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여우가 가니 호랑이 (5)
국장실 전체를 뒤흔드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지만 전효상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에 등으로는 식은땀이 한 줄기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역전의 정수>가 방송을 물론 촬영까지 남은 상황에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찾아온 경우로부터 시작되었다. 전효상을 찾아온 경우는 혼자가 아닌 단정하게 생긴 남자와 함께였으니.
“이쪽은 저희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법률 자문을 맡고 계신 김기영 변호사입니다.”
경우가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나타나 미리 작성한 계약서까지 내밀 줄 생각하지 못했던 전효상은 방송국에서 법률 자문을 하고 있는 오 변호사를 불러 계약서 내용을 꼼꼼하게 살폈다. 솔직히 법률적 용어가 가득한 계약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전효상은 무슨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는 오 변호사의 모습에 별문제는 없는 듯 보였다.
벼랑 끝에서 겨우 기회를 얻은 그는 자신이 맡은 소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잠깐 동안만 이 자리를 지키는 것.
홍세환을 비롯한 부장급 PD들이 다 잘려 나갔으니 국장의 자리에 앉을 사람이 요원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백도 없는 자신에게까지 온 거겠지.
하지만 전효상은 빈 자리만 지키다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제작사로부터 뒷돈을 받아 쫓겨난 전임 국장의 전철을 밟고 싶지도 않았다. 남은 것은 하나, 더 위로 올라가는 것.
백 하나 없는 그가 야망을 품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강원도에서 숨만 쉬고 있던 그를 부른 SBC 사장에게서 의외의 말을 들은 탓이었다.
‘정치권에 뒷배가 있는 줄은 몰랐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치미 뗄 거 없어. 한석인 의원과 무슨 사이야? 어떤 사이길래 자네를 그 자리에 추천한 거지?’
‘네? 한석인 의원이요?’
‘뭐, 좋아. 나도 이사진들과 홍 국장이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네.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자네가 드라마국, 한번 잘 이끌어 보길 바라네. 물론 쉽진 않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방통위 소속 국회의원 한석인이 자신을 국장에 앉도록 가장 힘을 썼다는 소리에 전효상은 의아했다.
솔직히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자신을 밀어준 게 의아해 한 번은 그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젊은 PD들이 혹사당하고 있는 드라마 제작 현실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전효상 국장님께서 그간 해 오셨던 일을 알고 있고요. 저는 국장님 같은 사람이 방송국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우로부터 미리 당부를 받았던 한석인은 굳이 경우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다. 그 탓에 졸지에 정치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 전효상은 이번 기회를 통해 정치인과 연을 맺고 그를 뒷배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국회의원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컸으니 국회의원과 친분을 유지한다면 돈만 많은 재벌 따위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한 탓이었다.
한 번도 돈과 권력에 연이 닿아 보지 못한 자의 착각이었다.
어쨌든 어느 회사나 오너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수익 창출. 시청률이든 화제성이든 뭐든 결국 광고를 끌어오고 수익을 최대한 벌어다 주면 사장도 자신을 밀어낼 이유는 없을 거라 생각한 전효상은 경우를 통해 시청률 좋은 드라마 몇 편 빵빵 터뜨려 주고 실적을 쌓아 위로 올라가는 게 이제는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변호사의 조언 아래 결국 계약서에 도장을 꾹 찍은 전효상은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미래만 생각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떠나기 전 경우는 이렇게 말했다.
“국장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 같아서 선물을 좀 준비했습니다.”
“선물이요?”
“네. 새로 국장 자리에 앉으셨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받으실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요. 아, 물론 문제 될 소지의 것은 없으니 걱정 마시구요.”
경우가 준비한 선물이 무엇일까 궁금했던 전효상은 그래도 상대가 재벌인데 선물이 살짝 기대되었던 반면 문제 될 게 없다는 점에 살짝 의아했다.
그러던 차에 SBC의 새로운 국장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기자의 연락에 모든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연출을 할 때와 달리 자신에게 향한 주목도가 다름을 느낀 전효상은 날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지냈다.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 기사를 본 그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SBC 드라마국 새로 사령탑을 맡은 전효상 국장, <마지막 사랑>은 역사 인식 부족한 제작사 문제]
“뭐, 뭐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전효상은 기사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물론 새로 SBC 드라마국 국장이 된 전효상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런데 최근에 논란의 중심에 선 드라마 <마지막 사랑>에 대해 거론한 부분이 문제였으니 전적으로 ‘유니언 스튜디오’에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발언이 문제였다.
기자의 유도에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 분명 그런 뉘앙스로 한 말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식으로 기사를 냈는지 전효상은 인터뷰한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전효상은 그제야 자신이 악질 기자에게 걸려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으니 다른 신문사에서 SBC가 ‘스튜디오 글로리’와 신인 작가 육성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기사를 낸 것이었다. 민경우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린 것도 모자라 SBC 전효상 국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기사의 내용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두 신문사 모두 전효상이 관련된 각기 다른 기사. 이것은 마치 SBC가 ‘스튜디오 글로리’와는 협업을 하고 ‘유니언 스튜디오’는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마침 경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민 작가님,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신인 작가 육성이라니요?”
[제 선물이었는데 어떻게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기사를 말씀하신 거였습니까? 아니, 알 만하신 분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없는 말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 계약서에 쓰인 내용, 그대로 발표한 건데요. 어쨌든 기자들한테 홍보를 했으니 좋은 경과가 나오겠죠.]
“계, 계약서의 내용이라니…….”
[아, 그리고 한석인 의원님께 누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애써 부탁했는데 국장님이 문제를 일으키시면 애써 국장님을 추천한 제가 의원님 뵙기 민망하잖습니까?]
전화기를 타고 전해지는 경우의 목소리에 한석인이라는 이름 석자가 포함되어 있자 전효상은 어쩐지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자신이 한석인의 눈에 띄어 이 자리에 앉은 게 아니라 경우가 수를 쓴 것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서둘러 경우와 찍은 계약서를 살펴보던 그는 도장을 찍을 당시 입회했던 변호사를 호출했다. 하지만.
“오 변호사님 사흘 전에 그만두셨는데요?”
“혹시 그만두고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 없으셨습니까?”
“자세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새명 쪽으로 간다고 하셨다나 봐요.”
그날 밤, 그는 사법 고시를 공부했지만 결국 적성이 아니라 그만둔 친구를 불러 계약서를 보여 줬다. 한참을 읽어 보던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 계약서의 요지는 뭔데?”
“민 작가가 우리 SBC에서 5년간 드라마 내는 거.”
“그거는 맞네. 근데 기획만으로도 되는 거였어?”
“뭐?”
“어디에도 직접 쓰겠다는 말은 없는데? 도대체 이런 계약서는 왜 작성한 거야? 그쪽에 1년에 한 번 무조건 편성을 주겠다는 것 말고는 확실한 게 없잖아. 기획만 해도 되면 다른 작가가 써도 된다는 거야? 계약서 초안 누가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완전 프로네.”
“프로?”
“그래. 이런 일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이래서 한국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는 거야. 그러게 도장은 함부로 찍는 거 아니라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데?”
“뭐긴. 이쪽에 완전히 끌려가는 거지. 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근데 너네 변호사는? 이걸 보고도 가만있었어? 법 공부 조금 한 나도 알겠구만. 변호사가 이걸 못 봤을 리가 없고.”
“그만뒀어.”
“뭐?”
“그만뒀다고.”
“설마, 거기까지 작업한 거야?”
“…….”
“완전 당했네, 당했어. 그렇다고 금전적으로 손해나는 건 아니잖아. 그쪽이랑 완전히 등질 거 아니면 그냥저냥 넘겨. 다행이라 여기고 다음부터는 함부로 도장 찍지 마. 그럼 되지.”
쉽게 이야기하는 친구의 말에 전효상은 한숨을 푹 쉬었다.
물론 당장 손해 나는 일은 없다. 하지만 드라마의 결과에 따라 수익은 천양지차 달라지니 이 계약서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를 일이었다.
거기다 기사가 나가고 난 직후, 유니언 스튜디오의 오진원으로부터 온 전화는 간담이 서늘하게 할 정도였으니.
[이봐, 전 국장.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 결과가 이거야? 우리 사이에 꼭 그렇게 씹는 기사를 냈어야 했어?]
“저기, 선배님 그게 아니라…….”
[듣고 싶지 않네. 솔직히 방송국이 갑이지. 우리 제작사야 방송국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근데 잘못 건드렸어. 다른 곳도 아니고 어떻게 대진일보에 그런 기사를 낼 수 있어? 이건 박현호 본부장이 자기 얼굴에 먹칠한 거라고 길길이 날뛰고 있다고!]
“제 의도가 아닙니다. 그 기자가-.”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 국장 됐다고 그렇게 설치다간 몇 달 못 가 옷 벗게 될 줄 알라고.]
거기다 방송국 내에서 그를 보는 시선 또한 곱지 않았으니 사람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차라리 강원도에 있을 때가 속은 편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 *
[지난번 네 기사도 그렇고 역시 돌려 까기는 대진일보 특징인가?]
“뭐야?”
[말이 그렇다고 말이. 하여간 손 안 대고 코 풀기는 선수급이야. 불똥이 괜한 박현호한테 튄 거 아냐?]
“괜한 불똥이라니. 그러게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리면 두고두고 당하게 되어 있다고.”
[어쨌든 이쯤이면 혼쭐도 모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거다. 그나저나 앞으로 계획대로 할 거야?]
“물론.”
전화를 끊은 경우는 신인 작가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을 찾았다. 김종수를 통해 미리 작가들을 불러 모은 경우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신인 작가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해 볼까 해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물으려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경우는 그동안 김종수를 비롯해 기성 작가들과 윤기동까지 모아 놓고 새로운 집단 집필 시스템을 상의했다. 신인 작가 육성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기성도 함께하는 프로젝트였다.
앞으로 5년간 SBC와 경우가 함께하게 될 프로젝트에선 기성 작가들이 기본 줄거리나 컨셉을 기획하는 크리에이터 역을 맡고 신인 작가들이 세부적인 자료를 조사해 집필하는 과정으로 뼈대를 잡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만약 이 시스템이 자리를 잡는다면 드라마 기획에서 집필, 제작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혼자 작업할 때보다 훨씬 수월하고 색깔이 다양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거기다 한 사람이 집필할 때 자기 복제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고 무엇보다 한 드라마에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가 담겨진다.
뿐만 아니라 작가 여러 명이니 쪽대본이 나올 리가 없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양의 대본은 물론 여러 명이 수정을 할 수 있으니 제작 또한 훨씬 빨라진다. 대본만 빨리 나와도 사전 제작에 가까운 드라마 제작이 가능해지는 거였다.
물론 이 방법이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시도는 해 볼 필요가 있다 생각한 경우는 자신 있게 말을 마쳤다. 언제 입봉을 할지 미정이었던 신인 작가들은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단 생각에 눈을 반짝였다. 경우는 이 프로젝트가 어떤 결말을 맺을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