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76화 (76/250)
  • #76. 9회말 2아웃 (2)

    잠시 망설이던 강진일은 이내 결심이 섰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최무성 PD를 지목하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네? 이유라니요? 최무성 PD님은 혹시 안 됩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은 경우의 얼굴에 뜨끔한 강진일을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건 아니고. 사실 최무성 PD가 그렇게 잘나가는 PD는 아니잖아요. 최근에 드라마를 했던 것도 아닌데 다른 인기 많은 PD가 아닌 최무성 PD를 찾으셔서 이유가 궁금했던 것뿐입니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본 경우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강진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영문을 모르는 강진일은 침만 꿀꺽 삼켰다.

    “어디가서 제가 이런 이야기하지 않는데요.”

    “……네.”

    “실은 얼마 전에 점을 봤거든요. 근데 다음 작품은 무조건 이름에 ‘ㅁ’과 ‘ㅊ’이 들어가는 사람과 해야 한다고 해서요. 찾아보니까 저희 회사에도 그런 이름은 없고 마침 SBC에 최무성 PD님이 계시더라구요.”

    “예?”

    다소 황당한 이야기에 잔뜩 긴장한 강진일은 어이가 없었다.

    “당황스러우시죠? 근데요, 이게 그냥 흘려들을 수는 없는 일이라. 실은 저희 할아버지께서 큰 돈을 벌고 결국 ‘새명’을 그룹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용한 무속인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거든요.”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경우의 이야기 솜씨 때문이었는지 강진일은 그의 이야기에 서서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재벌들도 점을 본다니, 이것 참…….”

    “재벌이라고 별거 있나요. 앞날이 궁금한 건 다들 마찬가지죠. 점도 보고 부적도 씁니다. 관재수가 있다고 하면 굿도 하고 정기 인사철에 관상을 보기도 합니다. 물론 무속인의 말만 듣고 큰일을 벌어진 않지만 조심을 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 하지 말라는 짓 했다가 큰일을 당한 적이 있어서 나쁜 이야기엔 조심하는 편이죠.”

    하긴, 유명 정치인 중에는 용한 무속인을 신봉하는 이들도 있다는 소문도 있는데 재벌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처음엔 미심쩍어하는 강진일도 차츰 경우의 이야기에 수긍했다.

    “그 신령님이 그러더라구요. 이름에 꼭 ‘ㅁ’과 ‘ㅊ’이 들어간 사람과 일을 해야 사고가 안 나고 대박이 난다구요. 그래서 제가 지난 드라마에선 우재환 배우를 적극 추천했던 거 아닙니까? 그땐 ‘ㅈ’과 ‘ㅎ’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거든요.”

    “아, 그래서 그렇게 신인 배우를…….”

    다름 아닌 경우가 우재환을 적극 추천했다는 소문은 강진일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랬다면 아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그냥 드라마가 잘된다는 말만 있었으면 모를까, 그 사람이 아니면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잖아요. 이왕이면 나쁘다는 건 피하고 봐야죠. 재작년 MBS 사고 나서 결국 방송 중단됐잖습니까?”

    “그렇죠.”

    “괜히 안 따랐다가 꺼림칙해서 일에 몰입하지 못하면 큰일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근데 최무성 PD님은 혹시 안 됩니까? 그럼 드라마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강진일의 얼굴을 보며 경우는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물론 경우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다만 윗선에 찍힌 최무성을 콕 집어 같이 일할 핑계가 필요했을 뿐.

    어차피 저들은 재벌의 실상을 모른다. 그러니 경우가 하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사람들은 정교하게 잘 짜인 이야기보단 터무니없는 황당하고 허술한 이야기에 넘어갈 때가 많았다. 그게 사실이라 다른 설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긍을 하는 강진일의 얼굴을 보니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잠시 생각에 잠긴 강진일을 보며 경우는 이전 생의 일을 떠올렸다.

    고명희의 작업실로 심부름을 오던 FD와 퇴근 후 작업실 근처에서 치맥을 하고 있을 때였다. 손님이 몇 되지 않은 작은 가게 안에서 주인을 유심히 보던 FD는 작은 소리로 은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 주인 말이야, 예전에 SBC 드라마 PD였던 거 알아?’

    ‘네? 드라마 PD요? 그런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잘린 거지.’

    ‘뭐 사고 쳤대요?’

    ‘그런 게 아니라 찍힌 거야. 너도 알다시피 이쪽 일이 좀 빡세? 날밤 새는 건 기본이고 방송 시간 쫓겨서 방송 당일에도 쪼개서 편집해 겨우 방송 내보내고 그러잖아. 방송 사고 날 뻔한 것만 몇 번이야. 아니, 방송 사고 난 적도 여러 번이지.’

    ‘저도 가끔 보면 조마조마해요. 사전 제작을 하면 좋을 텐데.’

    ‘그걸 모르겠냐? 사전 제작 좋지. 근데 그렇게 하는 거 쉽지 않아. 막말로 돈 들여서 다 찍어 놨는데 폭망하면 어떡해. 반응 봐 가면서 조절하는 거지. 어쨌든 그렇게 빡세게 일하던 조연출 하나가 과로로 죽었다는 거 아냐.’

    ‘예? 정말요?’

    ‘이쪽에선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냐. 그래서 여기 주인이 이대로는 안 된다, 제작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그렇게 항명하다 짤렸다는 거 아냐. 이쪽에선 유명한 일화야.’

    ‘좀 그렇네요. 문제가 많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근데 어차피 높은 자리에 앉으신 분들이 신경이나 쓰겠어? 그런 사람들한테 말단은 그냥 소모품이나 마찬가지니까.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와서 일할 사람 천진데 신경이나 쓰겠냐. 배우들 개런티는 갈수록 높아지고 광고 수익은 예전 같지 않으니 어떻게든 제작비 아끼려다 그러는 거잖아.’

    좁은 가게 한쪽에서 치킨을 튀기고 손님에게 가져다 줄 맥주를 따르던 최무성을 떠올린 경우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방송 일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 길로 방송국으로 들어간 강진일은 국장인 홍세환을 만나 경우와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

    “네. 국장님도 아시잖습니까. 큰일 앞두고 무당 찾아가는 정치인들 많다면서요. 재벌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 무당이 누구래? 나도 찾아가 보고 싶네. 안 알려 주겠지? 그렇게 용한 사람은?”

    “재벌들만 상대하는 무당인데 복채도 상상 이상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홍세환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건 그렇고 뭔가 아는 눈치거나 그렇진 않아?”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뒤로 계속 지난번에 봤던 점괘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데 완전히 그쪽으로 신봉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 겉만 보곤 모른다더니……. 그래서? 점괘는 뭐라고 나왔는데? 드라마 흥행은 한다고 했대?”

    “그렇다던데요.”

    “이번엔 반드시 성공해야 해. 안 그래도 지금 그 <마지막 사랑> 때문에 우리 이미지가 완전 바닥이라고. 다른 것도 아니고 친일 논란이 뭐야, 친일 논란이!”

    “그럼 민 작가 요구를 들어주실 겁니까?”

    “그쪽에서 그렇게 원하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최무성 연락해 봐.”

    “그러다 드라마 대박이라도 나면 최무성한테 면죄부를 주는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닙니까? 민 작가한테는 다른 핑계를 대고 최무성이 나갈 때까지 더 압박하면-.”

    “지금까지 지켜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그런 대접을 받고도 3년이나 버티고 있던 놈이야. 절대 제 발로는 걸어 나가지 않을 거라고. 일을 하지 않으니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면 방법은 일을 시켜서 명분을 만들어 쫓아내는 거밖에 없지 않은가.”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드라마 시청률 추이 봐 가면서 적당한 시기에 문제 만들어 쫓아내 버려.”

    “민 작가가 가만히 있을까요?”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거야? 드라마 찍다 보면 별문제가 다 생기는데 어차피 방송국에서 책임진다 치고 최무성 짤라 내면 이해하지 않겠어? 듣자 하니 드라마 쓰는 거 말곤 허술한 위인 같아. 그러니 재벌가에서 작가나 하고 있는 거 아냐.”

    “근데 그렇게까지 최무성이를 내보내야 할 필요 있을까요?”

    “그런 눈엣가시 같은 놈들은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인다는 본보기로 써야지.”

    “알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최무성 반드시 쫓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면 어떻게 되는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게 해 주라고. 그래야 다른 놈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아. 하여간 유별나도 너무 유별나.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갔을 거 아냐.”

    “네, 국장님.”

    국장실을 나온 강진일은 곧바로 최무성에게 전화를 넣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최무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아예 출퇴근은 자네 맘대로 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춤주춤 주머니에서 사표를 꺼내려던 그를 강진일이 저지했다.

    “됐고, 내 이야기 먼저 들어.”

    최무성은 하는 수 없이 사표를 집어넣고 강진일의 입을 쳐다봤다.

    “드라마 하나 맡게 될 거야. 민경우 작가라고 자네도 알지? 재작년 MBS 대박작 쓴 작가.”

    “…….”

    “그 작가가 자네와 같이 일해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우선 한번 만나 봐.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거야. 그러니까 잘해. 알았어?”

    공교롭게도 염대희의 납골당에 다녀온 날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강진일의 꿍꿍이를 알지 못했던 최무성은 이 모든 게 염대희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무성은 강진일의 지시에 따라 일단 경우를 만나기 위해 ‘스튜디오 글로리’로 향했다.

    * * *

    “그런 생각 해 보지 않으셨어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아주 먼 과거로 돌아가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한다든가 불행한 역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바꾼다든지 하는 거 말입니다.”

    신생이라더니 마포에 큰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는 ‘스튜디오 글로리’에 간 최무성은 건물에 비해 소박한 경우의 사무실에 앉아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작가님 드라마는 모두 현대극이었는데 갑자기 사극을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현실에 적당히 엿을 먹일 수 있잖아요.”

    “네?”

    “현실은 참 버겁고 쉽게 바뀌지 않죠.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 겨우 관심을 가지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딱히 바뀌는 건 없는 것 같고……. 그런 세상에 큰 엿을 날려 보고 싶단 생각, 안 해 보셨어요?”

    시간 여행을 소재로 쓰는 이유 중 하나는 현실 풍자에 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현실의 문제가 다른 시대에도 이어진다. 현실에선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니 다른 시대라는 점을 빌려 현실의 불합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이번 드라마는 과거 고명희에게 까인 드라마였으니.

    ‘네가 사극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사극은 현대극보다 배는 어려워. 아무나 데려다가 한복만 입힌다고 다가 아냐. 남자들은 수염도 붙여야 하고 전에 어떤 시청자는 여배우 귀에 귀걸이 구멍 안 막았다고 뭐라 하더라. 그만큼 복장 하나에도 까다로운 장르라고. 그러니 돈은 좀 많이 들어? 괜히 특별 기획이 붙는 게 아냐. 시청률이 어느 정도 보장된 사극 전문 작가한테 맡기는 건 결국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가 구성한 작품들 중 이전 삶에서 드라마로 만들지 못한 유일한 작품이었다. 그러니 경우에겐 아픈 손가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꼭 성공하고 싶었다.

    거기다 때로는 현실을 고발한 영화나 소설이 사회를 바꾸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경우는 그 힘을 믿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눈앞에 있는 최무성과 함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경우의 이야기를 들은 최무성이 입을 열었다.

    “근데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저는 사극을 찍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근데 왜 접니까? 듣기론 작가님께서 저를 선택했다고 하던데요.”

    최무성의 질문에 경우는 살짝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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