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여우가 가니 호랑이 (1)
“자, 오늘부로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함께 하게 될 윤기동 작가님입니다.”
김종수의 소개에 작가실의 다른 작가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영세하게 시작한 ‘스튜디오 글로리’의 작가진은 대부분 신인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애초 신인 작가만 받은 건 아니었지만 시작이 그런 탓도 있었고, 이왕이면 기성보다는 신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려 한 경우의 의지도 있었다.
그런데 윤기동은 미니 시리즈와 주말 연속극을 다수 집필한 경험이 있는 기성 작가였다. 경우가 오기 전 초창기부터 있던 작가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경우가 데려온 신인 작가인 것에 비해, 윤기동은 건너건너 아는 사람을 통해 김종수에게 직접 전속 계약을 하고 싶다며 제 발로 들어온 케이스였다.
작가실의 신인 작가 대다수가 그의 드라마를 보고 공부를 했던 터라 그의 등장은 마치 연예인이 나타난 듯한 설렘을 주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느슨해진 경쟁심에 긴장감을 주고 있었으니 ‘스튜디오 글로리’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론 자신을 향한 작가들의 선망의 시선에 윤기동의 맥이 풀린 건 별개의 문제였지만.
무슨 초등학교에 전학생이 온 것도 아니고 작가들 불러 모아 놓고 소개라니. 솔직히 기가 찰 정도였다.
이전 제작사에선 자신을 비롯한 유명 작가 몇을 빼고는 누가 소속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다른 곳도 아닌 ‘스튜디오 글로리’에 온 것도 어떻게 보면 작가 대우가 다른 제작사보다 좋다는 소문도 한몫했지만, 이렇게 와서 보니 기대에 못 미치는 게 아닌가 싶은 실망감도 있었다.
거기다 경우에 대한 자자한 소문 또한 그가 이곳을 선택한 한 가지 이유가 되기도 했는데, 드라마로 한창 바쁜 탓에 경우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은 남겨 둬야 했다.
* * *
홍세환이 자리를 비운 후 SBC의 새로운 드라마국 국장이 된 전효상은 그동안 공백으로 밀려 있던 국장의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기 시작했다.
홍세환과 함께 뇌물 수수 혐의가 있던 부장급 CP들이 물갈이가 되었고 그 빈 자리를 전효상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로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최무성이 끼어 있는 것 역시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경우는 최무성이 CP로 진급하자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축하드립니다, PD님. 아니다. 이제부터 부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부담스럽게 그러지 마십쇼. CP도 어쨌든 PD니까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 주세요. 괜히 어색하고 그러네요.”
“어색할 거 뭐 있나요. 좋은 건 함께 나눠야죠. 이럴 게 아니라 오늘 저녁 회식 어떻습니까?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사려면 제가 사야죠. 근데 이래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뭐가요?”
“3년 동안 일 없이 지냈는데 갑자기 진급이라니……. 솔직히 좀 그렇잖아요.”
“3년간 일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지 않습니까? 그리고 CP 달 연차도 되셨잖아요. 후배들은 치고 올라가는데 PD님만 밀려난 거잖아요. 그게 다 전임 국장의 횡포 때문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 있나요?”
“사람들이 모두 다 작가님처럼 생각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알 사람들은 다 알 테니 걱정 마세요. 공백기가 있기는 했지만 그동안 열심히 일하신 거 이제야 보상을 받은 겁니다. 이제 모두 제자리를 찾은 거죠.”
“다 작가님 덕분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더 고맙구요. 그래도 이렇게 진급하신 거 보면 새로 오신 국장님이 PD님이 사리엔 밝은 분이신가 보네요. 혹시 그분에 대해 아십니까?”
“예, 한솥밥 먹던 식군데 모를 리 있나요. 그 형님도 참 어지간하신 분이죠.”
하지만 어쩐지 최무성은 그에 대해 말을 아꼈다.
사실 경우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으니 전효상은 그의 생각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이빨도 빠지고 힘도 빠져 뒤로 물러난 게 아니었다. 힘겨루기에서 밀린 건 사실이었으나 발톱을 숨긴 채 숨죽이고 있었던 호랑이였으니 자신에게 다시 기회가 오길 착실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겨우 제자리를 되찾았으니 그의 다음 행보는 보나마나였다. 다시는 절대로 힘없이 밀려나지 않겠다는 다짐뿐이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자리를 공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최근 화제를 몰고 있는 <역전의 정수>였으니 9퍼센트의 시청률 최하위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느리긴 하지만 서서히 바람몰이 중이었다. 벌써 평균 시청률도 19퍼센트를 넘어서 2위였던 KBC 드라마를 제친 상황이었다.
남은 건 MBS뿐. 지금의 화제성과 기세라면 시청률 1위 탈환은 시간문제라는 게 제작진의 입장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에서 그가 <역전의 정수>에 주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임 홍 국장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작가였습니다. MBS 수목 미니 시리즈로 입봉했는데 지금이야 우재환이 알아주는 배우긴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신인이었습니다.”
“나도 알지. 신인 배우 쓴다고 배짱 좋다고 했어. 아무리 그래도 미니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신인 잘 안 쓰잖아. 서브라면 모를까.”
“네. 그래서 시청률 견인의 일등 공신은 대본을 쓴 작가라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홍 국장이 차기작 제안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홍세환이 있었을 때는 시청률이 별로였잖아.”
“네. 그렇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 기미는 있었던 게 인터넷 다시 보기 서비스가 방송 3사를 통틀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건 장년층이나 노년층보다는 청년층, 중년층에 더 어필하고 있다는 소리 같은데.”
“실제로 2049에서의 PPL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의 시청률이 더 이상 절대적인 지표가 되지 않은 지 오래된 이유가 광고 효과 때문이었다. 실제로 시청률이 가장 높은 건 일일 드라마나 주말 연속극이었으나 청년층보다는 장년층, 노년층에 인기가 많은 이들 드라마는 시청률은 높은 데 비해 광고 효과가 그리 높진 않았다.
반대로 시청률이 높지는 않지만 주 시청자층이 주로 소비를 하는 2049에 몰려 있다면 광고 효과가 높았기에, 방송국에서는 이들 시청자들을 잡으려는 노력을 더욱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니 시청률이 높지 않게 시작했지만 주 시청자층이 소비층에 몰려 있는 <역전의 정수>는 방송국에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드라마였다. 거기다 시청률과 화제성도 상승하는 상황.
“이거 홍 국장한테 고맙구만. 판을 벌여 놓고 혜택을 보는 건 결국 내가 아닌가.”
만족스러움에 미소 짓던 전효상은 경우에 대해 적힌 보고서를 한참 들여다보며 이 인간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 * *
<역전의 정수> 8회가 방송된 직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로 들끓고 있었다.
바로 준 리차드.
송원태가 열연하고 있는 기자 이정수와 대립 관계에 놓인 인물로 몇 컷 등장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인터넷 커뮤니티를 집어삼켜 버렸다.
시간의 통로를 발견한 이정수는 원래 세계로 돌아오는 걸 잠시 미루고 도적 떼에게 조금 더 효과적으로 관군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그런 다음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에 그들과 작별하고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온다.
대기업의 비리를 기사로 쓰고 있던 이정수는 더 이상 숨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그 과정에서 엮이는 게 바로 준 리차드가 맡은 에디라는 역이었으니.
갈색의 장발, 옅은 색의 눈동자, 훤칠한 키에 걸치는 것만 해도 맵시 있게 만드는 몸매까지.
그런 그의 역할은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해 하루아침에 멀쩡한 기업을 파산하게 만드는 기업 사냥꾼이었으니.
법으로 그를 제제해야 하지만 제대로 된 법조차 갖춰지지 않은 상황, 거기다 그 과정에서 이득을 얻는 기득권층의 미온적인 태도에 이정수는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기 위해 이런 현상을 고발하려 기사를 쓰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
그런 이정수에게 준 리차드가 맡은 ‘에디 테일러’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 사람들한테는 그래도 돼. 너네 법이 그렇잖아. 우린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선 안에서 일해 왔다구. 문제 있으면 법으로 해결해. 알았어?”
어떻게 보면 분노유발자임이 분명한데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 사람이 뭘 먹으면 저렇게 섹시한가요?
- 능숙한 한국어에 영어 억양이 섞이니까 더 섹시.
- 면전에 대고 나한테 욕해 줬으면.
- 이정수 보면서 살짝 비웃는 거 나만 설렘?
- 누가 에디 나오는 부분만 짤로 만들어 줬으면. 그쪽 방향으로 절한다.
그러면서 그가 촬영했던 현장의 사진들까지 덩달아 화제가 되었다.
악역이라 처음 까메오 제안을 했던 최무성이 조심스러워했던 것과 달리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안 그래도 시청률이 상승하고 있던 차에 기름까지 끼얹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준 리차드 개인에게도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이 한성음료와의 CF계약에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점이었다.
뉴욕 브로드웨이 출신의 배우였지만 아무래도 무명 신인이었던 탓에 한성음료가 제안하는 대로 끌려갈 수도 있었던 상황. 하지만 반짝하고 사라질 인기라 하더라도 어쨌든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생겼으니 경우는 그에게 조금 더 유리하게 CF 계약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매해 여름 휴가 차 왔던 한국에서 드라마도 찍고 CF도 찍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준 리차드는 이런 식으로라도 일이 풀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TV 광고엔 여러 여자를 만나는 일명 나쁜 남자 컨셉의 준 리차드가 지친 기색 없이 스포츠 음료를 마시는 광고로 대한민국을 휩쓸었고 해당 스포츠 음료의 매출 상승 또한 당연한 결과였다.
당연히 청순한 여자 모델을 대표하는 부길식품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 * *
연이은 시청률 상승으로 <역전의 정수> 팀의 사기가 올라가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전효상의 부름은 같은 선상에서의 일이라 경우는 생각했다.
다만 최무성을 제외한 자신만 불렀다는 점에서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처음 만나는 전효상과 간단한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제가 최 CP도 빼고 왜 민 작가님을 이렇게 불렀는지 짐작하시겠습니까?”
“글쎄요.”
“민 작가님께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서요.”
“제안이라면……?”
“적어도 앞으로 5년 동안 우리 SBC와 전속 계약을 하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지금 받고 계신 고료 두 배는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저기, 국장님…….”
“아, 물론 알고 있습니다. 민 작가님께서 고료를 자진 삭감하고 계시다는 걸요. 그러니 겨우 그 정도만 드리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래 민 작가님께서 받으셔야 할 고료의 두 배를 보장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제작비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줄이겠다, 그건 아닙니다. 고료까지 삭감하려 했던 민 작가님의 뜻을 존중하니까요. 그 정도라면 민 작가님께 결코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왜 그렇게까지 하시려는지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다른 방송사에 민 작가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요. 솔직히 첫 작에 화제성과 시청률을 그만큼 끌어올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요?”
“과찬이십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죠. 하지만 이번 작품으로 그게 단순한 운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시청률 꼴찌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점점 상승해 1위를 넘보고 있으니 그런 민 작가님의 실력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전임 국장이 민 작가님을 모셔 오려 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구요.”
사람을 앞에 두고 용비어천가도 아니고 경우는 살짝 민망해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기분 탓에 그런 선택을 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전효상의 진짜 의도도 궁금했다.
“만약 제가 국장님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죠?”
그러자 전효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