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9회말 2아웃 (1)
“여보, 일어나. 출근해야지.”
출근을 재촉하며 깨우는 아내의 목소리에 최무성은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켰다. 지난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겨우 얼굴에 물만 묻히고 부엌으로 가 보니 중학생 아들 녀석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아침 먹냐?”
“네.”
“…….”
사춘기인지 요즘 부쩍 말수가 줄어든 아들 탓에 최무성은 쉽게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뭐라 말을 하려다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아들에게 딱히 할 말도 없는 탓이었다.
아내가 끓여 준 콩나물 국을 시원하게 들이켜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마침 약수터에 운동 겸 갔다가 물병 가득 약수를 떠 오신 부모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냥 운동만 하고 오시지 뭐 하러 물은 자꾸 떠오세요?”
“거기까지 가서 그냥 오기 아깝잖아.”
“요즘 정수기 잘 나와서 정수기 물도 좋아요. 무릎도 안 좋으신데 그냥 쉬엄쉬엄 산책만 하고 오세요.”
“알았다. 근데 아범은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고 다녀? 그러다 속 버려.”
“아, 바깥일 하다 보면 남자가 술도 마시고 그럴 수 있는 거지.”
“누가 몰라요. 그러다 애 몸 상할까 싶어서 그러죠.”
“애는 무슨. 옛날로 치면 손주를 봤을 나이야.”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예요. 자식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다고요.”
“임자나 걱정해. 아범이 보기에 임자가 오히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지. 잘못 넘어지면 그대로 저승길이야. 알어?”
“하여간 영감탱이 말이나 못하면……. 그나저나 어멈아, 둘째는 아직도 안 일어난 거냐?”
“아까 2층 올라가 봤는데 도련님 아직 주무시고 계시더라구요. 깨우지 말라고 하셔서 그냥 뒀어요.”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할 텐데.”
“아, 놔둬. 나잇살 먹고 방구석에 저러고 처박혀 있는 놈 뭐 이쁘다고 밥까지 먹여?”
“저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어요?”
“그러게 멀쩡하게 잘 다니고 있는 회사를 왜 때려치우냐 말이야? 내쫓기 전까진 엉덩이 딱 붙이고 붙어 있어야지. 그랬으면 다달이 월급은 나올 거 아냐. 하여간 처자식이 없으니 철이 덜 들어서 저 모양이지.”
“사업한다잖아요. 사업 구상을 하느라 밤잠도 설치는 거죠.”
“사업은 뭐 아무나 해? 임자가 그렇게 자식을 감싸고 도니까 애가 제 앞가림도 못 하는 거야. 회사 그만뒀다고 했을 때 다리몽댕이를 분지르던지 집에서 쫓아내든지 둘 중 하나는 했어야 하는데, 원.”
“다녀오겠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토닥거림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최무성의 아들이 집을 나서자 민망한 듯 멋쩍게 웃던 노부부는 손주의 등굣길을 배웅했다.
“그래, 우리 강아지. 학교 잘 다녀온.”
“차 조심하고.”
괜히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노부부에게 출근 준비를 마친 최무성이 다가갔다.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아범. 차 조심하고 일 열심히 해.”
“근데 요즘 드라마는 안 찍는 거냐? 노인정 영감탱이들이 아범이 하는 드라마는 언제 나오냐고 하도 성화야.”
“……저기, 그게…….”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말해 줄까. 하여간 영감탱이들 남의 아들 하는 일이 뭔 관심이래요.”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전에 아범이 그랬잖아요. 방송국에 일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 사람들 다 돌아가면서 한 번씩 하려면 오래 걸린다고요. 여편네들 모여서 이러쿵저러쿵 한다더니만 알고 보면 영감탱이들이 별소리를 다해. 남의 아들 걱정 말고 자기 아들들 걱정이나 하라고 그래요.”
“뭘 그렇다고 그렇게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나?”
“지난번에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그렇죠.”
남들이 보기엔 싸우는 거 같아도 나름 사이가 좋은 부모님을 보며 최무성은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 번 더 한 뒤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렇게 대문을 나서던 최무성은 자신의 집을 돌아봤다.
대학 때 이사를 온 덕에 지금은 낡고 손볼 곳이 많은 은평구의 2층 단독주택.
아내는 부모님 아직 건강하실 때 단 몇 년만이라도 아파트로 분가해 세 식구만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지만 최무성은 아직 그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건 물론, 고등학교, 대학교, 거기다 결혼까지 앞길이 창창한 아들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회사를 때려치우고 몇 달째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하나뿐인 동생까지 책임져야 했다.
이 집에서 생계를 담당하고 있는 건 오직 그 하나뿐이었고 그마저도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대출을 갚을 능력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다. 거기다 부모님께 분가하겠다는 말씀을 드릴 자신도 없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한 최무성은 곧장 지하철로 향했다. 그러고는 평소 가는 방송국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가 지하철에 올랐다.
* * *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다시 마을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제법 오래 걸리는 경로였지만 최무성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경기도의 한 추모 공원.
납골당 건물 안으로 익숙한 듯 들어간 최무성은 어느 한 곳에 이르자 걸음을 멈췄다. 그곳엔 젊은 남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잠시 사진을 보던 최무성이 한숨을 토해 내듯 입을 열었다.
“잘 있었냐, 이 썩을 놈아? 거기서 너 혼자 참 속 편하다, 이거지?”
사진 속 남자의 이름은 염대희. 바로 최무성의 직속 후배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년 전. 조연출을 맡았다며 좋아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 버렸다.
잠시 사진을 내려다보던 최무성은 마음 정리를 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 회사 그만둘 거다. 어차피 회사에 가 봤자 나를 반겨 주는 사람 하나 없어. 나 완전 왕따야.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는데…… 이만큼 버텼으면 됐지.”
그러자 그의 귓가에 염대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바로 어제 일마냥 떠올랐다.
‘아, 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진짜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만날 그 소리. 사람들이 하는 3대 거짓말 있다면서요. 할머니들이 어서 죽어야지 하는 거랑 처녀가 절대 시집 안 간다는 소리랑 직장인들이 때려치운다는 소리 이 세 가지요. 어차피 하지도 못할 거 그냥 참으세요. 남의 돈 벌어먹기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나 그냥 하는 소리 아냐, 봐. 안주머니에 사표 있는 거. 직장인들은 이렇게 양복 안주머니에 항상 사표 써서 품고 다닌다고.’
‘꼭 드라마 대사 같네요. 직장인들은 누구나 가슴 속에 사표를 품고 다닌다. 근데 그건 일종의 신경 안정제 같은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난 진짜 여차하면 사표 낼 거라고.’
‘사표 내면 뭐 먹고사시려고요?’
‘뭘하긴. 퇴직금 받은 걸로 치킨집 차려야지 별수 있냐? 내가 모아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진 거라곤 마이너스 통장밖에 없는데.’
‘그걸로 다섯 식구 어떻게 먹고살아요? 아무리 치킨을 튀겨 봤자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만 하겠어요?’
‘그래도 속은 편할 거 아냐?’
‘그러다 망해서 퇴직금도 달랑 말아먹으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집 담보로 대출받아서-.’
‘선배님, 확실히 알아보세요. 이미 집 담보로 대출받았을지도 몰라요.’
‘누가?’
‘누구든요. 집 있다고 방심했다가 몰랐던 대출이 나와서 풍비박산 나는 거 참 많이 봤네요.’
‘뭐야, 이놈아? 악담을 해라, 악담을.’
그런 농담을 하며 웃어 넘겼는데 비보를 들은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폭염과 무리한 스케줄에 드라마 촬영을 이어 가던 그는 결국 방송국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얼마 못 가 숨이 끊어졌다. 사인은 뇌졸중, 과로사였다. 이제 겨우 서른 중반의 염대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최무성은 염대희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게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했다. 불합리한 시스템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그렇게 무리하게 드라마를 만들었고 그 역시도 그런 식으로 일해 왔었다.
어렵고 힘든 일은 새로 들어온 후배들에게 떠넘겨졌고 말단 직원들의 희생으로 드라마를 만들면 그 성과에 대한 보상은 주로 CP들이 챙겼다.
최무성이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낸 건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고 그는 소위 말하는 윗선에 찍혀 결국 누구도 그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같은 꼴이 날까 주변 사람들조차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최무성은 고해성사 아닌 고해성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알아. 이쯤 되면 내 발로 걸어 나가라는 거지. 내쫓을 명분은 없으니 이런 식으로 압박하는 게 원래 회사 대가리들 수법이잖아. 세상을 바꿔 보고 싶었는데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하다, 대희야.”
늘 가슴속에 사표를 품고 다녔지만 가족을 생각해 이만큼 버텼다.
“그래도 이만하면 오래 버틴 거 아니냐?”
이제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던 그는 자조하며 마지막으로 염대희에게 허락을 구하듯 말하고는 추모 공원을 나섰다. 그리고 바로 그때, 최무성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 * *
경우가 내민 기획안을 살펴보던 SBC 강진일 CP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건 그저 드라마를 설명하는 시놉시스가 아니었다. 아예 국장에게 바로 제출해 결재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기획안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확 당기는 게 대박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도 있었으니.
“사극이네요?”
“네. 하지만 보셔서 아시겠지만 전통 사극은 아닙니다. 퓨전 사극이죠.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갈 거니까요.”
“트렌디한 퓨전 사극이 종종 있기는 했었습니다만. 괜찮을까요? 사실 퓨전 사극으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탓도 있어서요.”
“CP님이 보시기엔 어떤가요? 이 드라마, 재미없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민 작가님 드라마야 늘 재미를 보장하죠.”
첫 작품인 <셀룰러 메모리>로 ‘대형 신인’이란 별명을 얻은 경우는 미니 시리즈 종영 이후 곧장 단막극을 선보였다. 단막극의 인기가 갈수록 떨어지는 와중에 두 자릿수 시청률은 그야말로 경이적이었다.
거기다 박종연 감독의 칸 노미네이트 작품의 원작자가 그였으니 짧은 경력에 비하면 타율이 높은 작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데리고 와야 한다는 홍세환 국장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그를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저 조금 걱정되는 것뿐입니다. 현재에 있던 사람이 과거로 갈 수 있는 시간 통로를 발견하고 역사를 바꾼다. 충분히 흥미는 있지만 잘못 표현했다가는 고증이 엉망이라며 먹잇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을 섭외했습니다.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한 이야기라면 시청자들도 납득하지 않을까요? 시청자 게시판에 그런 역사학자들의 의견도 자료로 제시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확실히 그렇게 한다면 충분한 대비책은 되겠군요.”
“네. 거기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PPL이요, 사극은 원래 PPL이 한정적이잖아요.”
그의 말에 강진일이 손뼉을 짝 부딪쳤다.
“확실히 그렇게 하면 현대에서 PPL을 다 넣을 수 있죠. 그럼 제작비는 충분히 뽑을 수 있을 테고요. 그런 걱정은 저희가 했어야 하는데…… 어쨌든 기획안은 아주 좋습니다. 이대로 제출해도 통과가 될 정도로요.”
경우는 그제야 환하게 웃는 강진일을 보며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다.
현재 SBC에서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마지막 사랑>이 폭망하고 있는 탓이었다.
김경진 작가와 정해용 감독 콤비가 맡고 유니언 스튜디오가 제작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첫 방 시청률 15퍼센트로 무난히 시작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떨어지는 시청률에 친일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지금 시청률은 4퍼센트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제작비는 제작사인 유니언 스튜디오에 일부 떠넘기긴 했으나 갈수록 나빠지는 여론, 거기다 드라마 앞뒤로 붙는 광고까지 떨어진 마당이라 조기 종영도 고심하는 중이었다.
그런 차에 경우의 기획안은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대안처럼 보였으니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일단 국장님께 의논드려 보겠습니다. 제가 국장님 잘 아는데 분명 오케이 하실 겁니다.”
“네, 연락 주세요.”
“물론 제작은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맡아서 하실 거죠?”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희야 좋죠. 그보다…….”
“네, 말씀하세요.”
“지난번에 말씀해 주셨던 대로 혹시 제가 PD님 추천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혹시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 PD님이십니까?”
“아닙니다. SBC 소속 PD님이세요. 최무성 PD님요. 그분과 같이 하고 싶습니다.”
경우의 이야기를 들은 강진일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