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80화 (80/250)
  • #80. 9회말 2아웃 (6)

    퇴근 후 가장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맥주 한 캔 손에 쥔 채 드라마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을 가장 즐거워하는 김강철은 요즘 드라마가 바쁜 관계로 경우의 부름이 적다는 게 가장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TV전원을 켜자 <역전의 정수> 오프닝이 시작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도적 떼에서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한 꺽쇠가 관군의 추적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다. 은폐에 최적화된 요새로 지어져 숨어들기만 하면 무사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산채로 향한다. 하지만 이미 이 산이 수상하다고 생각한 관군은 산 곳곳에 숨어 꺽쇠가 산채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 주길 기다리며 끝난 참이었다.

    조명을 최대한 어둡게 한 김강철은 맥주를 홀짝이며 화면 속에 집중하고 있었다.

    * * *

    “헉, 헉, 헉!”

    꺽쇠가 거친 산속 길을 뛰어가자 곳곳에 숨어 있던 관군들이 나와 꺽쇠가 가던 길을 조용히 뒤쫓기 시작한다.

    산채 입구에 다다른 꺽쇠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나팔 경고음이 울린다.

    그러자 놀란 꺽쇠가 뒤를 돌아보는데 멀찍이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관군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 여기는 꺽쇠의 망연자실한 얼굴.

    산채 안에서는 산채의 입구를 지킬 최정예병들이 각자 칼과 창, 화살을 들고 자신의 위치에 선다. 이들을 막아야 산채 안의 식구들을 지킬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꺽쇠도 그들에 맞서기 위해 검을 쥐어 들었다.

    * * *

    무기가 부실한 단점을 보완해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펼쳤던 산채 식구들은 총포류와 화약 무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도적 떼를 잡기 위해 아예 산을 통째로 불 태울 결심까지 한 관군을 보며 이대로 있다간 전멸하고 말 거란 생각이 엄습하고 있었다.

    “이러다 죽는다구요. 여길 버려야 한다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세계에 떨어진 정수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돌아가야 하는데 방법도 찾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신을 거둬 준 두령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많은 식구들이 관군의 눈을 피해 도망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한참을 고민한 두령이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학이, 유복이, 백손이와 그 밑에 애들은 남아 관군을 저지한다. 그사이 오가, 주팔이, 돌이는 산채 식구들을 나눠 산 밑으로 내려간다.”

    “지가 남을랍니다.”

    꺽쇠의 말에 정이 말렸다.

    “꺽쇠 대신 제가 남겠습니다.”

    “넌 빠져! 계집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관군이랑 싸우기라도 하겠다고? 할 수는 있고?”

    “그러는 넌? 관군을 여기까지 몰고 와 식구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했어. 이제와 책임지고 싶은 모양인데 그런 마음으로는 해만 끼칠 뿐이야. 두령, 근거리는 몰라도 제 활이 있다면 학이 오라버니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도망칠 때 그 뒤를 지킬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정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생각한 두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꺽쇠 대신 정이가 남는다.”

    “두령!”

    꺽쇠는 불만이었지만 일단 정리되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원래 가진 거라고는 목숨뿐이었던 정수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떠날 준비를 마쳤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때 오가를 중심으로 출발하자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오가의 바로 뒤에 붙던 그는 자신보다 약한 노인과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결국 이들의 맨 뒤 꺽쇠와 함께 선 정수는 굳은 표정의 꺽쇠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봐, 젊은이. 얼굴 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관아 도적질을 한 도적 떼를 관군이 가만 놔둘 리 있어? 이건 누구 하나의 잘못이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꺽쇠는 결심이 섰는지 곧바로 뒤를 돌아 산채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 버렸다.

    “이봐! 어이, 젊은이!”

    정수의 외침에 앞서 걷던 무리 중 한 사람인 한온이가 다가왔다.

    “꺽쇠, 저놈 기어이!”

    “놔두세요. 저도 속이 편하기야 하겠어요.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그러는 거겠죠. 어서 앞서가시죠.”

    마음이 급한 정수는 한온에게 말했지만 오히려 자신을 향한 한온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질 뿐이었다. 마치 그 눈빛이 그동안 먹고 재워 주고 보살펴 준 값을 하라는 것 같아서 정수는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제, 제가 한번 가 보겠습니다.”

    “고맙네.”

    하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간 정수는 관군과 접전을 펼치고 있는 산채 식구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힘을 보태고 있는 꺽쇠도.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정수는 꺽쇠를 부르지만 소용이 없다. 더 밀려드는 관군의 숫자에 산채 식구들이 위기의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에 맞은 관군이 픽픽 쓰러진다.

    화살을 쏜 사람은 바로 정이.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녀는 날렵한 눈빛으로 쏘는 족족 백발백중이었다. 그녀의 활약에 궁지에 몰렸던 산채 식구들이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그러자 두령이 외친다.

    “다들 후퇴! 후퇴해.”

    그 말에 서둘러 도망치던 정수는 그들이 다른 길로 도망치는 걸 보며 그들 뒤를 따른다.

    “아니, 아까는 저쪽으로 가더니 지금은 왜 이쪽으로 가는 건데?”

    누구보다 재빠르게 그들의 따라잡으며 몸을 사리던 정수.

    바로 그때 맨 마지막에 있던 꺽쇠가 돌에 걸려 넘어지고 바로 뒤에 나타난 관군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날아온 화살에 관군이 맞아 쓰러진다.

    숨어 있던 정이 재빠르게 나타나 쓰러진 꺽쇠를 일으키려 하지만 순식간에 날아든 화살비.

    정이는 온몸을 던져 꺽쇠를 감싸 안는다. 결국 온몸에 화살을 맞은 정이 힘없이 쓰러진다.

    “누나!”

    물밀 듯 밀려드는 관군의 모습에 꺽쇠는 정신을 잃은 정이를 들쳐 업고 산을 달려 내려간다.

    * * *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정이.

    하나뿐인 혈육을 자신의 잘못으로 잃은 꺽쇠는 정이를 끌어안고 오열한다. 그 눈물에 울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서서히 어둠이 그치고 푸르스름한 새벽이 밝아오자 하나둘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다들 떠나고 홀로 남은 꺽쇠를 차마 그냥 둘 수 없어 정수가 그 옆을 지키던 차였다.

    눈물까지도 다 말라 버린 꺽쇠가 자책하듯 원망하듯 입을 열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소? 도적질을 안 하면 꼼짝없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럼 그대로 굶어 죽었어야 했던 거요?”

    “……내가 할 말이 없네.”

    “성님은 아주 먼 미래에서 오셨다고 하셨소. 맞소?”

    “으응. 그렇지.”

    “거긴 어떤 세상이오? 먹고살 걱정 없는 그런 세상이오? 양반, 상놈 따로 없는 그런 곳이냔 말이오?”

    울부짖는 듯한 꺽쇠의 말에 정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정수는 자신이 취재를 했던 이들을 떠올렸다.

    유통 기한이 지났다고 멀쩡한 음식들이 버려졌지만 세상엔 여전히 굶주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비용을 아끼려는 대기업의 횡포 탓에 위험한 약품에 노출된 젊은이들이 죽어 나간 세상.

    양반, 상놈은 없었지만 돈으로 고용된 노예.

    이걸로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래. 먹고살 걱정 없는 곳이야. 하지만 그런 세상은 가만히 있는다고 오지 않아. 세상이 바뀌도록 네가 죽을힘을 다해야 할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정수는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느끼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꺽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화면 속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자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사무실에서 최무성과 함께 드라마를 보던 경우는 드라마가 끝이 나자 시청자들의 반응이 어떤지 보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역전의 정수>를 본 많은 시청자들이 그들의 감상을 토해 내고 있었다.

    - 아악! 한창 방송 중인 드라마를 건드린 죄다. 다음 주까지 어떻게 기다려~.

    - 스포 하지 마셈. 종영하면 정주행하려고 일부러 안 보는 거임.

    - 정이 죽었음. 꺽쇠 각성.

    └ 진짜 사악하다.

    - 오늘 연출 미쳤음. 전투 장면도 그렇지만 화살비는 진짜 소름.

    - 근데 그동안은 연출은 개떡같이 왜 그랬던 거임? 오늘 좀 볼 만했음.

    - 정수가 혼자만 동떨어진 느낌이었는데 사실 이거 연출 의도임. 정수는 도망치다 시간을 초월한 낯선 곳으로 떨어진 거임. 그래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관람자 같은 포지션을 지킴.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그러다 정이의 죽음으로 자신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느끼고 진실로 받아들이는 게 된 거임. 그래서 그동안 정수만 떨어진 듯한 필터 때깔도 그렇고 구도도 그렇고 무리와 함께 있지만 섞이지 않는 그였음. 하지만 오늘을 계기로 포지션이 바뀌면서 비로소 한 팀이 된 듯. 그걸 연출한 거고.

    └ 이 말이 정답인 듯.

    └ 이걸 알아챈 님이 천재.

    다행히 그들의 의도가 먹힌 걸 확인한 경우는 휴대폰을 최무성에게 내밀었다.

    “그렇다는데요?”

    반응을 읽던 최무성이 비로소 안도하는 게 눈에 보였다.

    마침 최무성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최무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당 최고 시청률 18퍼센트랍니다. 최저도 13퍼센트고요.”

    눈에 띄는 수치는 아니지만 확실히 오르고 있었다.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요.”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말로 다 하지 못한 마음 고생이 그 말 속에 모두 녹아 있었다. 최무성은 오랜만에 일을 맡은 탓에 시청률이 낮은 이유가 혹시나 자신에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더욱 불안해했다.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했던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경우에게도 폐를 끼친 건 아닌가 싶었다. 드라마는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인데도 잘못을 모두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

    물론 경우는 이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 보기 서비스가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유독 높은 탓이었다.

    어쨌든 기사회생했으니 미뤄 둔 일을 마저 처리해야 했다.

    다음 날, 평균 시청률이 발표되자 KBC를 제치고 시청률 2위로 올라선 덕분에 <역전의 정수> 팀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그런 가운데 드라마국 홍세환 국장이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되자 SBC는 그를 해고 처분했다. 그를 비롯한 혐의를 받고 있는 부장급 PD 몇도 함께였다.

    그리고 그 자리를 누가 메꿀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경우의 초대로 준 리차드가 <역전의 정수> 촬영 현장을 찾았다.

    광고 모델의 제안을 받은 그가 한국에서 달리 의논할 사람이 없어 경우에게 조언을 구하던 중 갑자기 성사된 자리였다. 다행히 그가 배우였던 탓에 최무성 역시 촬영 현장에 그의 방문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저 남자 누구야?”

    “엄청 잘생겼다.”

    “배운가? 설마 우리 드라마 나오나?”

    “와씨, 세상 참 불공평하네. 잘생겼는데 키도 커.”

    웅성대는 사람들 속에서 경우는 최무성에게 준 리차드를 소개했다. 한참 넋을 잃고 그를 보던 최무성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 드라마에 카메오 출연해 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마침 오늘 촬영할 부분은 정수가 시간의 통로를 발견하고 그가 살던 시대로 돌아오는 대목. 사극 세트장을 벗어나 한복을 벗은 송원태가 모처럼 단장을 했지만 카메오로 출연하게 된 준 리차드의 모습에 기가 팍 죽고 말았다.

    “저 세상 외모네.”

    “네? 뭐라고요?”

    준의 유창한 한국말에 당황한 송원태가 재빨리 말을 받아쳤다.

    “천사, 엔젤, 저 세상, 하늘나라 외모, 천사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그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안 야외 촬영이 이어지고, 촬영 현장을 주변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찍은 사진들로 인해 외국 배우는 물론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촬영을 모처럼 지켜보던 경우에게 한석인 의원은 강원도로 쫓겨났던 전효상이 홍세환 국장의 자리를 대신하기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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