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88화 (88/250)
  • #88. 카인과 아벨 (3)

    퇴근 후 민홍준의 양복을 정리하는 건 윤정숙의 몫이었다.

    아무리 사이가 나쁘고 냉전 중이라 할지라도 이 일만큼은 반드시 지켰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온 민홍준에게 윤정숙은 거실로 그를 안내했다. 거실 테이블엔 간단한 간식거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총리가 초청한 전경련 회장단 만찬 모임에 다녀온 민홍준은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출출하던 참이었다. 내심 만족하며 배를 채우던 그때 윤정숙이 입을 열었다.

    “준호, 언제 불러들일 생각이세요?”

    그제야 이 자리의 목적이 셋째 준호임을 깨달은 민홍준은 입맛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어쩐 일로 안 하던 짓을 하나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벌써 2년이에요. 그만하면 이제 들어올 때도 되지 않았어요?”

    “아직은 아냐. 그쪽에서 공사 따낸 게 겨우 1년이야. 아직 첫 삽에 뜬 모래도 안 말랐어. 이럴 때일수록 책임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지. 그쪽에서 앞으로 해야 할 공사가 얼마나 많은데.”

    인도의 경제 규모가 나날이 커지고 있는데 제대로 된 인프라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인도 전체가 공사판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이럴 때 책임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의욕적으로 달려들 게 아닌가.

    거기다 그곳을 노리는 게 새명만은 아니었기에 준호 정도는 돼야 공사를 따낼 수 있을 거라 판단했으니 지금 이 시점에서 준호가 돌아오는 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준호가 걱정돼서 이러는 것도 알고. 하지만 아들을 더 강하게 키우고 싶다면 지금은 모른 척해. 호랑이도 제 새끼를 낭떠러지로 밀어 버리는데 하물며 새명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그 정도도 못하겠어?”

    타이르는 말투였으나 그녀는 그에게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 준호가 한국에 있다면 정현이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기 수월하지 않을 테니까. 결국 일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 준호가 한국에 들어오는 걸 막으려는 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의 곁에 섰던 몇몇 이사진들이 돌아선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민홍준의 입장에선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거란 생각도.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요즘 민홍준에겐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으니 바로 딸 지선이었다.

    처음엔 무조건 첫째 정현에게 모든 걸 물려줄 생각이었다. 장남인 동시에 사랑했던 여자가 남기고 간 아들이었으니까. 생모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들이 민홍준은 내내 안쓰러웠다. 그래서 다른 자식들보다 더 감싸고 돌았다.

    그런 그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으니 그에게 자식만큼 새명이 중요한 부분인 탓이었다.

    새명은 아버지가 일궈 온 역사였고 곧 그의 전부를 바친 삶이었고 그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자식들의 미래만이 아닌 새명의 미래 또한 생각해야 했다.

    첫째 정현이나 셋째 준호가 후계자가 된 이후를 생각했다.

    각자 계열사 하나씩 맡아 지금처럼 이끌어 간다면 걱정이 없다. 하지만 후계자가 되지 못한 자식들은 결국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밀려날 게 분명했다. 새명의 주인 자리를 빼앗길 빌미를 주지 않으려 할 테니까. 어쩌면 그 과정에서 회사가 쪼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그런데 만약 지선이라면 두 아들과는 다른 결말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거기다 최근 그녀가 보여 준 능력이라면 새명을 더 크게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더 대화를 이어 가지 못한 윤정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한집에 살지만 필요한 이야기만 하는 철저한 비즈니스적인 관계. 가족이었지만 가족이 아닌 사이.

    윤정숙은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민홍준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자신의 생각대로 할 계획이었다.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경영권을 방어한답시고 회사 지분 구조를 조금 복잡하게 만들어 두었다. 그러니 그 구조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손석중만이 알고 있었다. 가끔 손석중을 불러 저녁을 먹는 자신의 의도가 이 지분 구조를 알아 경영권을 가지고 오려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복잡하게 일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까짓것 지주 회사를 물산에서 건설사로 바꾸면 그만이었으니.

    그녀가 미술관에서 열심히 돈을 굴려 건설사의 주식을 차명으로 매입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에게도 민홍준처럼 변수가 생겼으니 준호가 아닌 경우.

    그녀는 당분간 경우가 어디까지 성장해 나갈 것인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가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니까.

    어차피 준호가 지금 들어올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저 민홍준의 경계심이 준호에게 계속 향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야 경우를 경계할 일은 없어야 하니까.

    * * *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은 본가의 어릴 때 자신이 지내던 방이었다.

    ‘언제 본가에 왔지?’

    의아한 생각이 든 민정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전에 왔을 때보다 집이 더 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 안을 살짝 둘러보다 나가려는데 한쪽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교복을 입고 있는 어린 그의 모습에 민정현은 놀랐다.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이 멋대로 움직여 방을 나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조금 젊어진 함양댁 아주머니가 미소 지으며 걸어 나왔다.

    “정현 학생. 사모님 지금 별채에 계셔. 그림 그리시는 것 같으니까 한두 시간 괜찮은데 라면이라도 끓여 줄까?”

    어릴 때 종종 어머니 눈을 피해 먹고 싶은 걸 해 주셨던 고마운 아주머니.

    “괜찮아요.”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향하는 그.

    그곳은 잡동사니를 모아 놓는 다락방이었다. 추억의 물건들이 가득 있는 다락방.

    하나둘 살펴보던 그때 발견한 어린아이의 그림 한 점. 그림을 천천히 들여다보던 그는 그 그림 속 아이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그 순간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돌아보니 어머니 윤정숙이 무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헉!

    꿈이었다.

    일어나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자 역시 잠에서 깬 그의 아내가 그를 다독였다.

    “여보, 왜 그래요? 꿈 꿨어요?”

    “어? 어.”

    “아휴, 이 식은땀 봐.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요?”

    “아니, 회사에 일이 좀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야. 괜찮으니까 얼른 자.”

    자신 때문에 깬 아내가 다시 잠들 때까지 기다린 민정현은 베란다로 나갔다. 제법 쌀쌀한 밤 공기가 그를 감쌌다.

    동생 경우를 만난 탓이었는지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인지 어린 시절의 일을 꿈으로 꾼 민정현은 복잡해져 있었다.

    사실 그에게 어머니라고 하면 자신을 낳아 준 생모보다 윤정숙이 먼저 떠올랐다.

    기억에도 없는 생모보단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사람이 그녀인 탓이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래서 그는 어머니께 잘 보이고 싶었다. 어머니가 동생들에게 기대감을 거는 것처럼 자신을 봐 주길 바랐다.

    열심히 공부해 좋게 받은 성적표를 받아 왔을 때도, 상장을 받았을 때도, 언제나 어머니께 제일 먼저 달려가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냉담했다.

    공부를 잘할 필요 없다, 이렇게 자신에게 가져와 보여 줄 필요 없어,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

    그런 일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어머니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녀의 친아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다락방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그림을 보고선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촌스러운 사진관에서 생모와 함께 찍었을 때만큼 어린 자신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혹시 지선이나 준호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지만 쓰여 있는 날짜는 그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이었으니. 거기다 그림 귀퉁이에 새겨 넣은 이니셜, JH.

    그림 속 아이는 분명 그 자신이었다.

    그때 민정현은 깨달았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나를 싫어했던 게 아니었다는 것을.

    그림을 발견한 이후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림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따라 그도 그림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화가도 생겼고 명화가 그려진 작은 엽서를 사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와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민정현은 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어머니를 밀어내게 만들고 대신 새명을 채워 넣었던 아버지.

    그랬으면서 이제 와서 새명을 빼앗아 가려는 아버지.

    민정현은 새삼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 * *

    [작가님, 어디십니까?]

    “지하 주차장이요. 곧 들어갑니다. 무슨 급한 일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얼굴 보고 이야기하죠.]

    그동안 드라마를 쓰느라 바빴던 탓에 웬만하면 전화를 걸지 않은 김종수의 전화에 경우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여기저기에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보니 박종연 감독은 물론 사무실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무슨 일인데요?”

    “얼굴 풀어. 아무렴 나쁜 일에 폭죽이라도 터트릴까.”

    “그거야 그렇지만.”

    “<시체가 나타났다> 어제부로 극장에서 내렸습니다. 900만 조금 넘은 걸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쪽엔 케이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동안 100만, 200만…… 700만을 넘은 순간도 있었지만 바쁜 경우를 생각해 사무실 직원들은 그의 앞에서 영화에 대한 말을 아꼈다. 어차피 영화는 개봉한 순간부터 홍보 외엔 별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 제작자 입장에서는 추이를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칸 노미네이트 덕을 톡톡히 보는 것은 물론 박종연 감독을 위시하여 출연 배우들이 여러 매체에 얼굴을 내밀며 홍보한 덕분에 나날이 흥행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경우까지 딱히 나설 필요는 없었다.

    폭죽을 터트리고 케이크 촛불도 함께 끄면서 영화를 마무리 지었다. 뭔가 아쉽고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경우는 자신의 방으로 박종연을 불러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폭죽은 감독님이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난 이미 벌써 다 했거든. 그러게 대표라고 너무 늦게 출근하는 거 아니냐? 아무리 대표라도 나이도 어린 게 점심때가 지나서 출근을 하냐?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원래 대표들이 일찍 출근하면 그 이하 직장인들이 눈치 보는 겁니다. 상사는 늦게 출근할수록 좋다구요.”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차기작 엄청 고민하셨는데 성공하셨네요.”

    “네 덕분이라고 말해 달라는 거냐?”

    “굳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이 그런걸요, 뭐.”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조금 더 있었으면 천만은 됐을 텐데 아쉽네요.”

    “그러게. 강범석이 세 번째 천만 관객을 동원해 3천만 배우라는 별명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어.”

    “천만이라는 숫자가 생각보다 어렵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천만 넘은 영화가 몇 편 안 되는 거 아니야. 하여간 얄미운 놈. 다 좋아, 다 좋다고. 근데 솔직히 우리 영화 200만 넘어도 손익분기점 넘는 건데 900만이면…… 대부분 투자한 네놈이 떼부자 된다는 거 아냐. 왠지 좀 열 받는단 말이지.”

    “그런 말씀 마세요. 모래밭에 모래 한 줌 더한다고 달라지는 거 있나요.”

    “그, 그 정도냐? 도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야?”

    “모르시는 게 편할 겁니다.”

    “세상 부러운 놈. 돈 많아, 젊어, 생긴 것도 저만하면 양호해. 난 전에 네 삼촌 재필이 볼 땐 그렇게 부럽다는 생각 안 들었거든. 근데 너는 좀 부럽네.”

    “감독님도 영화감독들 중에선 손에 꼽히잖아요.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갖춘 분으로 말이죠.”

    “그렇지. 나도 참 잘난 남자야.”

    “참, 나상재 감독님 영화는 아직 극장에 걸려 있는 거죠? 요즘 보고를 통 못 받아서.”

    “어, 안 그래도 아까 홍보팀 들러서 물어봤더니 300만은 넘었다고 하더라. 아직까진 관객이 증가세라서 좋게 보고 있더라고.”

    “직접 홍보팀까지 챙기시고. 이참에 우리 회사 고문을 맡으시는 건 어때요? 보니까 저보다 더 잘하실 것 같은데.”

    “됐어. 그냥 심심해서 들른 것 가지고 오버하기는. 알았어. 앞으로 안 가면 되잖아.”

    “그런 거 아닌데 괜히 그러신다. 이제 뭘 하실 생각이세요?”

    “당분간은 쉬어야지. 여행도 좀 하면서 재충전 좀 할라고. 차기작은 당분간 보류다.”

    당분간은 자신을 찾지 마라며 박종연이 떠나고 나자 고요한 사무실로 홀로 남은 경우는 그동안 바빠 처리하지 못한 일을 하기에 바빴다.

    해가 져 밖이 벌써 어둑해지는 줄도 모르고 일에 빠져 있던 그는 문득 시간이 꽤 많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다들 퇴근했는지 사무실도 고요했다.

    남아 있는 몇몇 직원들에게 인사를 한 경우는 아점으로 대충 때우고 아무것도 먹질 않아 사무실 근처에서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지하 주차장을 들르지 않고 1층 출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곳에 의외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

    건물 앞 화단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민정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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