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86화 (86/250)
  • #86. 카인과 아벨 (1)

    새명물산 경영기획본부 본부장 민정현은 나름 회사에서 인기 있는 직장 상사로 통했다. 부하 직원에게 함부로 차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고 웬만하면 존대를 사용했다. 같이 일하는 부하 직원 생일은 물론 집안에 특별한 일이 생기면 그것도 챙겼다.

    특히 퇴근 시간을 지켜 적어도 직원들이 퇴근을 하는 데 눈치를 보지 않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퇴근 시간이 되면 집에 가는 척했다가 다시 돌아와 못다 한 일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런 직장 상사였으니 부하 직원들도 그와 점심을 함께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민정현 본인도 직원들의 고충을 듣는 시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식당에 앉자마자 꺼낸 화두는 최근 그들이 가장 관심을 쏟는 민정현의 막냇동생, 경우의 드라마 <역전의 정수>였다.

    바쁜 일로 직원들과 오랜만에 점심을 먹게 된 민정현은 어제 방송된 <역전의 정수>로 이야기꽃을 피운 직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서 대리를 시작으로 윤 과장과 박 주임은 이야기가 잘 통하는 헤비 토커들이었다.

    “두령까지 죽고 나니까 좀 그랬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늘 아래 일인자는 원래 한 사람뿐이어야 한다고. 어떻게 보면 꺽쇠가 성장하는 이야긴데 두령이 살아 있는 것도 좀 그렇잖아.”

    “그래도 두령 캐릭터가 괜찮았는데 이대로 못 본다니 아쉬워요.”

    “맞아요. 저도 정수보다 두령이 더 좋았는데.”

    “그게 배우 입장에선 더없이 좋은 거라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사라지는 거잖아.”

    “그럼 정수는요?”

    “이를 테면 꺽쇠를 키우는 스승 같은 느낌이지. 근데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도 성장하잖아. 처음에 정수, 얼마나 찌질했어. 무슨 기자가 돌멩이마냥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

    “하긴 가장 달라진 캐릭터라 하면 정수긴 해요.”

    “이제 본래 자리로 돌아오겠죠? 꺽쇠 못 만나는 건 좀 아쉽다.”

    “그러게.”

    “참, 원래 시대로 돌아오면 혹시 에디 다시 나올까요? 정수한테 완전 심한 욕 해 줬으면 좋겠다.”

    “허여멀건 외국 놈 뭐가 좋다고들 그래?”

    “과장님, 외국 놈이라니요. 에디, 아니지, 준의 절반은 한국인이라구요. 준 리차드. 어머니가 한국식으로 준이라고 이름 지었다잖아요.”

    “알게 뭐야.”

    갑자기 의식의 흐름 같은 이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던 민정현은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본부장님, 본부장님도 <역전의 정수> 보셨죠? 어떤 캐릭터가 제일 마음에 드세요?”

    “예?”

    “설마 드라마 안 보셨어요?”

    “드라마 보는 걸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동생이 쓰는 드라마잖아요?”

    “아, 그게 그거였습니까?”

    “완전 모르고 계셨나 보네. 본부장님 되게 낯설어요. 동생분이랑 친하실 줄 알았는데 안 그러신 모양이에요.”

    “서 대리는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윤 과장의 지적에 서 대리는 흠칫 놀랐다. 평소 스스럼없이 지내던 탓에 자신도 모르게 버릇 없이 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랑 친하게 지내는 형이 어디 있어? 원래 형제 사이는 칼만 안 들었을 뿐이지 눈만 마주쳐도 치고받는 원수 사이라고.”

    예상 외의 말이 나오자 서 대리는 얼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과장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동생이 들으면 서운해하겠어요.”

    “서운하기는 무슨. 그놈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지금이야 나이 먹고 각자 가정을 꾸리고 살기 바빠 얼굴 보는 것도 힘들어지니 나아졌지, 한집에 살 땐 말도 안 했어.”

    “전 동생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참, 서 대리 외동이라고 했지? 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여자들도 자매끼리는 옷 가지고 그렇게 싸운다고. 난 딸이 둘인데 주먹질만 안 했다 뿐이지 둘이 눈만 마주치면 싸워. 집안이 다 시끄러울 정도라니까.”

    “다 그러기야 하려구요. 그래도 동생들이랑 잘 지내는 친구들 보면 저도 언니나 동생 있었으면 싶어요. 같이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놀러도 가고. 얼마나 좋아요.”

    “그게 외동의 착각이지. 서 대리도 동생 있었으면 절대 그런 말 안 했을 거야. 동생은 그냥…… 웬수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웬수. 박 주임은 어때? 박 주임도 동생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윤 과장의 물음에 형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잠자코 있던 박 주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동생이었습니다.”

    박 주임까지 동참하자 서 대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와 대조적으로 윤 과장은 추억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하긴 군대가 사람 정이 그리운 곳이긴 하지.”

    “그게 아니라 저 제대할 때 동생이 군대에 갔거든요.”

    크게 웃는 윤 과장과 달리 서 대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 자리에서 남은 사람인 민정현을 바라봤다. 딱히 질문을 한 건 아니었지만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본부장님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답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적당히 웃어 주고 말았다.

    단순히 동생과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었다. 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었으니 보통 형제지간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자신을 냉대하는 새어머니, 자신만 감싸는 아버지 사이에서 이복동생들과는 자연히 소원할 수밖에 없었다.

    임원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일반 직원들은 민정현이 윤정숙의 친아들이 아님을 알지 못했다.

    이럴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민정현은 뒷맛이 씁쓸했다.

    식사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갔더니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주말에 아버지가 집에서 저녁 먹자고 하시는데 당신 시간 괜찮아요?]

    “장인어른이?”

    [네.]

    “시간은 괜찮아. 가겠다고 말씀드려. 근데 무슨 날이야?”

    [특별한 건 없는데. 또 모르죠. 가서 밥만 먹고 올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근데 오늘 늦어요?]

    “아니, 안 늦어. 그럼 이따 봐.”

    전화를 끊은 민정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처갓집 역시 그에게는 편한 곳이 아니었으니 주말에 있을 처갓집에서의 식사 자리가 어쩐지 걱정이 되었다.

    * * *

    “민 서방, 많이 들게.”

    “네, 장모님.”

    “사위가 왔는데 반찬이 이게 뭐야? 옛날 같았으면 씨암탉을 잡았어도 부족했다고.”

    “아닙니다, 장인어른. 이것도 너무 많습니다. 장모님이 고생하셨겠어요.”

    “엄마가 고생은 무슨. 다 아주머니가 하셨겠지.”

    아내의 투덜거림에 민정현이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그러자 어깨를 으쓱한 배예원이 입을 다물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대진일보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언론사 중 규모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하일보의 사주인 배정철은 아직 철이 없는 막내딸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들만 둘 있는 집에서 태어난 늦둥이 막내딸을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최근 부쩍 든 탓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막내딸을 민정현에게 시집보낸 건 그가 민 회장의 장남이기도 했거니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민 회장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위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였던 민준호가 인도로 쫓겨날 때만 해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고정시에 복합 쇼핑몰 짓는 게 자네 회사였지? 책임자가 그 여동생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깜짝 놀랐어. 여동생이 여자 치고 통이 큰 모양이야.”

    “아가씨가 생각보다 일에 욕심이 많더라구. 솔직히 도련님은 잘 모르겠는데 아가씨가 회사 맡은 후론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어서 아버님도 놀란 눈치시더라니까.”

    예원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가 민지선에 대해 평가를 내리자 장인과 장모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확인한 민정현은 이 자리가 너무 불편해졌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경계심이 눈에 보이는 탓이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뒤 민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장인이 한번씩 회사 일에 대해 물을 때면 언제 후계자로 확정되는지 압박하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얼굴을 물로 적신 그는 거울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와 다시 주방으로 향하는데 하필이면 장모와 아내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피임은 잘하고 있는 거지?”

    “엄마는 별소리를 다해. 결혼했으면 언제 손주 볼 수 있느냐고 그래야 하는 게 정상 아냐?”

    “너네 시집이 보통 집이어야지. 금이야 옥이야 키운 막내딸 새명 안주인 시켜 주겠다고 해서 시집보냈는데 약속하곤 다르잖아.”

    “뭐야, 그럼 정현 씨가 새명 못 물려받으면 이혼이라도 시키겠다는 거야? 그럼 나도 이혼녀 꼬리표 붙는 건데 어느 집안에서 좋아하겠어?”

    “그깟 결혼 한 번이 대수야? 새명 후계자가 아니면 민 서방도 네 짝으론 부족하지. 그러니까 당분간은 피임해. 확실해지기 전에 애 가질 생각 마. 괜히 혹 붙일 거 없어.”

    “걱정하지 말라니깐. 할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셨다구. 딸은 출가외인, 오죽했으면 계열사 중에 가장 힘없는 새명유통을 물려줬겠어. 도련님까지 저렇게 된 마당에 정현 씨 말고는 맡을 사람이 없어.”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 있던 민정현은 마침 주방을 나오던 장인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민망하게 웃던 그가 주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앉아 있던 자리는 가시방석 같았다. 그러다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아내를 보고 생각했다.

    ‘당신, 내가 새명의 후계자가 못 되면 나를 떠날 거야?’

    그는 아내가 새명의 후계자라 자신과 결혼한 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 * *

    <역전의 정수>를 막 시작했을 때 방문한 이후로 처음 국장실을 찾은 최무성은 자신을 앞에 두고도 생각이 딴 데로 가 있는 전효상의 모습에 의아했다.

    국장이 강원도로 쫓겨가기 전 함께 일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사람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뭔가 불안한 듯 보이던 전효상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촬영도 몇 회 안 남았지?”

    “네. 마지막 회 원고가 아직 안 나오긴 했는데 아마 오늘 중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자 전효상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혹시 오늘 민 작가 방송국에 나오나?”

    “글쎄요. 민 작가가 촬영장에 나오는 일은 거의 없는데요.”

    “그래? 그렇구만.”

    그러고도 다시 정적.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최무성의 눈빛에 전효상은 민망한 듯 살짝 웃었다.

    “뭐, 촬영하는 데 어려운 건 없는 거지?”

    “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그래도 지금 시청률 최고를 달리고 있는 드라마인데 내가 마지막까지 확실히 지원해 줄 테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알았지?”

    “알겠습니다.”

    “그…… 민 작가가 별말은 없지?”

    “별말이라니요?”

    “없으면 됐어. 촬영도 힘들 텐데 그만 나가 봐.”

    지난번 봤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전효상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한 최무성은 마침 마지막 회 원고를 넘기러 온 경우와 마주쳤다.

    “아, 작가님 오셨어요.”

    “네. 마지막 회 탈고했거든요. 시간이 남더라구요. 촬영이 잘 진행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와 봤어요.”

    “잘 오셨어요. 근데 혹시 국장님하고 약속 있으셨어요?”

    “아니요. 왜요?”

    “아니, 국장님이 작가님 오시는지 기다리시는 거 같더라구요.”

    아무것도 모르는 최무성의 말에 경우는 미소 지었다.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네?”

    “뭐, 그렇다고요. 촬영장으로 가실 거죠?”

    “그래야죠. 같이 가시죠.”

    바로 그때 경우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가 다름 아닌 큰형 민정현이었다. 작은형인 민준호보다도 접점이 없는 그가 자신에게 전화를 했다는 사실에 의아한 경우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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