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84화 (84/250)
  • #84. 여우가 가니 호랑이 (4)

    아침 일찍 출근한 전효상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의자 팔걸이를 쓰다듬었다. 마치 소중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그렇게 자리에 앉아 주변을 빙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출근 직후 그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드라마 시청률 표를 살펴보는 일.

    전날 방송했던 모든 드라마의 분당 시청률과 최고, 최저 시청률에 평균까지 통계가 나온 시청률은 그가 앞으로 이 드라마 판에서 어떻게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지표와 같았다.

    그나마 <마지막 사랑>이 끝이 나고 후속작이 방송된 덕에 조금은 상황이 나아지긴 했으나 뚜렷한 상승세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역전의 정수>가 아니었다면 올해 SBC 드라마는 완전 죽을 쒔을 판이었다.

    그러니 지난번 그를 종용한 것은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우를 만나기 전 유니언 스튜디오 오진원 대표를 먼저 만난 게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니까 전효상이 국장의 자리에 앉은 직후, 시청률 하락과 여러 가지 논란으로 <마지막 사랑>의 조기 종영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전효상은 <마지막 사랑>을 제작하고 있는 ‘유니언 스튜디오’의 오진원 대표를 국장실로 불렀다.

    두 사람은 대학 선후배 관계로 오진원이 2년 선배였다.

    “어때? 국장 자리에 앉은 소감이?”

    “어떻긴요.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죠.”

    “그래도 사람 죽으라는 법 없어. 강원도로 쫓겨날 때만 해도 끝인 줄 알았는데. 그러니 어떻게든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는 거 아니겠어. 근데 국장실 구경시켜 주려고 날 부른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야? 혹시 내가 짐작하는 그것 때문인가?”

    “네, 시청률만 문제였으면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아시잖아요. 방송국도 지금 시끄럽습니다. 오실 때 보셔서 아시겠지만 방송국 앞에서 1인 시위까지 하는 형편입니다. 상대 방송국에서 가만있을 리가 없죠. 아침부터 취재하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아마 저녁 뉴스로 나오겠죠.”

    “그래서 뭘 어쩌라고?”

    “원래 기획하길 24부작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20부작으로 줄이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어차피 제작비도 많이 들어가는 상황 아닙니까? 이참에 그냥 끝내죠.”

    전효상의 이야기를 듣던 오진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수용하기 힘들 것 같아. 이미 논란이 생길 때부터 위에 제안을 했는데 안 먹히더라고. 자네도 알잖아. 재벌들 자존심만 쎈 거. 물러서면 지는 거라고 생각한다니까. 사람이 이럴 땐 유연하게 해야 하는데 말야.”

    “위라면…… 박현호 본부장인가 하는 그 사람이죠?”

    “어.”

    “아예 매각하기로 결정 난 겁니까?”

    “형식적 절차만 남은 거지. 이미 그쪽에서 보유하고 있는 지분이 내 우호적인 지분보다 많아. 사실 이번 드라마도 그쪽에서 거의 대부분 투자를 했어. 확실히 광고로 먹고사는 신문사라 그런지 돈은 많은 모양이더라고.”

    “아깝지 않으세요? 그래서 형님의 청춘이 들어간 회산데?”

    “아깝다고 여기기엔 그쪽에서 제시한 돈이 좀 많아야지. 대표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속 끓이고 산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속은 시원해. 그나마 당분간은 그쪽에서 바지 사장이라도 내가 대표직을 이어 가길 바라고 있으니 백수 신세는 면한 거지.”

    “그럼 유니언 스튜디오는 그쪽 종편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겁니까?”

    “처음에는 그럴 생각인 모양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되면 다른 방송사 드라마 제작하기 좀 그렇지 않겠어? 어떻게 지켜온 업계 1윈데. 뭐,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박현호 본부장이 알아서 하겠지. 근데 지금 체제를 유지하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어.”

    “그렇군요. 그럼 조만간 그쪽도 만나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 박현호 본부장, 어떤 사람입니까?”

    “철두철미해. 생각보다 과감하고.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우리하고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번 드라마 투자도 손해가 막심했을 텐데 개의치 않더라고.”

    “거기 종편 개국하면 박 본부장도 그쪽으로 옮기는 거죠? 혹시 대표로 가는 겁니까?”

    “이제 겨우 서른인데 대표자리 앉긴 뭣하지 않아. 바지 사장 앉혀 놓고 뒤에서 장악하겠지. 어쨌든 우리 유니언 스튜디오도 좌지우지할 사람이니까 이번 기회에 잘 알아 둬.”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안한데, 조기 종영만은 막아 줘. 눈치가 보여서 말이야. 신세는 어떻게든 갚을 테니까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줘.”

    “하아, 이것 참……. 알겠습니다. 형님 얼굴 봐서 힘 좀 써 보겠습니다.”

    “고마워.”

    “참, 민경우 작가에 대해선 잘 아십니까?”

    “민 작가? 아, 스튜디오 글로리 때문에 그러는구만.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여기저기 듣는 이야기는 많지만.”

    “소문엔 어떤데요?”

    “재벌집 구제불능 망나니.”

    “그 정도예요? 그렇게까지는 아닌 것 같던데…….”

    “앞에서 대놓고 나쁘게 말하기 뭐하잖아. 사람 본성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

    “아무래도 그렇죠.”

    “그나마 드라마는 괜찮게 써서 사람 구실하는 정도라더만. 이건 오프 더 레코든데 예전에 새명 민 회장이 민 작가를 직접 정신 병원에 처넣었다고 하더군.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아들한테 그랬겠어.”

    “정말요? 그 소린 어디서 들으셨어요?”

    “박현호 본부장이 그러더라고. 어릴 때부터 보고 지내서 잘 아는 사이 같아 보였어. 뭐 그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래. 오죽했으면 새명에서 일하지도 못해 드라마 작가나 하고 있겠어. 차라리 잘됐다 싶었겠지.”

    “괜히 회사 잘못 맡겼다가 말아먹으면 오너 리스크에 다른 자식들한테까지 불똥이 튈 테니까요.”

    “그러니 차라리 이쪽 일하도록 하면서 지원은 확실히 해 주는 모양이야. 지난번 드라마 이야기 들었지?”

    “아, <셀룰러 메모리>요?”

    “자네도 드라마 찍어 봐서 알잖아. 아무리 그래도 편성을 그렇게 하는 게 어딨어? 상황이 극박했다고 해도 그런 식은 좀 아니지. 다른 작가였다면 그런 일, 받지 않아.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민 작가 쪽에서 제작비 확실히 해 줄 테니 편성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어.”

    “그렇다는 건 민 작가를 잡으면 호구를 하나 잡는 거나 다름없겠네요.”

    “관심이 많은가 봐?”

    오진원의 물음에 전효상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오진원의 계략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가는 세월 막지 못한다고 하더니.

    전효상도 분명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동료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버렸듯 그 역시도 변하고 말았다. 반짝반짝 빛나던 그는 이미 그 빛을 잃고 말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자리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 그였다. 어차피 받아 주는 제작사도 없으니 할 수 없이 강원도행을 택한 거였다.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받아 주길 바랐지만 오진원이 그렇게 물러터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 결과가 오늘 이 자리라고 그는 확신했다.

    솔직히 낭떠러지에서 매달리고 있던 사람이 기사회생하고는 거들먹거리는 꼴이 같잖았다.

    조기 종영 문제도 CP나 정해용 PD를 불러 의논하면 될 일. 굳이 제작사 대표인 자신을 불러 이렇게 할 일은 아니었다. 그가 예전과 달라진 자신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자신이 직접 돌릴 정보통조차 없어서 다른 사람도 아닌 경쟁 제작사 대표인 자신에게 경우에 대해 묻고 있는 실정에 오진원은 코웃음을 쳤다. 그가 어떻게 저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당해 보라는 생각에 박현호에게 들은 경우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로만 들려줬다.

    홍세환이야 겨우 모사꾼에 불과했지만 민경우는 전혀 다른 성향이었으니 전효상의 앞날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란 건 자명한 일이었다.

    * * *

    “여기가 어디야? 주변에 방송국이 몰려 있고 드라마 제작사 천지야. 거기다 연예인 소속사까지.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 열에 일곱은 다 방송 관계자라니까.”

    오랜만에 경우의 집을 들이닥친 김강철은 냉장고에서 맥주부터 꺼내 오더니 목을 적시고는 수다 삼매경이 빠졌다. 퇴근 후 수습했던 일을 듣는 경우는 비교적 차분했다.

    “하여간 그 사람도 문제야. 아무리 없는 데선 나랏님 욕도 한다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제작사 대표를 씹는 이야기를 거기서 할 게 뭐 있냐고. 주변에 기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거야, 아님 못 하는 거야? 것도 아니면 일부러 쓰라고 그랬나?”

    “뭐 일부러 그랬으려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하필이면 걸려도 대진일보에 걸릴 건 또 뭐야? 거기 요즘 분위기 완전 살벌하다고. 뭐 하나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쪽 관계자들은 다 알잖아. 거기가 유니언 스튜디오 모회사인 거.”

    김경진 작가, 정해용 PD의 드라마 <마지막 사랑>이 얼마 전 종영을 한 덕에 그 논란도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일이 터져 그쪽으로 시선이 향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까. 야, 근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에 난리난 것도 다 네 탓인데 말이야.”

    폭탄 넘기기 하듯 폭망할 김경진, 정해용 콤비를 몰래 유니언 스튜디오에 떠넘긴 경우를 떠올리며 김강철은 고소하다는 듯 킥킥 웃었다.

    그러다 이번에도 그의 말처럼 <마지막 사랑>이 망했다는 사실에 살짝 소름이 돋기도 했다.

    어떻게 알았기에 망할 걸 확신할 수 있었던 거지?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하여간 지난번에 그 신도현 작가 데려온 것 때문에 그쪽하고 신경전에 난리도 아니었잖아. 그래서 다른 데는 몰라도 그쪽 연예부 기자에 사회부 기자까지 내가 다 꿰고 있다는 거 아니냐.”

    “월급값은 확실히 하는구나.”

    “뭐래, 난 옛날부터 내 일은 잘했다고. 아무튼 딱 봐도 각 나오잖아. 제작사 대표하고 이제 막 계약한 소속 작가하고 갈등이 있다고 해 봐. 개떼처럼 몰려들어 물어뜯겠지. 이제 좀 잠잠하나 싶은데 그럼 내가 너무 피곤하잖아.”

    결국 자기 편하려고 나섰다고 했지만 경우는 그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뒷말 나오지 않게 확실히 처리한 거야?”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어떻게 보면 너랑 박현호지 그 밑에 사람들은 아니잖아. 우리 같은 일개 직원들은 상사의 뜻을 따라야 하는 죄밖엔 없다고. 그러니 좋게좋게 지내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지.”

    “돈 줬다는 소리를 참 돌려서 하네.”

    “그럼? 싸우리?”

    “누가 뭐래? 잘했다고. 적은 가까이 둘수록 좋은 법이지. 잘 구슬려. 혹시 또 모르잖아. 그 기자 덕분에 내부에서 무슨 이야기가 도는지 알 수 있을지도.”

    “그건 그렇고. 뭐야? 또 뭔데 이 난리가 나는 거야?”

    궁금해하는 김강철에게 경우는 SBC 전효상 국장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완전 웃긴 양반이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리고 말았구만.”

    “나? 어딜 봐서?”

    “지금이야 너도 많이 사람 됐지. 근데 한 번 걸리면 물고 늘어지는 게 맹수 못지않잖아. 내가 너를 모르겠냐? 딱 봐도 그냥 넘어갈 눈치가 아니잖아.”

    “일단은 놔둬. 눈앞에 장애물을 치우는 데도 순서는 필요한 법이니까. 꿀은 빨아야지. 편성 보장은 받아 놓고 처리는 그 뒤에 하는 걸로 하자.”

    “오케이.”

    그러면서 두 사람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좋은 의도였지만 경우는 윤기동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소속 작가들에게 불안감을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대진일보 기자, 이젠 네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겠네.”

    “믿는다기보다 믿는 척은 해 주겠지.”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턱을 쓸어내린 경우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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