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74화 (74/250)
  • #74. 나비효과 (5)

    “내가 거길 왜 가야 하는데? 걔는 사람 염장 지르려고 환장했대? 지가 왜 나를 초대해? 어?”

    “네, 전무님 말씀대로 민 대표가 염장 지르려고 전무님 초대한 게 분명합니다. 그래도 가야죠, 회장님께 속이 뒤틀려서 안 간다고 할 순 없으니까요.”

    “뭐?”

    비서의 말에 장석제는 눈을 부라렸다. 순간 쫄기는 했지만 눈앞의 다혈질인 전무보다 그는 회장이 더 무서웠다.

    “일단 가시죠. 국회의원에 국토부 장관까지 온다지 않습니까. 이 기회에 눈도장 찍고 다음 사업은 우리 쪽에서 가지고 와야 할 것 아닙니까? 어차피 이런 사업이 이번으로 끝나는 건 아니니까요. 지금은 납작 엎드리고 기회를 노려야죠.”

    “누가 그걸 몰라! 에휴, 내가 자존심 상해서 그러지. 그래, 좋다. 가 보자. 까짓것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내가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볼 거야. 그래서 우리한테 사업권 안 넘긴 놈들 다 후회하는 거 지켜본다, 내가! 차 대기시켜.”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쉰 비서는 저 변덕쟁이가 또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고정시에 새로 들어설 새명유통의 복합 쇼핑몰 기공식이 열리고 있었다.

    고정시 국회의원 한석인은 물론 국토부 장관을 비롯해 새명 그룹의 회장인 민홍준까지 참석했다.

    상기된 얼굴로 단상에 올라 청사진을 그리는 민지선의 모습을 보며 하품을 겨우 참은 장석제는 따분한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길 바라며 성의껏 박수를 쳤다.

    마침내 식이 끝이 나자 장석제는 그곳에 참석한 이들에게 누구보다 더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 적극 나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안 올 줄 알았더니 용케도 와서는 인사하고 다니는 폼이 완전 정치인이 따로 없네요. 후계 자리에서 밀려나서 혹시 정치하려고 저럴까요? 하여간 비위도 좋아.”

    장석제의 모습에 투덜대는 민지선을 향해 박 실장이 답했다.

    “실속을 챙기겠다는 거겠죠. 어차피 경기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사업은 계속 할 테니까요. 다음 위한 준비 아니겠습니까?”

    “나도 그렇지만 쟤도 그러고 보면 참 열심히 살아요, 그쵸? 이해는 하겠는데 남의 잔칫집 와서 저러는 건 너무 그렇다.”

    약이라도 올려 주려 장석제에게 다가가던 민지선은 한 남자에게 가로막혀 버렸다. 바로 고정시 의원인 한석인이었다. 한석인이 먼저 장석제에게 알은체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장 전무님을 만나 뵐 줄은 몰랐군요.”

    “안녕하셨습니까, 의원님.”

    “집사람한테 들었습니다. 집사람이 소장하고 있던 백자를 아주 고가에 낙찰받으셨다구요.”

    “네, 그…… 작품이 워낙 마음에 들기도 했고 좋은 일에 쓰인다고 해서…….”

    “이거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덕분에 집사람 체면이 산 것 같아 제가 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좋은 일에 쓰기 위해 선뜻 내놓은 사모님의 뜻이 더 훌륭하죠.”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요. 사실 그 도자기, 저희 가족과 오랜 인연이 있는 주경도 명인이 저와 제 아내의 결혼 기념일 선물로 준 작품이죠.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아주 값진 물건입니다.”

    “아, 네…….”

    “어찌나 감사하던지. 그런데 좋은 일에 그보다 더 귀한 물건이 없냐며 선뜻 내놓는 아내의 모습에 제가 다 감동했죠.”

    “그, 그러셨군요…….”

    “저는 그래서 장석제 전무의 안목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 제가요?”

    “작품을 볼 줄 아는 그 눈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그래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이죠?”

    “의원님 부탁이면 뭐든 들어드려야죠.”

    “감사합니다. 한 달 후면 주경도 명인의 작품 전시회가 영국에서 열린답니다. 그래서 그때 장 전무님이 소유하고 있는 그 도자기도 함께 전시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좀 빌려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네?”

    “아, 물론 내키지 않는다는 거 잘 압니다. 예술품을 수집하는 분들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걸 싫어한다는 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한국 도예가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닙니까? 그러니 도움을 주십사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하필이면 이미 깨 버린 도자기를 빌려달라는 한 의원의 부탁에 장석제는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2억 9천만 원이나 주고 산 도자기를 화가 나서 깨 버렸다고 할 수 없고 빌려줄 수 없다고 하면 속 좁은 인간이 되고 마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민지선은 장석제가 곤란해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은근하게 박 실장에게 물었다.

    “한 의원은 알고 저러는 걸까요, 모르고 저러는 걸까요?”

    “글쎄요. 저희 쪽에선 이미 소문이 퍼져 있지만 그쪽까지는 아마 전달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고 그런 걸 수도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곤란한 걸 콕 집어 말하는 걸 보니 저 한 의원, 아주 마음에 들려고 해요. 뭐, 사업권 따내는 데 도와준 건 없지만 저 사람 숟가락 얹게 해 줍시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겠죠.”

    “알겠습니다.”

    해마다 집으로 찾아오는 국회의원 의정 보고서, 어차피 자세히 읽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한석인이 이 복합 쇼핑몰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 일에 대한 이력 한 줄 들어간다고 문제 될 건 없었으니. 한석인은 시민들에게 자신의 활동을 홍보해서 좋고 새명은 그에게 빚을 하나 지게 할 명분이 되니 서로서로 좋은 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며 경매 판을 이끌어 가던 동생 경우를 떠올리며 민지선은 미소 지었다. 일이 아니었더라면 동생도 불러서 이 자리를 함께했을 텐데.

    지금쯤 프랑스로 날아가고 있는 동생을 생각하던 지선은 동생이 무척 닮은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딸을 보는 그의 얼굴엔 대견함이 가득했다.

    * * *

    “이야, 역시 젊고 볼 일이야. 양복 한 벌에 얼굴이 확 사네. 기깔난다, 진짜.”

    “이거 왜 이러십니까, 단순한 양복 한 벌이 아니라구요. 가격 들으면 감독님 기함하실걸요. 비싼 돈 들였는데 감독님이랑 똑같이 보이면 돈 아깝잖아요.”

    “그래? 이게 그렇게 비싼 거야?”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어머니가 새로 해 주셨거든요.”

    “어머니가? 이쪽 일 한다고 별로 안 좋아하신다면서?”

    “뭐 그렇긴 한데요. 그냥 작가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대표도 하고 있잖아요. 성과가 나오니까 두고 보시는 거겠죠. 그래도 아들이 외국 간다고 기죽으면 안 된다면서 옷 한 벌 해 주시더라고요.”

    “그렇지. 기죽으면 안 되지. 그런 거 치고는 좀 과한 감이…… 아니다. 키 크고 덩치 큰 서양 놈들 틈에서 절대 꿀리면-.”

    그러다 키와 덩치가 서양 놈들에게 밀리지 않는 경우를 본 박종연은 자신의 나온 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만 안 꿀리면 되는구나, 나만.”

    “그나저나 정말로 칸에 입성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다 내 덕분인 줄은 알아라.”

    “에이, 제 지분도 있습니다. 감독님 슬럼프를 벗어나게 한 건 제 초고 덕분임을 잊지 마세요.”

    “하여간 생색은. 알았다 이놈아.”

    칸의 레드카펫을 밟으며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긴장을 풀기 위해 일부러 시답잖은 대화를 나눈 그들은, 눈 부시게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미소 짓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시체가 나타났다>가 경쟁 부문 후보로 오르고 감독인 박종연은 물론 강범석을 비롯한 주연 배우들, 마지막으로 제작자로 경우까지 참석한 자리였다.

    레드카펫 행사가 끝나고 공식 상영이 시작되자 경우는 긴장감에 자꾸만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여러 사람들이 합심해 만든 영화였다. 그 영화를 세상에 소개하는 자리.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역사도 다른 곳에서 자신들이 만든 영화를 선보인다는 건 시사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바로 옆 사람에게 들리지는 않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드디어 극장이 어두워지고 영화가 시작되자 경우의 마음도 조금씩 안정이 되어 갔다.

    * * *

    영화가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순간 극장 안이 정적이 되어 버렸다.

    어? 이거 반응 왜 이래?

    영화가 별론가 하며 긴장하는 순간, 하나둘 박수 갈채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이곳에서도 먹히는구나 싶었던 경우는 꽤 오랫동안 이어진 박수갈채에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때 옆에서 함께 감격해하던 박종연이 경우의 옆구리를 툭 치며 물었다.

    “그래, 인정하마. 네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그러니까 다음엔 네가 직접 만든 영화로 레드카펫 밟아 보자.”

    그럴 수만 있다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기분. 그 기분에 중독된 경우는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이 박수 언제까지 치고 있어야 합니까, 배고픈데.”

    “나도 몰라. 지들도 사람인데 끝날 때가 있지 밤새 이러고 있겠냐? 소주에 라면이나 한 그릇 했으면 좋겠다.”

    “이따 제 방으로 오시죠. 안 그래도 챙겨 왔습니다.”

    “이런 준비성 좋은 제작자 같으니라고.”

    “그런 의미에서 다음 작품도 우리 제작사 콜?”

    “오케이, 콜!”

    공식 상영까지 마치고 나자 그들을 향한 취재 열기는 탓에 방으로 돌아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날 배우 못지않은 경우의 외모 덕에 트위터에는 ‘The first From the left, black hair, H-patterned tie’ 같은 경우를 지목하는 단어들이 휩쓸고 있었다.

    * * *

    결국 수상은 불발되었지만 현지에서 느껴지는 영화에 대한 기대감과 좋은 평가는 그대로 한국으로 전해졌고 좋은 홍보 수단이 되었다. 마침내 프랑스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경우는 국내에서 다시 몰려드는 취재 열기에 휩쓸려야 했다.

    “아, 이 짓도 못할 노릇이네요. 계속 웃고 있으려니까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아요.”

    “원래 제작자한테 이렇게 스포트라이트가 가지는 않지만 너야 젊지, 잘생겼지, 돈도 많지. 확실히 이야깃거리도 많고 사람들 관심도 많아서 그런 거 아냐.”

    “참, 나 감독님 영화 가편집본 나왔는데 소식 들으셨어요?”

    “벌써? 하긴, 영화를 통째로 찍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이 나오는 부분만 다시 찍으면 되니까 빠르겠구나.”

    “전 이따 보기로 했는데 같이 보실래요?”

    “아니, 난 됐다. 어째 내 영화보다 더 긴장되는 거 같아. 네가 보고 말이나 해 줘. 어땠는지.”

    결국 경우는 박종연을 내버려 둔 채 편집실로 향했다.

    그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해쓱하진 나 감독이 경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감독은 물론 <비밀의 계단> 스탭들 몇과 김종수 대표도 함께 있었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요. 어쨌든 속은 후련합니다.”

    “그럼 이제 볼까요?”

    영화가 시작되고 경우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전 생과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니 영화 역시 과거 그가 보았던 것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절박하게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우재환의 연기는 비중 있는 드라마 출연으로 한층 여유로워져 있었다. 그가 해석한 ‘선’이라는 캐릭터는 분명 이전 생에서 본 그의 연기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잘 녹아들었다. 그가 이미 봤던 <비밀의 계단>과 같은 배우가 출연해 있었지만 같은 내용의 다른 영화를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보니 나상재 감독과 신도현 작가의 작품 분위기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두 사람이 혹시 같이 작업을 하게 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영화가 아주 잘 나왔네요. 민 작가님은 왜 그렇게 고집해서 이 영화를 가지고 왔는지 알 것 같아요.”

    “네. 생각보다 더 잘 나온 것 같아요. 묻혀 버렸으면 정말 아쉬울 뻔했어요.”

    “다 작가님 덕분입니다.”

    “뜻하지 않게 영화를 두 편 연달아 개봉하게 생겼네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민 작가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이제 작가님 좀 쉬시는 겁니까? 그동안 쉬지도 않고 계속 일만 하시는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쉴까 했는데요, 오래 기다려 준 사람이 있어서요. 기다림에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영문을 몰라 하는 김종수를 보며 경우는 지난밤 전화를 걸어와 우는 소리를 하는 SBC 강진일 CP를 떠올렸다.

    ‘작가님, 이제 드라마는 안 쓰실 겁니까? 혹시 이참에 아예 영화 쪽으로 넘어가시는 건 아니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써 두신 드라마도 꽤 되는 걸로 아는데요?’

    ‘누가 뭐래도 드라마 작간데 드라마를 그만둘 리가 있겠습니까.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수습 좀 하느라고요. 이제 일이 거의 다 정리되었으니 드라마 써야죠. 명색이 드라마 작간데.’

    ‘그거 정말이죠? 혹시 다음 작품 생각해 두신 건 있으십니까?’

    ‘네. 아시다시피 저 드라마 써 놓은 거 많습니다. 조만간 기획안 보내 드릴게요. 그동안 기다려 주셨는데 차기작은 당연 SBC와 할 생각입니다. 너무 늦은 건 아니죠?’

    ‘작가님 차기작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이럴 게 아니라 만나서, 만나서 이야기하시죠.’

    안청모가 연출한 단막극 이후로 꽤 오랜만에 드라마였다. 프린터가 토해 내는 기획안을 챙겨 든 경우는 강진일을 만나기 위해 SBC 방송국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