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79화 (79/250)

#79. 9회말 2아웃 (5)

남자와 단둘이 호텔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조금 꺼림칙했지만 경우는 최대한 예의 있게 팬의 모습으로 준 리차드를 대접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거부감이 느껴지는 장소까지 온 이유가 있었으니.

“민경우?”

이런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 이번엔 예상한 일이었으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보며 적당히 놀란 척 경우는 연기를 펼쳤다.

“어? 이게 누구야? 혹시 안동성? 정말 오랜만이다.”

반가운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아주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네는 경우의 모습에 안동성은 살짝 눈을 가늘게 떴지만 최근 그의 활약을 듣고 있었던 터라 사람이 좀 변해서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중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레스토랑에 밥 먹으러 왔지. 근데 이분은……?”

업무 차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다가 일이 잘 해결되지 않았던 안동성은 스트레스가 쌓여 있던 차에 경우를 발견했다.

여자와 함께 있는 줄 알고 짓궂은 생각에 다가왔지만 막상 그의 앞에 있는 건 여자가 아닌 남자.

장발에 밝은 머리색 탓에 여자라 착각했지만 다시 보니 남자였다. 그것도 외국 사람.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겨 나오는 준 리차드를 보는 안동성에게 경우는 준을 소개했다.

“이쪽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배우로 활약하고 계시는 준 리차드 씨.”

“배우?”

“그리고 이쪽은 제 지인이면서 한성음료 경영기획본부장인 안동성 씨.”

“처음 뵙겠습니다. 준 리차드라고 합니다.”

“아, 안동성입니다.”

이국적인 외모의 입에서 나오는 건 유려한 한국말. 당연히 뉴욕 배우라길래 영어로 말할 줄 알았더니 한국말을 하자 안동성은 더욱 당황했다.

“내가 여기 리차드 씨 팬이야.”

그러니 얼굴 봤으면 그만 꺼져 주라는 말은 삼갔다. 어차피 경우가 이곳에 온 목적은 서로 인사를 나누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다.

남의 스케줄까지 알아다 줘야 하냐며 강철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닌가.

광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광고 이미지에 맞는 모델.

아무리 광고 에이전시에서 모델을 선발한다고 해도 결국 모델을 결정하는 건 광고주였다. 특히 한성음료의 광고를 결정하는 건 결국 본부장인 안동성이었으니.

그는 부길식품에 밀려 만년 2등을 하는 이유가 광고 때문이라 생각했다.

푸른 하늘, 청량한 바다를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는 청순한 여자 모델. 시간이 지나고 모델이 바뀌어도 이 같은 이미지의 광고를 꾸준히 이어 간 덕에 그 이미지는 아예 부길 식품의 시그니처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안동성은 그런 부길의 광고 이미지 못지않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러던 차에 만난 준 리차드는 꽤 매력적인 모델이었다.

경우는 준 리차드에게 관심을 보이는 안동성을 모른 척했다. 이름마저 한국스러운 준이 어쨌든 ‘한성음료’의 스포츠 음료 모델이 되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으니 그 다리를 자신이 놔두는 것쯤이야 해도 괜찮지 않나 싶은 생각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의 인연으로 준 리차드가 한성음료의 스포츠 음료 광고 모델이 된다면 경우는 무명인 준 리차드를 알아본 팬에서 한국 연예계에 발을 디디게 해 준 은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것은 역으로 안동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준 리차드는 한국에서 일이 잘 풀리면 미국에서의 일도 잘 풀릴 예정이었으니 경우는 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안동성의 모습에 다음 단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날 밤 안동성에게서 예상 가능한 목적의 전화가 걸려 왔다.

* * *

작은 조명 하나 켜진 비교적 어둡고 좁은 방 안.

가운데 놓인 책상과 의자, 그리고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거울.

SBC 드라마국 국장인 홍세환은 이곳이 어딘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검찰 취조실이었다.

소싯적 그가 드라마 연출을 할 때도 이렇게 생긴 세트장에서 검사와 용의자의 취조 장면을 수없이 다뤘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 대상이 자신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처음 소환을 받았을 때만 해도 참고인 조사만 하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

그는 단 한 번도 제작사에서 받은 것들이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드라마 제작을 유연하게 하기 위한 관행이었을 뿐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전임자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해 오던 일이었다.

그러니 유독 자신에게만 칼날이 겨눠졌다는 사실에 조금은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혼자 먹은 게 아니었으니 자신의 뒤를 봐주고 있는 이사회의 이사진이 분명 나서서 해결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참관실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강희주가 경우에게 소개한 최운재 검사였다.

최운재는 얼마 전 만난 민경우를 떠올리며 홍세환을 어떻게 요리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날더러 당신의 사냥개가 되라 이 말입니까?’

‘그럴리가요. 다만 이번 기회에 검사님이 어떤 분인지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좋을 것 같단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요? 비서울대 출신에 백도 없고 출세할 가망도 없으니 돈 많은 분들에게 적당히 꼬리나 흔들어 주면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 먹는 강아지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 이건가요?’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적당히 실리를 찾으시라 이거죠. 지금 검찰에 정의가 어딨습니까? 검찰이 정의로운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까?’

‘이거 보세요, 민경우 씨.’

‘어차피 검사님께서도 이미 언급하셨다시피 비서울대 출신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검사로 몇 년 그냥저냥 살다가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한테 밀려 동네에 조그만 변호사 사무실 개업하느니, 이번 기회에 검사님이 어떤 분인지 알리고 친분도 쌓아 훗날 대기업 사내 변호사로 옮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참 쉽게 말하시네요.’

‘어려울 거 뭐 있습니까? 적당히 타협하고 뒤 봐주고. 그런 검사를 모른 척할 만큼 매정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결국 이것도 비즈니스라 이겁니다. 어떻게 할지는 검사님 손에 달린 거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한계는 분명히 느껴졌다. 새로 들어온 서울대 출신의 검사를 더 친근하게 대하는 부장을 보면서 출신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었다. 차라리 실속을 생각해 변호사로 나갈까도 생각했지만 경우 말마따나 그곳도 뻔히 보이는 길.

최운재는 결국 경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역시나 SBC 이사회는 결국 홍세환을 버리는 쪽을 택했다. 거기다 칼끝이 자신들에게까지 향하지 않는다고 하자 오히려 최운재에게 빚을 진 것처럼 대했다. 모든 것이 경우의 말대로 되어 가는 중이었다.

최운재가 SBC 이사회 이사진과 만나 제작사 뇌물 관행에 대한 수사 범위를 정하며 홍세환 국장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던 차에, 경우는 만에 하나 일이 잘 처리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고정시 국회의원 한석인을 만나고 있었다.

경우의 누나인 민지선이 복합 쇼핑몰을 세우고 있는 고정시, 이곳 지역구 국회의원인 한석인은 사실 국회 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이었다. 그와 친분을 쌓아 두면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이라고는 그조차 생각지 못했다.

경우는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한석인에게 열악한 방송 환경에 대해서 토로하기 시작했다.

“톱배우 출연료가 30퍼센트, 스타 작가 고료가 30퍼센트나 됩니다. 그럼 나머지 돈을 제작 스탭들과 조연 연기자들이 나눠 갖는 거죠. 임금은 적은데 일은 또 얼마나 많이 합니까? 정말 이 바닥에서 일하고 있지만 믿기 힘든 현실이죠.”

“민 작가님이 고료를 자진해서 삭감했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야 어차피 돈 보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모두 저 같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저처럼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 아닙니까?”

“깊이 공감합니다. 그래서 저희 국회에서도 드라마 제작 환경을 바꾸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변화가 참 쉽지 않은 곳입니다.”

“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데도 괴롭힘이나 당하고 말이죠. 이런 일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다니. 혹시 민 작가님……?”

“아니요, 저 말고 저와 함께 일하는 최무성 PD님이라고 SBC 소속 PD님이신데 말이죠.”

경우는 드라마 제작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 말하던 중 자연스럽게 최무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최무성이 따돌림을 당하는 중이라 지금 드라마 제작에 영향을 받는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사실 드라마 시청률이 최하위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경우와 연을 이어 가고 싶은 한석인은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홍세환 국장이 지금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네? 검찰 조사요?”

“제작사에서 뇌물을 받은 정황이 있다고는 하는데…….”

어두워지는 경우의 얼굴에 한석인이 되물었다.

“어째서 그러십니까?”

“혐의가 인정되겠습니까? 솔직히 저도 재벌가 일원으로서 이런 말 하긴 부끄럽지만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하죠? 빈민층은 생필품을 훔쳐도 징역형이 나오는데 재벌은 수백억의 공금을 횡령했어도 집행유예 아닙니까?”

“허허, 참.”

“죄송합니다.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방통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드라마 제작 환경에 문제가 많다는 걸 공감하고 있으면서도 개선에 힘쓰지 못했습니다.”

“그게 어디 의원님의 잘못이겠습니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는 게 문제지요. 지금부터라도 해결해 나가면 되죠.”

한석인은 그제야 경우가 원하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작가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요?”

상부상조.

인맥은 단순히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돕고 도와주면서 그들 사이의 끈끈한 관계가 이어지도록 하는 거였으니.

이참에 새명 그룹 막내의 뜻을 들어주면 나중에 그의 힘이 필요한 순간 도움을 청할 수 있음을 알기에 한석인은 거리낌이 없었다.

“복잡하게 처리할 거 뭐 있나요. 잘못을 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으면 되죠. 그리고 올바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좌천당한 사람이 제자리를 찾는 거. 그거면 됩니다.”

단단한 경우의 눈빛에 한석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 방송사이긴 하지만 MBS의 김동권 국장 역시 SBC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으니 그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경우는 한석인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네요. 그나저나 드라마만 잘 쓰시는 줄 알았더니 방송 환경 개선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계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제겐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렇죠.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저희 집사람이 작가님 이번 새 드라마 아주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분명 드라마도 잘될 겁니다.”

“그랬으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그렇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경우는 다시 드라마 현장 속으로 돌아갔다.

SBC의 드라마국 국장 홍세환이 뇌물 수수 혐의로 조사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고 SBC 드라마국 자체가 어수선해지고 있는 이때 <역전의 정수> 시청률에도 조금씩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