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나비효과 (4)
“칸에 출품하실 거죠?”
개봉 시기를 조율하고 있던 중 김종수 대표가 꺼낸 말에 회의실의 분위기가 단번에 술렁였다. 담담한 박종연에 비해 되려 당황한 건 경우였다.
“카, 칸이요?”
“민 작가님이야 조금 얼떨떨해하시는 것 같지만 박 감독님께는 낯선 일도 아니잖습니까?”
“그야 그렇죠.”
대답을 하는 경우는 힐끗 박종연을 바라봤다. 평소와 달리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그는 진지해져 있었다.
“영화도 잘 나왔고 시사회 반응 보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작품 전체 분위기가 무거운 것 때문에 흥행이 조금 걱정되는 면은 있습니다.”
“확실히 칸에서 주목을 받으면 국내에서도 더 주목을 받겠죠?”
“그렇죠. 하지만 그것도 경쟁 부분 후보에 올랐다는 전제가 되어야 가능한 이야깁니다.”
“당연히 노미네이트 될 겁니다. 상까지야 모르겠습니다만, 노미네이트 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홍보가 될 겁니다.”
일단 외국에서 그것도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국내 언론의 태도 또한 달라졌다.
원래 내가 가진 평범한 물건도 다른 사람이 좋다고 평가해 주면 갑자기 좋은 물건이 되기라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물론 박종연의 능력이 출중해 믿고 보는 영화감독이었으나, 영화 흥행이라는 게 베테랑 감독도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었기에 조금이라도 흥행에 도움이 된다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영화를 칸에 출품하고 그때까지 개봉하는 건 미루기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일이 끝나는 건 아니었으니.
회의를 마친 후 박종연을 따로 부른 경우는 나상재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혹시 나상재 감독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지금 어디 계신지도 알려 주시면 더 좋구요.”
* * *
나상재는 이른 아침부터 출근해 바닥 청소는 물론 테이블을 정리하고 수저와 젓가락에 종이를 씌우는 등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결혼 전부터 처갓집에서 하고 있는 백반집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 덕에 제법 단골 손님이 많았다. 덕분에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았던 처갓집에서는 처음 딸이 나상재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극구 말렸다.
영화 하는 놈 치고 제대로 밥 벌어먹고 사는 놈, 몇 안 된다고.
처음 들었을 때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장인이 잘못 알고 있다고. 그 몇 안 되는 놈이 자신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머릿속은 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가득했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그는 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으니 장인의 말은 마치 예언이라도 되는 양, 영화판에서 그는 맥을 추지 못했다. 그러니 생계를 담당하는 건 늘 아내의 몫. 아내는 그동안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 일을 도우며 생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영화, 이제라도 때려치우자 생각한 나상재는 그 길로 처가에서 운영하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바닥 청소부터 시작해 마늘까기, 설거지 등등 신참이 하는 일을 일부러 도맡아 하며 몸을 굴리는 중이었다. 다행히 몸이 힘이 드니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 괜찮아졌다.
그리고 그런 사위의 모습에 장인, 장모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며 이제 밥벌이는 할 수 있을 거라 안도했다. 하지만 꿈을 꺾은 남편을 보는 아내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집이 있는 사람이니 어쩌지도 못한 아내는 남편은 하는 양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딸랑.
아침 장사가 끝이 나고 점심 장사가 시작되기엔 좀 애매한 시간. 젊은 남자가 홀로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식사 드릴까요.”
“네, 정식으로 2인분 주시고요.”
또 올 사람이 있나 생각한 나상재의 아내에게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나상재 감독님을 좀 뵙고 싶은데요?”
남편을 찾는 남자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 나상재의 아내는 서둘러 남편을 찾으러 식당 뒷문으로 향했다. 이번이 어쩌면 남편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심장은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여보, 손님 오셨어.”
“?”
* * *
사람을 앞에 두고도 용건을 말하지 않고 밥만 먹는 경우를 보며 나상재는 이놈이 뭔가 싶은 생각에 그를 노려봤다. 그런 그의 눈빛을 알아차린 건지 경우가 멋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해요. 제대로 된 밥 먹은 지가 좀 됐거든요. 아주 맛있네요. 특히 이 된장찌개가 일품입니다.”
“우리 장모님이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인 거니까 맛은 보장합니다. 근데 어디서 오신 누구시라고요?”
“제 소개가 늦었죠. 저 이런 사람입니다.”
품에서 명함을 꺼낸 경우가 나상재에게 내밀었다. 잠시 경우를 째려보던 나상재는 명함을 뚫어져라 보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글로리 대표 겸 작가 민경우.
그러니까 박종연이 현재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제작사의 대표 겸 그가 얼마 전 보았던 드라마 <셀룰러 메모리>를 집필한 작가였다. 대표인데도 생각보다 어린 외모에 나상재는 조금 놀랐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박종연을 통해서, 또 그가 집필한 드라마를 통해서 아는 사이 같단 생각에 일단 그를 향한 적개심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런데 여기까진 어쩐 일입니까? 밥 먹으러 온 건 아닐 테고.”
“네, 감독님께 제안을 드릴까 해서 왔습니다.”
“…….”
갑작스러운 경우의 말에 나상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쓸데 없는 소리 할 거면 그냥 돌아가십시오.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온 건지 짐작이 갑니다만, 나 이제 영화 안 합니다.”
“그럼 고생해서 찍은 <비밀의 계단> 그냥 사장할 겁니까?”
“인정받지 못할 거라면 그 편이 낫습니다.”
“이대로 묻어 버리느니 어떻게든 해서 세상에 내보이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까?”
<비밀의 계단> 가편집본을 처음 봤을 때 나상재 역시 충격을 받았다. 현장에선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화면 속 박철민이 연기하고 있는 주인공 ‘선’의 모습은 그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연민은 하나도 느낄 수 없고 오로지 분노 가득한 모습이었다.
‘선’이라는 이름답게 선한 인물인 주인공.
하지만 착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리면서 악한 인간이 되어 간다.
괜찮은 연기력을 가졌음에도 인정받지 못한 박철민과 닮았다고 생각한 나상재는 잔인하지만 연민을 느끼게 하는 주인공을 잘 표현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박철민과 주인공 ‘선’은 결이 달랐다.
‘선’이 불행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찾는 사람이라면 박철민은 주위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는 쪽이었다.
그러니 박철민에게서 ‘선’을 본 것은 명백히 그의 실수였다. 이 나이 먹도록 사람 하나 제대로 볼 줄 모른다는 사실에 스스로 한심하기도 했다.
투자자의 만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역시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능력이 이미 한계치에 다다랐다는 절망 또한 같이 느꼈다.
그런데 그런 그런 자신의 고민들을 너무 쉽게 뒤집겠다는 경우의 모습에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건 이미 회생 불가예요.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요. 그런 걸 어떻게 인정받게 한다는 겁니까?”
“다시 찍으면 되잖습니까, 주인공만 바꿔서.”
“네?”
“듣자하니 주인공의 연기가 나쁜 건 아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더라구요. 그럼 배우와 주인공이 맞지 않다는 소린데 주인공만 바꾸면 되지 않습니까?”
어려운 문제를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니 나상재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보세요. 제작사 대표라면서 재촬영을 그렇게 쉽게 말하면 됩니까? 돈도 돈이지만 주인공을 했던 배우한테도 그건 실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주인공이 괜찮다고 하면요? 그리고 재촬영에 들어갈 비용을 대는 투자자가 있다면요? 다시 찍어야 하는 배우들도 모두 오케이 한다면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끌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영화적인 재능이 없다고 좌절했을 뿐 영화를 싫어하게 된 건 아니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영화를 찍고 싶은 본능이 그의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뭐,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감독님만 오케이 하신다면 제가 바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 보시겠습니까?”
한 번쯤은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머리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었지만 가슴은 그러지 못했다.
“정말 가능……합니까?”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쉽게 일이 해결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나상재는 김이 새고 말았다.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납니다. 주인공으로 우재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 오디션 때 보셨다면서요. 우 배우님을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 전 <비밀의 계단> 주인공으로 우재환 씨가 딱일 것 같은데요. 그 조건만 들어준다면 다른 건 뭐든 감독님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재기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역시 이 영화의 성공뿐.
주인공만 바꿔 다시 촬영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말을 하면서도 경우도 살짝 걱정하고 있었다. 캐스팅 건으로 <셀룰러 메모리>의 김은기 PD도 그렇게 길길이 날뛰었는데. 더 고지식한 나상재가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우재환이 이 영화에 맞는 완벽한 연기를 할 거란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 더군다나 오디션에서 우재환을 떨어뜨린 건 그였으니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우 배우가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떨어뜨렸습니다. 악감정까지는 아니겠지만 이제와 좋다고 할 리가 없죠.”
“감독님이 잘 모르셔서 하는 말씀 같은데요. 좋은 역할을 두고 자존심만 세우는 건 배우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 배우님은 그럴 사람도 아니고요.”
“솔직히 대표님께서 왜 제게 찾아와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그건 전생의 업보라고 해 두죠. 그리고…… 이 영화 꼭 다시 보고 싶거든요.”
“네? 다시 보다니요?”
“그냥 그런 게 있습니다. 정 납득이 안 된다고 하면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
“저 어릴 때 홍콩 영화 참 많이 봤습니다. 영웅본색, 천녀유혼, 아비정전, 중경삼림…… 주옥 같은 영화가 참 많죠. 근데 지금 누가 홍콩 영화 봅니까? 저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다양성이 통제되니까 결국 영화도 도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 같은 분도 계속 영화판에 있어야 한국 영화도 더 부흥한다고 생각하는 거고요.”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겁니까?”
“네, 어차피 감독님의 영화에서 수익은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영화 발전에 기여한다고 생각하죠. 아시겠지만 저 돈 많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생각하십시오. 돈 많은 재벌집 자식의 유희라고 생각하셔도 좋구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영화만 만들면 된다는 말에 결국 나상재는 경우의 손을 잡았다. 이후 경우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더클래스’를 찾아가 <비밀의 계단>과 관련된 모든 권리를 사 와 버렸다. 이제 <비밀의 계단>은 ‘더클래스’의 영화가 아닌 ‘스튜디오 글로리’의 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주연 배우 박철민을 찾아가서는 그의 연기가 아닌 이미지 탓에 다른 배우로 교체 재촬영을 할 거란 설명을 충분히 하고 대신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할 드라마의 주연급 배우로 출연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어차피 박철민 입장에서는 첫 주연을 한 영화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만 나가고 있는 탓에 위축되기도 했고 가뜩이나 없는 출연 제의도 더 없어지는 마당이었기에 나쁜 제안만은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실속을 챙기는 편이 나았다.
거기에 주인공 ‘선’과 부딪치는 배우들에게도 본 촬영보다 신경 쓴 개런티를 제시하며 영화 촬영을 도와줄 것을 부탁한지라 거절하는 배우들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재환. 오디션 탈락 후 출연하게 된 드라마로 일정이 바쁜 것도 있었지만 하 실장의 반대 또한 만만치 않았다. 굳이 오디션에 떨어진 영화에 왜 출연하냐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무명 배우인 우재환에게 기회를 준 경우가 끼어든 일이었으니 결국 이 문제 또한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다.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일을 금세 해치워 버린 경우의 모습에 나상재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봤냐? 보기보다 능력 좋은 놈이야. 한번 시작하면 제대로 하는 놈이라고. 그러니까 이번 기회 잡은 걸 두고두고 다행이라고 여길 거다.”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다시 만난 박종연의 말에 나상재는 마음속으로 격하게 동의했다. 그렇게 새로 자리 잡은 제작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상재를 대표실로 부른 경우는 그에게 마지막 제안을 제시했다.
“이건 원하지 않으시면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뭔데요?”
“향후 5년 간 저희 ‘스튜디오 글로리’와 전속 계약을 제안드릴까 하는데요. 저희는 딱히 감독님 스타일에 터치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영화 제작에 있어서 별로 조건 같은 거 없고 시나리오 역시 일절 손대지 않을 겁니다. 감독님의 예술성을 존중할 거거든요.”
아예 계약서에 그 부분은 명시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 온 복이었으니 내칠 이유가 없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꽉 눌러 찍고 영화 재촬영 준비를 시작하고 얼마 후.
스케줄을 조정한 우재환이 <비밀의 계단>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영화의 재촬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