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78화 (78/250)
  • #78. 9회말 2아웃 (4)

    “좀 서운할려고 그러네요.”

    “네?”

    입까지 삐죽이며 시무룩한 강희주의 얼굴에 경우가 당황했다.

    “그렇잖아요. 꽤 오래간만에 전화와서 같이 밥 먹자고 해서 얼마나 들떴는데요. 저 솔직히 남자한테 먼저 밥 먹자는 전화 받아 본 거 근 몇 달 만에 처음이거든요. 근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데이트하자는 것도 아니고 부탁이라니…….”

    “아니, 저는, 그…….”

    “풋. 당황하는 작가님도 참 재밌네요.”

    “네?”

    “농담이에요, 농담. 남자한테 밥 먹자는 전화 못 받은 건 사실이라 조금 그렇긴 한데, 다른 분도 아니고 작가님 부탁이니 들어드려야죠. 뭔데요?”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서운해하는 강희주를 잠시 바라보던 경우는 이내 SBC와 최무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니까 그 뒷돈 받은 국장을 갈아치우고 싶다, 이거죠?”

    “단 한 사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최소한 환경이 바뀌면 변화도 찾아오지 않을까요?”

    “어느 선까지 해결을 원하세요? 뇌물은 아랫사람들만 먹고 끝나지 않아요. 자기 몰래 뇌물 먹는 아랫사람 봐줄 두목은 없잖아요. 안 그래요?”

    “국장 선에서 끝낼 겁니다. 위는 건드리면 큰일나죠.”

    “아하. 표정을 보아하니 진짜 원하는 건 따로 있으신가 봐요. 거래를 하실 것 같은데.”

    “꼬리 자르기라고 하죠. 국장 선에서 끝내고 요구 조건을 부탁하면 그쪽에서도 반발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말인데 적당히 정의로우면서도 타협에 능하고 쇼맨십 보여 주는 걸 좋아할 만한 그런 검사님 소개해 줄 수 없습니까?”

    “저요! 제가 딱인 것 같은데요?”

    “그건 좀. 검사님이 맡으면 아무래도 저와 연관해 생각하지 않겠어요? 좋은 일은 아니라 웬만하면 저를 드러내고 싶지 않거든요. 또 방송국하고 척을 지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방송국을 아예 사 버리면 또 모르겠는데 아직은 그것도 아니니 몸을 사려야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우리가 꼭 무슨 운명 공동체같이 들리는데요?”

    엥?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강희주의 모습에 경우는 당황했다.

    그러나저러나.

    “그런 사람이라면 알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괜히 의지를 불태우는 강희주의 모습에 경우는 이대로 괜찮나 싶은 걱정이 들었다.

    * * *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의 전반적인 일정을 의논하던 최무성은 경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드라마 제목 아직 안 정하신 것 같은데요?”

    “네. 딱히 이렇다 할 게 생각나지 않아서요. PD님 좋은 의견 있으시면 좀 주시죠.”

    “음…….”

    한참 생각하던 최무성이 입을 열었다.

    “주인공 이름이 정수니까 ‘역전의 정수’ 어떻습니까?”

    “기억하기도 쉽고 드라마 전체적인 내용하고도 잘 맞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르 특성상 너무 고전적이지 않은 것도 좋네요. 그렇게 하죠.”

    제목까지 정해지자 <역전의 정수>를 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나씩 해 나가기 시작했다.

    SBC에서 최무성의 입지 탓에 스탭을 꾸리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외주 제작을 맡은 ‘스튜디오 글로리’에도 일 잘하는 인재들이 많았기에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프리로 일하는 능력자들이 많았으니 말 그대로 시간이 걸렸을 뿐 어렵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게 캐스팅.

    퓨전이라고는 해도 주 무대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게 더 많았으나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무너지면 코미디 프로그램의 콩트로 전락하고 만다. 말이 안 되는 설정을 납득하게 하는 건 배우의 연기력.

    해서 새로운 얼굴을 찾으려 매번 오디션을 추구했던 경우는 이번만큼은 오디션을 하지 않고 캐스팅으로 하기로 했다.

    주인공인 정수 역으로 물망에 오른 배우들이 여럿 있었는데 1지망과 2지망으로 고려한 배우들이 다 고사하고 결국 3지망으로 선택한 송유태가 맡게 되었다.

    평소 장난기 많은 유쾌한 이미지의 송유태는 예능 출연으로 가벼워진 이미지 탓에 연기력이 평가 절하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니 그 역시 이번 드라마를 계기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길 원했다.

    시놉시스와 4회 대본까지 받아 든 그는 밤낮 없이 작품 분석에 매달렸다. 이미지와 다르게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에 경우와 최무성은 흐뭇해했다.

    이전 생에 경우가 드라마 해 보지 못했던 <역전의 정수>는 대기업의 비리를 알고 폭로하려는 기자 이정수가, 정체 불명의 누군가에게 쫓기던 중 도망치다가 우연히 시간의 통로를 발견하고 과거로 가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곳은 임금이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않아 외척이 득세하는 혼돈의 시기. 먹고사는 기본적인 문제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많은 백성들은 목숨 부지를 위해 도적 떼로 활동한다.

    정수는 그 도적 떼에게 잡히고 신분을 위장한 포졸로 오해받아 고초를 겪게 된다. 하지만 곧 오해는 풀리고 그들의 사정에 공감한다. 그는 육군 예비역 출신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중구난방인 그들의 전략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시대를 초월해 깊은 우정을 나눈 이정수는 다시 현대로 돌아와 문제를 풀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고 과거 그들에 대해 알아보던 중 변절자에 의해 도적 떼가 결국 붙잡혀 참형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도움을 주기 위해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

    몇 달 간의 촬영이 이어지고 드디어 첫 방송을 앞둔 날.

    “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청률 내기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조연출의 소리에 스탭은 물론 배우들까지 하나둘 모여 시청률 내기에 정신이 없는 사이.

    쾅!

    멀쩡히 매달려 있던 스튜디오의 조명이 떨어졌다.

    경우는 어쩐지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 * *

    놀란 홍세환이 책상을 탁 하고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평균 시청률 9퍼센트?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홍세환의 호통에 강진일의 고개를 푹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못해도 20퍼센트는 넘을 거라던 호언장담은 어디 간 거야? 지난 주는 첫 방송이었으니까 넘어갈 수 있다고 쳐도 이제 방송 2주찬데 슬슬 입질이 와야 할 거 아냐?”

    다그치던 홍세환은 기가 꺾인 강진일의 모습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쪽 시청률은 어때?”

    “MBS가 18퍼센트, KBC가 15퍼센트입니다.”

    “하! 우리가 꼴찌네. <마지막 사랑> 박살 난 것도 모자라서 이젠 <역전의 정수>까지? 역전의 정수는 무슨 얼어죽을. 하나같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무슨 일이 있어도 민경우 작가를 잡아 오라고 했던 건 홍세환 국장이었건만. 그런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홍세환은 모든 잘못이 강진일에게 있는 것처럼 그를 탓하고 있었다.

    막말로 시청률이 낮은 게 강진일의 탓은 아니었지만 드라마가 한창 진행 중에 있는데 민 작가를 불러다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최무성을 불러다 따지기에도 폼은 나지 않았다.

    막말로 만만한 게 강진일이었으니 그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심정으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었다.

    “홍보팀에 연락해서 홍보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 현장 인터뷰도 하고요.”

    “그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 그나마 PPL 덕분에 제작비 구멍은 안 나겠구만. 하여간 재벌집 자식이라 그런가 그런 쪽으로 머리도 잘 돌아가. 그치?”

    “네. 근데 국장님, 최무성 일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일단 놔둬. 시청률 더 떨어져서 다른 데 신경 쓰지 못할 때 그때를 노리자고.”

    “알겠습니다.”

    강진일이 방을 나가자 홍세환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 * *

    지금껏 승승장구 활약을 펼쳤던 경우의 드라마 치고 생각보다 낮은 시청률이 나오자 ‘스튜디오 글로리’는 물론 <역전의 정수> 촬영 현장의 분위기도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한 드라마였으나 드라마 인기의 척도인 시청률에 휘둘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의 취향에 달린 문제였으니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더욱 답답했다.

    그런 현장 분위기를 알고 있던 경우는 더운 날씨에 고생하는 배우들과 스탭들을 위해 삼계탕을 마련했다.

    테이블이 펼쳐지고 유명 맛집에서 공수한 삼계탕이 차려지자 이곳이 촬영장인지 식당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한 자리를 차지한 경우의 주변으로 최무성 PD는 물론 주연 배우 송유태를 비롯한 사람들이 경우의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비교적 차분한 사람들의 모습에 경우가 입을 열었다.

    “더운데 다들 고생이 많으시죠. 하필이면 이 더운 날 사극을 하자고 해서 제가 다 죄송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사극은 겨울에 할걸 그랬습니다.”

    경우의 농담에 사람들이 살짝 웃었다. 그러자 누군가 한탄하듯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아, 우리 드라마 재밌는데. 열심히 찍고 있는데 왜 시청률이 안 오르죠?”

    “반응이 나쁜 건 아니잖아요. 곧 있으면 오르겠죠.”

    “그렇지만 관심도도 낮잖아요. 화제성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반응이 아예 없으니…….”

    스탭 중 한 사람의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옆에 앉은 사람이 그의 옆구리를 툭 치자 뭘 어쨌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스탭의 말에 사람들이 경우의 눈치를 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시청률이야 높게 나오면 좋지만 낮다고 의기소침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계시니까요. 낮은 시청률의 원인은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마시고 열심히 지금 하시는 것만큼 최선을 다해 주시길 바랍니다.”

    경우가 그렇게 말하자 안 좋은 소리를 했던 스탭의 입까지 다물어졌다.

    드라마에서 작가의 책임은 생각보다 컸다. 드라마가 잘되면 그 덕은 화려한 조명을 받는 배우에게 돌아갔지만 만약 드라마가 잘되지 않는다면 책임은 전적으로 작가에게 돌아갔다.

    그러니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경우일 텐데도 초연한 그의 모습에 누구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역전의 정수> 팀은 더욱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했다고 해도 경우 역시 초조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전 생에선 드라마화되지 않았던 터라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로섬>에 밀려 <곰과 여우 사이>의 시청률이 바닥을 칠 때 대본을 고치던 김해영을 다독이던 그였지만, 경우 또한 낮은 시청률이 대본 탓은 아니었는지 밤잠을 설쳐 가며 대본을 고치고 또 고치기 일수였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좋은 대본이 나온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으니, 스트레스는 더욱 쌓여 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경우는 뜻하지 않은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 * *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너무 오랜만이죠? 죄송합니다.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했거든요. 실은 작년에도 한국에 왔었습니다. 근데 결국 연락 못 하고 돌아간 거죠.”

    “그러셨군요.”

    재작년 겨울, 미국 드라마 제작사 ‘배드 보이 트로덕션’에 투자를 위해 뉴욕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배우 준 리차드가 한국에 왔다며 경우에게 연락을 해 왔다.

    “그런데 작년에도 오신 거라면 한국에 자주 오신 모양이네요.”

    “한국에선 썸머 베케이션에 할머니 집에 가잖아요. 그래서 저도 어릴 때 여름휴가 땐 항상 한국에 왔거든요.”

    준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복잡했던 경우의 머릿속이 정리되면서 하나둘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열심히 쓰고 있으니 때가 되면 시청률은 반등할 거라는 걸 그는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시청률에 연연해 의기소침할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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