봤지만 전조등을 켠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드라마에 이런 장면이 나오면 시청자들은 대부분 이런 말을 하지.

    얼른 일어나!

    빨리 도망쳐야지 뭐 하는 거야!

    그런데 막상 겪으니 몸이 굳어져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이 쑥 빠진 경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겨우 두 팔로 자신의 얼굴을 가릴 뿐이었다.

    그리고.

    끼이이이익!

    불쾌한 소음이 현장을 가득 채웠다.

    얼이 빠진 채 천천히 도로로 걸어나오던 민정현이 정신을 차리고는 이내 소리쳤다.

    “경우야!”

    잠시 후 사이렌 소리가 도로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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