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72화 (72/250)
  • #72. 나비효과 (3)

    “우와, 여기 되게 좋다.”

    “완전 넓은데요?”

    벌여 놓은 일이 많은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이사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문 업체에서 이사를 도와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부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으니 이사 날짜가 정해지고도 다들 시큰둥했다.

    하지만 새 건물의 넓고 쾌적한 환경을 보자 불만은 눈 녹듯 사라지고 앞으로 일할 공간을 모두들 마음에 들어했다.

    특히나 새로 생긴 편집실을 박종연이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이제 촬영을 마치면 편집실에서 아예 먹고 자고 일하는 반복된 생활을 해야 할 텐데 좁아 터진 편집실에 여러 사람 복작대고 있을 생각을 하니 경우는 진저리가 났다.

    그러니 박종연을 위한다기보다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장비까지 제대로 갖춰진 편집실을 보면 박종연이 차기작도 ‘스튜디오 글로리’와 하겠다고 할지 모를 일이었으니 일종의 미끼나 다름없었다.

    “우와, 여기 왜 이렇게 좋냐?”

    “좋은 영화 찍는데 이 정도 투자는 아무것도 아니죠.”

    “역시 돈이 좋기는 좋구나.”

    감탄하며 살펴보는 박종연의 모습에 경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딜 가도 이만한 편집실을 찾아보기 힘들 거란 자부심도 있었으니 이제 낚을 일만 남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경우의 전화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경우는 여전히 감탄하는 박종연을 내버려 둔 채 황급히 메일부터 확인했다. 거기엔 <비밀의 계단> 캐스팅 명단이 들어 있었다.

    남자 주인공인 ‘선’ 역할에 박철민이 있었다.

    박철민?

    박철민이라면 연기력은 나쁘지 않았으나 우재환과는 이미지가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처음 우재환이 오디션에서 떨어졌다고 하길래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정반대의 결과였으니 괜찮은 배우를 두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경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상재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다.”

    박종연의 목소리에 놀란 경우가 돌아보니 어느새 자신의 뒤에 바짝 선 채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 경우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저, 그게, 그러니까, 관심이라기보다는…….”

    “그 반응 뭐냐?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제작사 대표가 감독한테 관심 보이는 거야 당연하지. 근데 내가 말했잖아. 제작사 쪽에서는 별로 좋아할 만한 감독은 아니라고. 하긴, 너도 평범한 제작사 대표는 아니었네.”

    그러자 경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그거 무슨 뜻이에요?”

    “그동안 내가 만나 온 제작사 대표들은 말이야, 돈을 엄청 밝혀. 시나리오를 보면 일단 돈이 되는지 안 되는지부터 따진다고. 그래야 투자자가 투자를 할 거 아냐. 근데 넌…… 일단 네 맘에 들어야 하잖아. 이해는 해. 재벌집 도련님의 돈 많이 드는 취미 생활 같은 거일 테니까.”

    “감독님! 취미 생활이라니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농담이야, 농담. 다른 나라 도련님은 축구 좋아해서 구단주 한다며. 거기에 비하면 차라리 영화가 낫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설렁설렁한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돈이야 다른 데서 벌면 되니까 상관 없지만 확실한 목표는 있다고요!”

    “그래? 네 목표가 뭔데?”

    “업계 최고는 돼 봐야죠.”

    “얼씨구. 그래, 패기는 좋다. 사나이라면 그 정도 각오쯤은 해야지. 근데 다른 사람 다 놔두고 상재는 왜? 보니까 상재를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 나상재한테는 뭐가 꽂혀서 이러는 건데?”

    “그게…… 우재환 배우님이요, 혹시 아세요?”

    “지난번 네 드라마 배우 아냐. 이거 왜 이래. 나 이래 봬도 네 드라마 본방 사수했어.”

    “뭐 그건 쫌 감사하네요.”

    “내가 너한테 다 감사 인사를 받는구나. 뭐 아무튼 그래서?”

    “그 배우님이 그 영화 오디션을 보고 오셨는데 떨어졌다고 해서요. 같이 일해 봐서 아는데 우 배우님 정말 좋은 배우예요. 그런 사람이 떨어지고 누가 붙었는지 좀 궁금해서.”

    “그래? 누가 됐는데?”

    “박철민 배우님이요.”

    “뭐? 미친 거 아냐? 하, 이 또라이 새끼. 안 봐도 비디오네.”

    “네? 뭐가요?”

    “메소드 연기. 뭐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내가 알던 그 시나리오가 아닐 수 있어. 근데 내가 봤던 건 주인공이 과감하다고 해야 하나, 잔인하다고 해야 하나? 아마 라이징 스타가 된 우재환은 이미지 생각해서 그 정도까진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 그런 연기는 좀 더 절박해야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할 테니까.”

    ‘선’이라는 이름과 달리 <비밀의 계단> 주인공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수법은 꽤나 잔인해서 결국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으니 우재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바로 그가 가진 무해한 소년미였다.

    잔인성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순수한 모습이 그를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게도 하고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의 내용도 물론 괜찮았지만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음에도 우재환이 스타덤에 오른 것을 보면 그만의 매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풍기는 묘한 매력이 때론 잔인성을 더하기도, 때론 연민이 들게 만들었으니까.

    영화가 흥행하려면 좋은 시나리오, 좋은 감독, 그리고 그 배역에 잘 맞는 배우까지 삼박자가 맞아야 했는데 그것이 조금씩 틀어지는 기분이었다.

    “얘기해서 달라질 것 같으면 내가 백 번이라도 쫓아가서 뭐라고 하겠는데 고집이 쇠심줄 같아서 아마 안 될 거야. 내가 말했잖아. 고집 세다고. 그 친구가 출연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포기하라고 해.”

    경우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게 우재환 때문이라 생각한 박종연의 오해를 내버려 뒀다. 어쨌거나 남의 영화였으니 잘 알지도 못하는 그가 나설 수도 없었고 우재환도 홀가분하게 털어 버린 마당에 그가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해서 경우는 편집실에 상주하며 영화 편집에 박차를 가했다.

    경우가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비밀의 계단>을 제작하고 있는 ‘더클래스’ 역시 한바탕 난리가 나고 있었다.

    “감독님, 우재환이 더 낫다니까요. 드라마 보셨다면서요.”

    “네, 봤습니다. 근데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그 친구 사계절 엔터 소속인 거. 소속사에서 이런 역할 반기지 않을뿐더러 이미지 걱정에 저, 그 친구가 맡은 바 최선을 다할지 그것도 걱정입니다.”

    “그래서 박철민입니까? 박철민 씨 좋은 배우죠. 하지만 이런 큰 역할 한번 맡아 본 적 없어요. 거기다 우재환만큼 인지도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차라리 대본을 조금 손봐서…….”

    “그런 식으로 난도질하면 영화가 되겠습니까? 씬 하나, 대사 하나, 계산하지 않고 쓴 게 없어요. 저 그렇게는 못 합니다. 아니, 안 합니다.”

    “네, 하지만 투자자들 생각도 좀 하셔야죠. 그쪽에선 조금이라도 인지도 있는 배우를 선호할 겁니다. 관객을 극장으로 끌고 오는 건 배우의 몫도 어느 정도 있으니까요.”

    “영화를 만드는 건 감독이지 투자자가 아닙니다.”

    “아니죠. 투자자 돈으로 만드는 거죠. 투자자 돈이 없으면 영화 못 만들어요. 나 감독님. 용납 못 하는 건 알겠어요. 이전에도 감독님 같은 분들 많으셨어요. 그래도 그분들 나름 타협점을 찾고 한발 물러서셨어요. 영화를 계속해야 하니까.”

    “…….”

    “저도 누구보다 감독님 영화 좋아해요. 하지만 투자자들 말 그렇게 틀리지 않아요. 결국 영화를 왜 만드는 건데요? 관객이 봐야 의미가 있죠. 감독님의 예술성에 상업성 딱 한 스푼만 더 넣자는 것뿐이에요. 그럼 관객들도 더 좋아할 거구요.”

    “…….”

    “만약 이번 영화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감독님 다음 기회 얻기…… 힘들어질 거예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감독님!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우리 같이 영화를 만들어 보자니까요?”

    하지만 완고한 나상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으니 결국 나상재의 주장대로 주인공 ‘선’ 역에 우재환이 아닌 박철민으로 캐스팅이 확정되었다.

    * * *

    <시체가 나타났다>의 막바지 촬영을 마친 후 편집까지 끝이 나자 VIP 시사회가 날짜가 잡혔다.

    경우는 누구를 초대할까 고심하다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시사회 날, 시사회에 참석한 배우들을 취재하기 위해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든 극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연예인들이 속속 등장하고 카메라 플래시가 바쁘게 터지는 와중에 술렁거리는 소란이 느껴졌다.

    경우는 드디어 자신이 초대한 손님이 왔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지난번 자선 행사에서 만난 강미란과 고정시에 지역구를 둔 그녀의 남편 한석인 의원이 함께했다.

    자신과 영화 취향이 비슷하기도 했고 또 병원 문병도 와 줬으니 예의상 초대를 한 것뿐인데, 강미란이 참석한 것은 둘째치고 한석인까지 나타나자 경우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모님, 오셨습니까?”

    “민 작가가 초대해 줬는데 당연히 와야죠. 참, 우리 남편 처음 보죠. 인사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민경우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한석인이라고 합니다. 민 회장님하곤 가끔 사석에서 만났는데 이렇게 막내 아드님을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회의원도 사람인데 문화 생활은 즐겨야죠. 그럼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경우의 안내에 두 사람은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팔짱을 낀 모습이 꽤 다정한 사이처럼 보였다.

    5천만이 넘는 국민이 사는 이 나라에 단 300여 명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인 국회의원.

    그러니 그들이 가진 권한은 막강했다. 오죽했으면 법을 위반했어도 국회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그들은 체포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렇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게 그들이었다.

    이런 기회에 국회의원과 안면을 터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경우는 보험을 들어 놓은 것마냥 든든했다.

    그렇게 시사회를 마치고 생각보다 괜찮은 반응에 그동안 해 왔던 걱정들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이제 한시름 넘겼을 뿐 개봉까지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시사회를 마친 박종연의 표정이 그렇게 밝지 않았다.

    “감독님. 편집 기사 옆에 꼭 붙어서 같이 편집하셔 놓고는 막상 극장에서 보니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시는 거예요?”

    “응? 아니.”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무슨 근심 걱정 있는 사람처럼.”

    “그게. 실은 네가 한 말도 있고 해서 내가 이번에 나 감독을 시사회에 초대했거든. 시사회에 얼굴 비추면 기자들 통해서 근황이 전해질 거 아냐. 그쪽 영화 홍보도 될 것 같아서 그랬는데…….”

    생각해 보니 오늘 참석한 사람들 중 나상재 감독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안 오셨잖아요.”

    “그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촬영 벌써 끝났다고 가편집 들어갔다고 시간 내서라도 오겠다고 하더니 오늘 전화도 안 되길래 제작사로 전화를 했더든. 근데…… 영화 개봉을 안 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고.”

    “네? 개봉을 안 하다니요?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나 감독하고 투자자하고 촬영 내내 대립이 좀 있었나 봐. 그래서 가편집 된 거 보고 다시 의논하잔 말에 한발 물러선 거지.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는…… 투자자가 지금까지 들어간 돈은 포기하겠으니 차라리 개봉을 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나 봐.”

    그쪽에선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으로 관객 수가 줄어들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개봉을 한다고 해도 홍보니 뭐니 앞으로도 들어갈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그러니 벌어들일 돈보다 앞으로 들어갈 돈이 더 많을 거란 예상이 들면 아예 개봉을 안 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며 박종연이 설명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고 해도 상재 눈에 괜찮게 보였다면 또 모를까, 상재가 보기에도 영화가 좀 그랬나 보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촬영을 할 때와 편집할 때는 또 다르니까.”

    “그럼 지금 나 감독님은 어쩌고 계시는 건데요?”

    “나도 모르겠어. 근데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아. 제작사 쪽에서 그렇게 말했나 보더라고.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이미 두 편이나 말아먹었으니 이번 영화로 재기에 성공하고 싶었을 텐데…….”

    경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가 회귀한 이후 많은 것들이 변했다. 대부분 좋은 결과를 얻었다.

    소송에 휘말려 제대로 드라마 제작을 할 수 없었던 ‘스튜디오 글로리’는 이제 업계에서 조금씩 인정받는 제작사가 되었고 고명희 밑에서 고생만 했던 박민정은 물론 이시연까지 자기 이름을 건 드라마가 제작 중이거나 예정에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비밀의 계단>으로 재기에 성공해 이후 승승장구할 나상재가 영화를 완전히 접을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