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87화 (87/250)
  • #87. 카인과 아벨 (2)

    결혼 초반과 달리 장인, 장모가 자신을 대하는 게 차가워진 것 같다고 느낀 민정현은 아내 역시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불안해졌다.

    비록 사랑으로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반쪽짜리라 느꼈던 그의 삶에 아내는 그가 꿈에 그리던 가정을 꾸리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아내가 자신을 두고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면 새명이 없는 자신을 떠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내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졌다. 해서 없는 일거리도 만들어 평소보다 늦게 퇴근했던 그날 밤, 아내가 잠들었겠다 싶은 시간에 집으로 들어가 보니 아내는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안 자고 뭐 했어? 열 시면 자는 사람이.”

    “저것 좀 보느라고요. 가만있어 봐요, 지금 중요한 장면이니까.”

    그러고 보니 평소와 달리 아내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무언가에 푹 빠진 소녀 같은 표정에 민정현의 시선이 자연히 TV로 향했다. TV에선 막냇동생 경우가 쓴 <역전의 정수>가 한창 방송되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당신도 좀 앉아서 같이 봐요.”

    “나 드라마 안 보는 거 알잖아.”

    “알아요. 그래도 내 옆에 좀 있어 달라구. 내가 좋아하는 거 한 번쯤은 같이 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투덜대는 아내의 얼굴에 피식 웃고만 그는 졌다는 듯 그녀 옆에 앉았다.

    “알았어. 같이 보면 되잖아. 같이.”

    그제야 웃는 아내가 민정현의 팔에 팔짱을 끼곤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의심이나 했다는 생각에 민정현은 넥타이를 풀어 테이블에 놓고는 아내와 마찬가지로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건 아내에게 물어가며 드라마를 보던 그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내용에 자신도 모르게 드라마에 빠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늘 사고만 치던 막냇동생이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라마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드라마에 집중하던 그에게 갑자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앞으론 나하고도 같이 보내고 그래요. 무슨 사람이 만날 일만 해. 가끔 보면 당신이 나랑 결혼한 건지 일이랑 결혼한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니깐.”

    “당신도 그런 소리 해.”

    “난 뭐 여자 아닌가?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난 사랑받으려고 결혼했단 말이에요. 죽을 때까지 사랑받으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눈감을 거라고.”

    아내의 말에 용기를 얻은 민정현이 물었다.

    “당신 말이야. 만약 나한테 새명이 없었다면 나랑 결혼했을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냥……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솔직히 새명이 있으니까 나 좀 봐 줄 만하잖아. 안 그래?”

    “하여간 할 말 없으니까 괜히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어. 잔말 말고 드라마나 봐요, 드라마나.”

    얼렁뚱땅 넘어가는 아내의 모습에 그도 더는 물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다그쳐 그녀의 진심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지만 만약 자신이 바라던 것과 다른 대답을 할까 싶어 차마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잠든 아내를 내버려 둔 채 거실로 나온 민정현은 밤새워 <역정의 정수>를 1화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깜깜한 밤이 푸르스름한 새벽이 돼서야 드라마는 끝이 났다. 그는 상당히 복잡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늘 사고만 치던 동생이 어느새 이렇게 커 버린 걸까?

    동생이 저렇게 성장할 동안 자신만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자신만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는지 그가 경우에게 전화를 건 건 순전히 충동적이었다. 막상 전화기에서 흘러나온 경우의 목소리에 반짝 정신이 들었다.

    [형? 어쩐 일이에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데 경우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냥…… 잘 지내지?”

    [그럼요. 요즘 드라마 막바지라 드라마 쓰는 일 말고는 별로 일도 없어요.]

    “그럼 바쁘겠구나. 참, 나도 네 드라마 봤다. 재미있더라.”

    [그랬어요. 다행이네요. 마지막 회 대본도 다 써서 바쁠 건 없는데…….]

    그의 목소리가 이상한 탓이었는지 붙잡는 건 경우였다.

    [시간 괜찮으면 오늘 저녁이나 같이할래요?]

    갑작스러운 경우의 제안에 그는 결국 응할 수밖에 없었다.

    * * *

    “집에 갔더니 네 형수가 글쎄 네가 썼다는 드라마를 보고 있지 뭐야. 날 옆에 불러서는 같이 보자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푹 빠져서 드라마를 봤다니까. 우리 어릴 때 뉴스 말고는 TV 거의 못 봤잖아. 다른 세상 같더라구. 그래서 그날 밤새도록 다 봤지 뭐야. 그런 걸 요즘은 정주행이라고 한다지?”

    호탕한 말투, 시종일관 웃으며 대화를 이끌어 가는 그였으나 경우는 그 속에서 어떤 불안을 엿봤다.

    힘이 약한 공작새가 상대방을 위협하기 위해 화려한 무늬의 꼬리를 활짝 펴듯이 민정현의 말투와 태도는 자신의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걸 경우는 깨달았다.

    재작년 윤정숙의 귀국 후 식사 자리에서 만나고 명절 때 만났던 걸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그나마 1년에 반 이상 외국에서 보낸 윤정숙이 어째선지 그 뒤로 외국에 나가지 않는 바람에 다른 식구들 모두 그녀의 눈치를 보기에 바빠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 둘이서 이렇게 밖에서 식사를 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이제 보니 그는 궁지에 몰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와 동시에 어린 시절 그에 대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민경우가 유치원을 다니던 어린 시절, 민정현은 중학생이었다.

    한번은 유치원에서 그려 온 그림을 어머니에게 자랑하기 위해 집 안을 살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함양댁 아주머니에게 물어 보니 어머니는 별채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완전히 손을 놓았지만 그 시절 어머니는 가끔 별채에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별채 거실 창 너머로 그림을 그리는 어머니의 모습에 민경우가 달려갔다.

    그런 그를 붙잡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민정현이었다.

    그는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로 입을 가리고는 민경우를 데리고 한쪽으로 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그림 그리시는 동안은 방해하지 말자.’

    ‘왜? 나도 그림 그렸는데. 자랑하고 싶은데.’

    ‘어머니 그림 그리시는 거 좋아하시잖아. 너도 좋아하는 일 하는 동안 방해받는 거 싫잖아? 장난감 가지고 노는데 못 놀게 하면 싫지?’

    ‘응.’

    ‘저렇게 즐거워하시는데 우리 여기서 어머니 모습 조금만 보는 게 어때?’

    ‘그래, 좋아.’

    조금 더 있자 따분해진 민경우는 자리를 떴지만 형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 어머니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기억 속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윤정숙의 모습은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런 윤정숙을 보는 민정현의 얼굴도 어둡지 않았다.

    그때 어린 민경우는 아무것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형은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어머니일 텐데 왜 형은 그럴 수 있었던 건지 경우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그가 진짜 원하는 일이 무언지 왜 자신에게 전화를 한 건지 궁금해졌다.

    “너한테 그런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다.”

    민정현의 말에 경우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사실 좀 걱정했었거든. 이런저런 일이 많았잖아.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커서 자기 일을 잘 해내고 있네.”

    “형이 절 걱정했는지 몰랐어요.”

    “했어. 그래도 형이잖아.”

    “그렇죠. 형이죠……. 저도 몰랐어요. 나한테 그런 재능이 있으리라고는.”

    “그래? 그런 것 치고는 생각보다 잘 쓰던데. 아, 이런 걸 두고 천재적인 재능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요. 전 그런 재능까지는 없어요. 그냥…….”

    “그냥?”

    “하고 싶었어요.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후회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남이 뭐라 하든 나를 온전히 나로 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다행히 일이 생각보다 나랑 맞았던 거죠.”

    “그래? 후회가 되지 않는다……. 좋은 말이야.”

    “형은요?”

    “응?”

    “형은 하고 싶었던 일 없어요? 못 해서 후회되는 일 같은 거 말이에요.”

    “글쎄. 그런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들 주어진 환경에 맞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새명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다른 건 솔직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러니 네가 참 특이하고 그래서 특별한 거 같다, 나는.”

    “만약 형이 새명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너무 어려운 문제 아니냐? 새명이 없는 나…….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러는 넌? 새명을 떠나 살 수 있어?”

    “말도 안 되죠. 새명이 없으면 큰일나요.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수 있는 게 다 새명 덕분이라고 생각하니까.”

    “거봐, 너도 그러면서 무슨.”

    “하지만 전 새명에서 한발 떨어져 있잖아요. 새명의 자식이라서 남들보다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은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새명에 발 디딜 생각, 절대 없어요. 새명은 다른 한편으론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형은 행복해요?”

    ‘새명의 한가운데 있는 형의 삶은 그래서 괜찮은 겁니까?’

    사실 경우와 얼결에 약속을 잡은 이후 민정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남겨 준 경우 몫의 새명물산 지분, 그것만 있으면 굳이 아버지가 밀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이 후계자가 되는데 어느 정도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자신보다 누나인 민지선과의 사이가 더 좋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냉정한 놈은 아니니 시도는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한 번 부탁해 볼 참이었다. 자신의 편에 서서 자신을 지지해 주지 않겠냐고. 그렇게 해 준다면 계열사 몇을 떼어 내 너에게 주겠다고 약속까지 하려 했다.

    하지만 경우의 질문에 그는 결국 그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순간 그는 경우가 사악하게도 보였고 선하게도 보였다.

    내 인생을 망치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인생을 구원하려 하는 것인가?

    * * *

    “정현이가 경우를?”

    전화를 받던 윤정숙은 놀랐다.

    평소 자식들 곁에 사람을 심어 놓고 일과를 보고받던 그녀는 민정현이 경우를 만났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평소 접점이 없는 아이들이 만났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누가 먼저 만나자고 했을까,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그녀는 궁금했다.

    어쩌면 민정현이 경우에게 자신의 편에 서 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경우는 민지선의 편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경우의 입장에서 민지선이든 민정현이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결국은 선택하지 않을까?

    이번 복합 쇼핑몰도 어쩌면 경우의 도움이 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고정시 국회의원 한석인과 친분을 다진 사람이 민지선이 아닌 경우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경음을 재치고 새명이 될 순 없었을 테니까.

    거기다 생각보다 성장세가 빠른 ‘스튜디오 글로리’를 보면서 윤정숙은 경우가 어쩌면 민준호보다도 새명의 차기 주인으로 적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다른 사람도 아닌 민정현과 경우의 만남에 그녀의 경계심은 다시금 높아졌다. 방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 그녀의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도착하셨습니다.”

    민홍준이 귀가했다는 소리에 윤정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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