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82화 (82/250)
  • #82. 여우가 가니 호랑이 (2)

    사람들의 인식이 쉽게 바뀌리라고 전효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 둑도 작은 개미구멍으로 무너질 수 있듯 사람들의 견고한 생각도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었다.

    종편은 어떻게 보면 방송가의 지각을 뒤흔들 일대의 사건이었으니 그에 대한 대비는 필요했다. 뉴스나 시사 프로는 제쳐 두고 문제는 드라마와 예능이었다. 재미있는 드라마와 예능이 시작되면 시청자들은 그쪽으로 쏠릴 게 분명했다.

    그러니 실력 있는 작가를 우선 묶어두는 방법이라도 쓰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경우와 척을 지는 행동이라는 걸 그 역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경우를 얕잡아 본 게 문제였으니 그의 눈에 경우는 새명의 어느 자리도 차지하지 못해 드라마 작가나 하는 그저 돈만 많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사는 망나니 아들로 보였던 게 문제였다.

    달라졌다는 말이 많았으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나마 드라마를 잘 쓴 덕분에 사람 구실은 하고 있다는 생각 외엔 없었다. 그러니 그런 그의 목을 잡아 국장의 자리를 지키는 동안 더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한 번의 위기를 겪었던 그가 다음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고료는 저한테 큰 의미가 없다는 걸 모르시지는 않겠죠?”

    “당연합니다. 그러니 남들은 더 받지 못해 안달인 고료를 그렇게 깎으셨던 거겠죠. 하지만 저도 입장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가 제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성의 표시였을 뿐입니다.”

    “뭐가 더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저희는 전속 계약 5년 동안 작가님의 손발 묶기 위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작가님의 드라마가 우리 SBC에서 방송되는 게 우선이죠. 민 작가님이 쓰신 드라마라면 편성은 보장하겠습니다. 1년에 한 작품씩이면 괜찮은 조건 아닌가요?”

    시청률 제조기라 불리는 오연옥 작가도 2년에 한 번 편성을 받았다. 물론 방송국 사정인지 개인적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지현 작가를 제외하곤 해마다 드라마를 집필해 방송하는 작가가 없었다.

    갈수록 시청률이 떨어지는 탓에 기성 작가들도 한 번 시청률이 미끄러지면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운 판국에 5년 보장이면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전효상이 자신에게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좋은 제안을 할 리 없다고 경우는 생각했다.

    “만약 제가 국장님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죠?”

    “그럼 저희 SBC는 온갖 이유를 들어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 작가들을 쓰지 않겠죠. 물론 ‘스튜디오 글로리’가 우리 SBC 드라마를 제작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제가 국장의 자리에 있는 한 말이죠.”

    “…….”

    “생각보다 드라마 작가도 많고 외주 제작사도 많더군요. 물론 드라마를 방송할 방송사는 손에 꼽을 정도란 걸 잘 아실 겁니다.”

    이건 답정너였으니 선택이 아니라 완전 강요나 다름없어 솔직히 경우는 기가 막혔다.

    물론 상대방의 괘씸함에 응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한창 성장에 탄력세를 받고 있는 ‘스튜디오 글로리’엔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알려져 봤자 좋을 게 없어 쉬쉬했던 것일 뿐, 전효상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누군데. 이건 완전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나 다름없으니.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최무성을 생각해 그를 앉힌 것일 뿐,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며 자책을 하고 있던 중,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하룻강아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경우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경우를 자기 좋을 대로 오해한 전효상이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예, 고민이 되시겠죠. 하지만 그렇게 나쁜 제안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드리죠. <역전의 정수>가 끝날 때까지 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영 찝찝한 기분으로 사무실로 돌아오자 그런 그의 표정을 알아챈 김종수 대표가 다가와 물었다.

    “민 작가님 오늘 SBC 다녀온다고 하시더니 혹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경우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좋게 생각하면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네. 물론 그렇긴 하죠. 하지만 제가 전속으로 해 버리면 저희 소속 작가님들에게 갈 기회가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니까 그렇죠. 거기다 그쪽에서 하는 행태가 그렇지 않습니까? 이건 솔직히 갑질이죠.”

    “하긴 작가님 입장에서야 갑질당해 보지 않으셨겠군요.”

    경우는 솔직히 화가 나서 속을 끓고 있는데 김 대표는 어쩐지 여유로운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거 뭐 있습니까? 전효상의 속이야 뻔히 보이는데 이용당해 주는 척, 이용해 먹으면 될 일이 아닙니까. 지금 보니 전효상 그 친구, 그동안 너무 궁지에 몰린 모양입니다. 넓게 보지 못한 걸 보면 말이죠.”

    생각해 보니 김종수 대표가 바로 SBC 출신의 PD였다.

    “제가 그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대표님은 처음부터 스튜디오 글로리 대표님이신 줄 알았거든요. 그럼 전효상 국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겠네요.”

    “네. 알다마다요. 사람들은 전효상을 호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호랑이가 아니라 곰입니다. 한 가지만 생각하고 두 가지를 생각하지 못하거든요. 이건 어떻게 보면 전효상의 자충수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저쪽에서 이용해 먹으려고 달려들면 이쪽에선 우리가 역이용하면 될 일입니다.”

    “어떻게요.”

    “물론 그 전에 민 작가님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김종수의 말에 경우는 더욱 궁금증을 자아냈다.

    “전효상 그 친구가 한 말 중에 혹시 공동 집필에 대한 말이 있었습니까?”

    “공동 집필이요?”

    “네. 전에 작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걸 시험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드라마를 쓰는 드라마 작가에게 가장 심한 압박감을 주는 건 바로 시청률이었다. 드라마가 잘되면 배우 덕이라 하지만 드라마가 망하면 드라마를 잘 못 쓴 작가에게 돌아갔다.

    방송이 나간 직후 분당 시청률까지 챙겨보며 시청률이 떨어지는 부분을 집중 분석하는 작가들도 더러 있었다.

    어쨌든 시청률에 대한 작가들의 부담은 실로 어머어마했다.

    경우는 이런 부담감을 조금 덜어 주고 더 효율적으로 드라마를 집필하는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집단 집필이었다.

    보통 미국 드라마가 이런 방식을 많이 사용하곤 했는데 미국 드라마는 메인 작가와 보조 작가라는 개념이 없었다.

    미국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시즌제 드라마로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큰 줄기의 이야기가 있고 매 회별 끝나는 서브 스토리가 공존했다.

    여러 작가들이 각자 회별 에피소드를 맡아 집필하는 방식이었으니 회별 시청률이 조금 떨어져 압박감을 받는다고 해도 한 사람이 모두 짊어져야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경우는 신인 작가들이 종종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러니 기성 작가는 몰라도 신인 작가들에겐 이런 방법을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단 생각에 의견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지난번 박민정 작가의 입봉작, 솔직히 제가 봤을 땐 민 작가님 공동 집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걸 공동 집필로 보는 건 좀 무리 아닙니까?”

    “왜요? 아이템 회의하고 회별 시놉시스도 같이 뽑고 대본 집필 때도 작가님이 세세히 살펴보신 걸로 아는데요. 덕분에 박민정 작가가 확실히 성장하기는 했습니다.”

    “그거야 박 작가 실력이 괜찮았으니까요. 저는 부족한 점을 조금 채워 줬을 뿐입니다.”

    “작가님, 그 정도도 안 하고 이름 올리는 작가 여럿 봤습니다. 작가님도 사정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알다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아이템 회의부터 시작해 집필까지 보조 작가를 시켜 놓고도 자신이 쓴 것인 양 하는 작가가 고명희 말고도 더러 있었다.

    “작가님이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만, 이번 기회를 이용하는 것도 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 엎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전 국장을 물 먹이는 것쯤 제 선에서 처리할 수도 있고요.”

    “대표님은 혹시라도 제가 거절했을 때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가 입게 될 피해는 걱정 안 하십니까?”

    “하하하. 민 작가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민 작가님, 막말로 여차하면 방송국도 살 사람 아닙니까? 전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덤비는 전 국장이 걱정될 뿐, 우리의 앞날 같은 거 걱정하지 않은 지 오랩니다. 솔직히 그런 걱정을 안 하고 사니 스트레스 쌓일 일도 없습니다. 하하하.”

    혹시 안정적으로 드라마를 방송할 방송국을 아예 사 달라는 얘기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곧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김 대표의 말을 천천히 생각했다.

    전효상의 입장에선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테지만 피차일반이었으니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자신을 협박한 전효상의 뒤처리는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 * *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어?”

    “솔직히 공부를 해서 뭐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고1이었던 임석주는 어느새 수능을 앞둔 고3이 되었다.

    그동안 김강철을 통해 그의 학교 생활을 체크하고 있었던 경우는 수능을 앞둔 그를 오랜만에 만났다. 경우의 돈을 불려 주고 있던 임석주는 경우의 예상대로 수능에 회의적이었다.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좋은 대학을 졸업해서 대기업 취직하고 돈 많이 벌려고 가려는 거잖아요. 근데 전 이미 돈이 많은데 그럴 필요가 있나요?”

    아직 미성년자인 탓에 차명으로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경우에게서 받은 수고비를 나름 불리고 있었던 임석주는 이미 갑부였다. 그러니 모든 일에 회의적이긴 마찬가지.

    하지만 경우는 생각이 달랐으니, 이전 생에 그는 먹고사는 게 바빠 대학은 딴 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 졸업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 졸업장 없이는 인정받기 어렵다는 사회 풍토를 알았기에 틈나는 대로 일하면서 겨우 대학을 다녔다.

    덕분에 졸업장을 따기는 했지만 그 또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런 말을 해도 임석주에게 먹힐 일은 없으니 경우는 다른 쪽을 택했다.

    “너, 우리나라가 얼마나 학벌을 따지는지 알고 있어? 아직 사회에 나오지 못해서 모르는 모양인데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들을 졸부로 취급하면서 은근 무시해. 근데 좋은 대학 나온 사람은 무시 못 하지. 자기들은 공부를 못했거든. 너보다 못한 사람한테 대학 안 나왔다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으면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하는 거야. 그럼 적어도 너를 보는 시선이 달라질 테니까.”

    경우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임석주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 여름 방학이었으니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서울대도 충분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시험을 볼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비트코인 거래는 잘하고 있어? 나오는 대로 사들이는 거 맞지.”

    2010년, 가상 화폐 거래소가 생기기 전이었으니 P2P로만 거래가 가능했다.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 때문에 오신 거죠?”

    “겸사겸사.”

    “그럼 형님은 비트코인이 정말로 화폐를 대신할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치만 나한텐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가 중요하지. 싼 값에 사들이고 비싼 값에 되팔 수 있다면 나는 그게 그냥 돌덩이라도 투자를 할 거야. 화폐의 기능은 몰라도 투자의 기능은 확실할 테니까.”

    2010년 5월 22일.

    미국 플로리다 주에 사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라스즐로 핸예츠’가 비트코인으로 피자를 사 먹은 날로 비트코인이 현물 거래된 최초의 날이었다.

    그때 그가 피자 두 판을 사는 데 쓴 비트코인이 1만 개였으니 한 개에 2.7원.

    지금부터 착실히 잘 모아 떡상하면 까짓것 방송국을 사는 것도 문제가 아니란 생각에 경우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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