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83화 (83/250)
  • #83. 여우가 가니 호랑이 (3)

    아예 방송국에 출퇴근을 하며 대본 수정에 여념이 없었던 첫작과 달리 <역전의 정수> 촬영 기간 동안 경우가 현장을 찾은 건 네 번밖에 되지 않았다.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때와 달리 이젠 현장 돌아가는 상황도 알았으니 굳이 나갈 필요는 느끼지 못한 거였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현장을 찾았는데 첫 촬영을 시작할 때, 첫 방송을 앞두었을 때, 준 리차드가 까메오로 출연했을 때, 그리고 지금이 그랬다.

    <역전의 정수>는 지금 중요한 기점에 서 있었다.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던 이정수는 동고동락했던 도적 떼 식구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역사책을 찾아본다. 그러다 겨우 몇 줄 찾아낸 그들의 결말은 배신자 때문에 관군에 체포된 후 참수를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들의 최후가 그랬다는 사실에 이정수는 충격을 받는다.

    아무리 기사를 써도 데스크에서 막히는 현실. 달라질 것 같지 않은 현실에 좌절하던 그는 마침내 결심한다. 어쩌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함께했던 시간을 생각한 그는 그들에게만이라도 다른 결말을 주기 위해 결국 과거로 되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오늘의 촬영은 이정수가 과거 세계로 돌아간 이후의 이야기였으니 어쩌면 이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씬이었다.

    그런 만큼 현장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드디어 촬영 준비를 마치고 몇 번의 리허설을 거친 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다시 돌아온 정수를 환영하기 위해 멧돼지 사냥까지 성공한 이들은 모처럼 허리춤을 풀고 잔뜩 먹고 마시며 취해 곯아 떨어졌다.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를 듣던 정수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서울의 밤하늘은 별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에선 살짝만 고개를 들어봐도 별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많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 * *

    바스락바스락.

    고즈넉한 밤 산책을 즐기던 임씨는 산책에 나선 사람이 자신 혼자만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살짝 돌아보려는데 그의 행동보다 말소리가 더욱 빨랐다.

    “이 늦은 시간에 밤 산책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밤이슬 밟다가 감기…… 아, 고뿔에 걸리십니다.”

    “늙은이 걱정을 해 주는 겐가?”

    “늙었다고 하기엔 그리 많은 연세는 아니신 것 같은데요. 뭐 어쨌든 아침 저녁으로 꽤 쌀쌀해졌으니 고뿔 걸리기 쉬운 때가 아닙니까?”

    이정수의 말에 임씨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곳엔 어쩐지 쓸쓸한 얼굴의 정수가 서 있었다.

    “그렇게 사흘 앓다 죽으면 호상이라 하겠지.”

    “아저씨는 몇 해 전에 아들이 굶어 죽었다고 했지요?”

    “그래. 그랬지. 죽으면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자네한테 내 궁금한 게 하나 있으이.”

    “말씀하십시오.”

    “뭣 하러 이곳으로 돌아온 겐가? 꺽쇠 이야기 들어 보니 그곳은 굶어 죽는 사람도 없는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하던데 지난번이야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이번에 이곳을 온 건 자네 의지 아닌가?”

    “그건…….”

    “그래서 생각을 해 봤다네. 나라면 정말 좋은 세상을 놔두고 목숨이 오가는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난 안 그래. 어떻게든 버티고 살았을 거야. 그렇다면 자네가 이곳에 온 이유는 뭘까?”

    “…….”

    “세상이 쉬이 바뀌지는 않은 모양이야. 안 그런가?”

    “…….”

    “처음엔 이대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서 이 짓을 시작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 세상이 바뀌기는 할까? 지난번 전투에서 한온이가 죽었지. 다음엔 또 누가 죽게 될까?”

    “그래서 산채 식구들의 기대를 저버리기라도 하실 작정입니까?”

    임씨가 말없이 정수를 바라봤다.

    “실패하겠죠. 또 누군가는…… 죽겠죠. 그렇다고 두려움에 떨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밟히면 꿈틀대고 궁지에 몰리면 상대를 물어야지요.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그럼 세상은 분명 바뀔 겁니다.”

    정수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저들이 기다리는 건 결국 자신들이 포기하는 것.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허허. 자네는 아직 젊어. 젊다는 건 그래서 무모하지.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아.”

    “그래서 산채 식구들의 기대를 저버릴 참이십니까?”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자네는 생각이 너무 많아. 그래서 위험해.”

    임씨가 품 안에서 단도를 꺼냈다. 새파란 칼날에 정수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적어도 목숨은 부지했을 게 아닌가. 날 원망 말게. 그러 이런 세상을 원망하게나.”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임씨를 피하려 했지만 맨손 체조도 하지 않은 현대인의 몸으로 산속 생활에 능한 임씨에 맞서는 건 무리였다.

    이리저리 피했지만 결국 막다른 길에 몰리고 임씨가 휘두르는 칼에 정수는 두 팔로 머리를 가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단발의 신음이 들릴 뿐.

    혹시나 싶은 정수가 슬며시 눈을 떠 팔을 내리는 순간, 창에 심장이 관통한 임씨가 정수를 향해 고꾸라졌다.

    “으아악!”

    놀란 정수가 임씨를 옆으로 밀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꺽쇠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꺼, 꺽쇠야.”

    꺽쇠는 울고 있었다.

    정수가 자신의 세계에 다녀온 사이 정수보다 키가 더 크고 듬성듬성 수염이 나기 시작한 그였지만 아직은 어린 꺽쇠가 울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정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울던 꺽쇠가 진정하자 그를 앉혀 물 한 사발을 떠와 건넸다.

    “내가…… 내 손으로 아저씨를 죽였소.”

    “혹시 다 들은 거야?”

    “아재 맘에 변한 건 진즉 느끼고 있었소.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했소. 천한 일 한다고 성도 없이 자란 나한티 성까지 물려준 사람이었소, 아재는. 아재를 아버지처럼 죽은 누이처럼 따랐소.”

    “내가…… 내가 미안하다.”

    “성님이 미안할 게 뭐요. 성님이 아니었다면 산채 식구들을 위험에 빠뜨릴 뻔하지 않았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 손을 더럽히는 게 낫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꺽쇠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성님. 지금이야 사람들이 의적이다 뭐다 떠들어 대고 있지만 아재 말마따나 우린 도적일 뿐이요. 아마 죽을 때까지 관군에 쫓기면서 그렇게 살아야 할 거요.”

    “…….”

    “지는 괜찮지만 아직 어린것들 보면 솔직히 내 맘이 편친 않소. 그것들 앞으로도 이렇게 살다 굶어 죽거나 개처럼 죽임당하거나 하지 않것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네가 만들면 되잖아.”

    달라진 정수의 모습에 그를 잠시 보던 꺽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맞소. 성님 말대로 나는 그만두지 않을 거요. 여기서 그만두면 죽도 밥도 안 된단 말이오. 그럼 누이가 목숨 바쳐 가면서 날 구했던 일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 된단 말이오. 그러니 나는 끝까지 갈 거요.”

    “꺽쇠야!”

    “나는 이제 그 이름을 버릴 거요. 백정질밖에 못 했던 이름을 버릴 거요. 날 대신해 죽은 누이를 위해 살 거구만요. 그러니 정이라고 불러 주오. 난 아재처럼 겁만 내고 있지는 않을 거요. 세상이 바뀔 거라고 믿을 거요. 설령 그것이 내 명줄을 끊어 놓는 거라고 해도 말이오.”

    더 이상 꺽쇠는 손을 떨지 않았다.

    * * *

    영화나 노래는 제목을 따라간다는 속설이 있듯 시청률 최하위로 시작했던 <역전의 정수>는 드라마 제목처럼 역전에 역전을 거듭해 마침내 시청률 1위를 달성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드디어 시청률 1위네요.”

    “네. 이번엔 참 쉽지 않았어요.”

    “뭘요. 작게 시작해서 크게 크는 것도 좋죠. 뭔가 달성한 것 같은 기분도 드네요.”

    “참, 이렇게 된 거 대표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바로 그때 윤기동 작가가 나타났다. 김종수에게 새로 작가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아직 대면식도 하지 않은 탓에 김종수가 나서 경우에게 윤기동을 소개했다.

    “민 작가님, 이쪽이 이번에 새로 계약한 윤기동 작가님입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민경우라고 합니다.”

    “윤기동입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좋은 드라마 많이 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해 작가님을 서포트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드디어 소문으로만 듣던 경우와 만났다는 생각에 윤기동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듣기론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고 하던데 다작을 한 탓에 살짝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닌가 싶어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스튜디오 글로리를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하지만 생각보다 경우는 많이 바빠 보였다.

    “전에 대표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일단 해 볼까 생각 중이에요. 혹시 그동안 괜찮은 아이템 있었나요?”

    <역전의 정수>가 시작되고 나서 아이템 회의에 빠졌던 경우는 그동안 있었던 회의에서 괜찮은 결과물이 있는지 체크부터 했다.

    “결국 그쪽으로 가닥을 잡으셨군요.”

    “네, 좋은 기회를 보낼 수 없잖아요. 대표님 말씀대로 신인 작가들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 볼 참입니다. SBC에서 편성을 보장해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욘 없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서서히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보던 윤기동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신인 작가 프로젝트? SBC?”

    윤기동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 * *

    약속 장소로 향하던 김강철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약속 장소가 스튜디오 글로리가 있는 마포였다.

    “이쪽으론 오줌도 안 싸는데.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 장소를 바꿀 걸 그랬어.”

    퇴근 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김강철은 혹시라도 경우가 자신을 부르지는 않을까 불안한 생각에 호프집을 찾았지만 다행히 그의 업무용 전화기는 조용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단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로 옮긴 제작사는 괜찮고? 그 재벌집 아들이 하는 제작사 들어간다고 했잖아.”

    “말도 마라. 작가 대우 좋게 해 준다고 하더니 다 소문이었나 봐. 사람을 앞에 두고도 안하무인이더라고.”

    “아무렴 재벌집 아들이 굽신거려 주길 바랐냐? 꿈 깨.”

    “누가 그렇대? 그냥 같은 작가로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거지.”

    “진지한 대화는 무슨. 솔직히 너는 그냥 취재가 하고 싶었던 거잖아. 네가 알지 못하는 상류 사회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거.”

    “상류 사회는 무슨. 재벌이라고 다른 거 있어? 어차피 삼시 세끼 먹는 건 다 똑같아. 그보다 그게 영 신경 쓰이네.”

    “뭐가?”

    “SBC랑 무슨 신인 작가 프로젝트를 한다는데…… 물어도 다른 작가들은 모르는 눈치더라고.”

    “그래? 그럼 신인한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는 거 아냐? 제작사에서 신인한테 일 몰아주면 너는? 한꺼번에 여러 사람 신경 쓸 수 있겠어? 큰 프로젝트면 제작사의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리겠지. 올해 안으로 새 작품 들어가겠다는 네 계획, 그거 완전 물 건너간 거 아냐?”

    “뭐? 그런 난 가자마자 완전 좆 된 거냐?”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하, 이거 완전 열받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스튜디오 글로리에 새로 들어간 작가 같은데 경우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는 모습에 김강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딱히 재벌이라서가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만의 이런저런 기준을 세워 두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신랄하게 씹는 사람들 여럿 보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는데 그들이 앉은 바로 뒤 테이블에서 열심히 무언가 적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냥 넘기기엔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로 대진일보 연예부 기자였다.

    “하, 경우 이 자식이 부르지 않으니 이제는 다른 쪽에서 나를 가만두지 않네.”

    김강철은 친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기자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인기척에 놀란 기자가 고개를 들자 김강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기자님.”

    기자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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