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77화 (77/250)
  • #77. 9회말 2아웃 (3)

    대진일보의 미디어 사업부 본부장 박현호는 종편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가던 중이었다.

    물론 형식적인 준비였을 뿐 사업자 선정은 거의 다 된 거나 다름없었기에 박현호는 개국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드라마였다.

    그냥 구색 맞추기라고 하기엔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박현호는 종편에 대한 사람들의 안 좋은 이미지는 잘 만든 드라마로 충분히 역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드라마국에 사활을 걸고 있었는데…….

    그런 야심으로 스카우트한 김경진 작가와 정해용 감독의 작품이 시작부터 흔들리다 못해 논란까지 만들어 내니 죽을 맛이었다. 아직 유니언 스튜디오를 자회사로 편입하지 않은 덕분에 불똥은 SBC나 유니언 스튜디오로 향해 다행이었다.

    하지만 방송국에서 받은 제작비는 한정되어 있는데 현대극이 아니다 보니 돈은 하염없이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런 불만이 쌓이고 있었으니 보고를 하는 서필진의 입장도 편하지는 않았다.

    “서 과장. 그래, 필진아. 도대체 돈 먹는 하마도 아니고……. 이 두 사람 데리고 오자는 거 누구였냐?”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콤비라 불리면서 대박작을 많이 만들어 냈고 신작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유출된 상황에서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기에 승산이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래. 인재가 있으면 일단 모으라고 한 건 나지. 내 탓이지. 근데 왜 지금까지 잘나가다가 하필 이제 와서 우리 유니언 스튜디오로 와서 이러는 거냐고?”

    “죄송합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야. 너한테 하는 소리 아냐. 그보다 오 대표는 뭐래?”

    “이번 논란만 아니었다면 평타를 쳤을 거라고 합니다. 유니언 스튜디오가 잘나가다 보니 시기심에 일부러 논란을 부추긴 거라고 차라리 조기 종영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기 종영은 안 돼. 우리가 무슨 죄 졌어? 괜히 조기 종영했다가 잘못 수긍하는 꼴밖에 안 돼. 어차피 논란 만들어 낸 놈들도 그거 바란 거잖아. 일단 끝까지 밀어붙여. 논란은 해프닝으로 만들어 버리고.”

    “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송지현을 데리고 올걸 그랬어.”

    “하지만 송 작가도 만만치 않은 성격입니다. 지상파에서도 서로 모셔 가려고 아우성인데 종편 드라마 거절할 게 분명합니다.”

    “종편이 어디가 어때서? 방송이 다 똑같은 방송이지 등급이라도 매겨졌대? 하여간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아서는……. 돈 두 배로 준다고 해. 어차피 돈이면 안 되는 게 어딨어. 그래, 차라리 송지현 정도 되는 사람이 우리 채널 DBN 개국 드라마를 쓴다고 하면 괜찮은 그림이 되겠어. 그러니까 어떻게든 데려와.”

    “알겠습니다.”

    박현호의 방에서 나온 서필진은 꽉 조인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박현호는 쉽게 말했지만 생각보다 송지현의 자존심은 센 편이라 그녀를 데리고 오는 건 힘들 게 분명했다. 어차피 방송국에서도 서로 모셔 가려는 작가라 딱히 제작사에 소속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이번 드라마가 잘되었으면 아무 문제없었을 것을.

    턱 밑까지 추격해 온 ‘내일 프로덕션’에 한 방 먹이려 그쪽 소속 작가와 감독을 스카우트했는데 공교롭게도 스카우트하자마자 남 좋은 일만 시킨 꼴이 되어 버렸다.

    지난해 법률이 개정된 후 내년 하반기 방송 서비스를 개시하기 위해 최근 눈 코 뜰 새 없이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드라마 폭망은 솔직히 타격이 있었다.

    서필진은 지난번 경우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지금이야 ‘유니언 스튜디오’가 업계 최고죠.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저희는 드라마와 영화에 관한 건 모두 다 취급할 겁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미국 드라마 제작도 지원하는 중에 있습니다. 괄목할 만한 성과도 얻었구요.]

    [저보고 배신을 하라는 소립니까?]

    [배신이라니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회사로 옮기는 건 이직입니다. 저희 스튜디오 글로리는 해외 사업부를 따로 신설할 계획입니다. 미국 드라마 제작 지원에만 그칠 건 아니죠. 아시아에선 이미 한국 드라마의 위상이 가장 높습니다. 그렇다고 한국 드라마를 내다 파는 일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죠. 아시아의 다른 나라 드라마 제작은 물론 미국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미국통인 서필진 씨가 함께했으면 하는 거구요,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종편 방송을 앞두고 예민해진 탓인지, 처음 자신이 생각했던 박현호의 모습과 실제 일하는 모습이 달랐던 차에 경우의 제안은 서필진을 상당히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이렇게 된 거 톡 까놓고 말씀드리죠. 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사표 내려고 했습니다. 회사에선 저 같은 사람 안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저와 같이 일하시면 그 피해가 작가님께도 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담담한 경우의 반응에 놀란 건 최무성이었다.

    “근데 그게 문제가 될까요? 저는 SBC에 최무성 PD님과 같이 일하고 싶다고 콕 집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승낙했구요. 어차피 드라마를 판단하는 건 시청자들입니다. 문제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하, 하지만…….”

    “걱정 마세요. 감독님은 드라마 연출에만 신경 쓰십시오. 드라마 외적인 문제는 저희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경우의 태도에 최무성은 어쩐지 그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이 사람과 함께 일한다면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일만 하면서 지낼 수 있을 거란 생각.

    특히나 ‘스튜디오 글로리’ 안으로 들어온 이후 보았던 사람들의 편안한 얼굴이, 일하는 환경이 얼마나 좋은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다들 편안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최무성은 경우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실로 오랜만에 드라마 회의라 접하는 그의 마음도 남달랐다.

    영화는 감독놀음, 드라마는 작가놀음이라고 하더니 이미 기획안에서부터 느껴지는 촘촘한 짜임새에 최무성을 혀를 내둘렀다. 그와 동시에 이 작품을 제대로 연출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끓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최무성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우의 사무실로 김강철이 들어왔다.

    “왔냐?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내가 누구냐. 그 정도는 껌이지.”

    김강철은 가지고 온 가방 속에 경우가 부탁한 서류들을 꺼내 내밀었다. 한 장 한 장 들여다본 경우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네 예상대로던데. 참 많이도 받으셨더라고. 설날 선물만 2,000만 원어치란다. 거기다 그 CP도 야외비라는 명목으로 매달 200만 원씩 받았더라고.”

    “이거 어떻게 알아낸 거야?”

    “어쩌다보니 그쪽 직원하고 좀 아는 사이라. 여차하면 뒤 봐주겠다고 하니까 술술 불더라고. 제작사라고 방송국에서 얼마나 갑질을 당했겠어? 아주 정이 똑 떨어진 것 같던데?”

    “자료는 확실하게 챙겼지?”

    “당연하지. 법적인 것까지야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보를 받았으니 이 정도면 수사 들어가고 죗값 받는 건 시간문제 아냐. 어떡할래? 시작할까?”

    “일단은 기다려. 어차피 저쪽에서도 그냥 일을 맡기진 않았을 거야. 최 PD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데 뭐든 엮어서 내보내려 하지 않겠냐. 그게 뭔지는 알아야지. 역으로 이용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원래 받은 건 꼭 되갚아 주는 편이라.”

    “근데 뒷돈 문제가 이 사람한테만 한정된 것도 아니고, 털어 보려면 그 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해? 괜히 방송사와 적을 두면 좀 그렇지 않아?”

    “내 스타일 몰라?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알지. 아는데-.”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아. 차라리 최무성을 우리 제작사에 스카우트하면 쉬운 문제라는 것도. 그런데 어차피 방송국과 제작사는 갑을관계야. 그쪽에서 최무성이 싫다고 하면 어차피 제작사로 옮겨도 별 의미가 없어.”

    “그거야 그렇긴 하지.”

    “속은 또 좁은 놈들이라 자기들 손에서 끝나지 않을 거야. 다른 방송사에서도 말해서 최무성이 아예 이쪽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

    “무슨 죄인 났다고 그렇게까지 해?”

    “그런 사람이 또 나오면 안 되니까. 아예 싹을 잘라 버리려는 거야. 그러니 단순히 일터만 바뀐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란 거지. 솔직히 잘못한 게 뭐 있다고 그 사람이 나와야 하는 건데? 정작 나가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잖아.”

    “그래서 이 기회에 그쪽을 쫓아내려고?”

    “가능하다면. 참, 만약에 홍세환 국장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누가 그 자리에 들어갈까? 노리는 사람들이 많겠지? 이왕이면 최무성한테 우호적인 사람이 들어갔으면 싶은데.”

    “내가 알아볼게. 듣자 하니 지난번 그 일 때문에 최무성만 그 꼴이 난 게 아니더라고. CP하나가 지방으로 발령 났다고 하던데?”

    “지방 발령? 지방 방송국은 드라마 제작 거의 안 하잖아. 기껏 해 봐야 지방 촬영 지원하는 것밖에 없을 텐데. 그래도 용케 그만두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네.”

    “네 말대로 달리 갈 곳이 없었겠지.”

    “그 사람이 국장 되면 최무성 PD도 방송국을 나갈 필요는 없는 거겠지.”

    “아무래도. 근데 방송국 국장을 갈아치울 정도가 돼? 네 능력이?”

    “당연히 안 되지.”

    “근데 뭘 될 것처럼 말하고 있어?”

    “되게 만들 거니까. 인맥이라는 건 그래서 필요한 거란다.”

    그의 말에 김강철이 의아했지만 경우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쨌든 쫓아낼 다른 명분이 있는 지 더 찾아봐 줘.”

    “오케이.”

    “고맙다.”

    “별소릴 다 한다.”

    김강철이 그렇게 사무실을 나가자 경우는 전화를 들었다.

    “네, 강 검사님.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저녁이나 하시죠.”

    김강철의 말을 떠올리며 경우는 생각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다 알고 있어도 혼자의 힘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경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우면 언젠간 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법. 원래 삶이란 그런 거니까.

    * * *

    재경그룹 손주옥 여사의 외손녀인 강희주와 만난 건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서로의 맞선을 저지할 명분으로 만남을 이어 가고 있었지만 각자 일이 바빴던 차에 만남은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 여사님은 잘 지내시나요?”

    “그럼요.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세요. 운동도 얼마나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데요. 아마 팔씨름하면 저보다 힘이 세실걸요.”

    처음 만남에 악수를 나누며 손 여사의 악력에 눌렸던 경우는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죄송해요. 지난번 시사회 초대도 해 주셨는데 참석 못 했어요.”

    “아닙니다. 중요한 나랏일을 하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살인범이 잡혀서요. 뉴스 통해서 들었습니다. 브리핑 잘하시던데요?”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서 참 뿌듯한 순간이죠. 나쁜 놈 잡으면 이제 밥값 했다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강희주는 그제야 연락도 뜸한 경우가 자신을 불러내 밥까지 먹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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