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71화 (71/250)
  • #71. 나비효과 (2)

    “근데 도대체 전무 방에서 난 소리는 뭐였어?”

    평일 점심시간.

    직장인들이 허기를 달램과 동시에 스트레스를 날리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으니, 옥상에서 담배 필 때와 마찬가지로 상사의 눈을 피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 가곤 했다.

    경음유통의 직원들은 오전에 있었던 소란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입을 털기 시작했다.

    “복합 쇼핑몰 그거 우리 떨어졌잖아.”

    “뭐? 그게 왜 떨어져? 다 된 거나 다름없다고 했잖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사람은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는 거야. 입으로 흥한 자, 입으로 망한다는 것도 모르나.”

    “어쩐지 너무 설레발 친다 했어. 그래서 또 뭘 때려 부쉈대? 지 성질 못 이기면 때려 부수는 거 전무 특기잖아.”

    “그렇지. 같이 일한 지 몇 년인데 전무 성격 모를 리가 없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우리 부서도 말이 많다. 떨어진 것도 떨어진 거지만 그 사업권, 하필이면 새명으로 갔거든.”

    “뭐? 새명? 아니, 어떻게? 거긴 진짜 아니지 않아? 때려 부술 만했네. 내가 처음으로 전무님 마음이 이해가 되네. 근데 다른 데도 아니고 새명이 따냈으면 혹시 로비, 뭐 이런 거 들어간 거냐?”

    “그랬으면 얼마나 다행이게. 근데 저쪽이 아니라 우리 쪽이란다.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아무튼 잘 보이려고 3억 주고 산 도자기를 오늘 아침에 깼다는 거 아니냐.”

    “뭐? 3억?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만. 3억이면 못해도 집 한 채 값이구만. 그 자식은 그게 사고 싶었대? 아니다. 그러니까 동생한테 후계자 자리나 밀리는 모지리지. 하아, 우리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 저런 상사 모시고 살다가 회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 아닌 가 몰라.”

    “아무렴 그렇게 되기야 하겠냐? 또 혹시 모르지. 동생이 유통도 다시 쓸어 담아갈지. 보니까 장차훈 이사, 욕심이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쉬쉬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복합 쇼핑몰 사업권을 얻기 위해 거금을 주고 산 도자기가 사업권 무산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는 소문은 어느새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 만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 * *

    “감독님, 혹시 나상재 감독님하고 아는 사이세요?”

    “상재? 네가 상재를 어떻게 알아?”

    촬영 중간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경우는 박종연에게 <비밀의 계단> 감독인 나상재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냥 오다 가다 들었어요. 그 감독님 지금 무슨 영화 때문에 오디션 준비한다고.”

    “아, 그래? 그럼 이번에 한다는 영화가 혹시 그건가?”

    “나상재 감독님이랑 친하신 모양이에요. 이름을 막 부르시는 거 보면?”

    “친하다기보다 학교 같이 다녔지. 그 자식 완전 꼴통이야. 예술 한다고 하는 친구들 중에 똘끼 충만한 애들 많잖아. 근데 상재는 그중 최고봉이었어.”

    경우의 이야기에 학창 시절이 소환된 박종연은 잠시 추억에 젖어 버렸다. 그 시절 저질렀던 온갖 기행들하며 그 나이대만이 할 수 있는 객기까지.

    먹고사느라 바빴던 전생의 기억에도, 사고만 저질렀던 민경우의 기억에도 그런 추억은 없었기에 경우는 어쩐지 그런 학창 시절을 보낸 박종연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그 자식이 얼마나 꼴통이었냐면 한번은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 고정 관념을 깨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대충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지. 그래서 그 자식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뭐라고요?”

    “수업 시간에 담배 펴도 되냐고 묻더라고.”

    “예?”

    “수업 시간에 담배 피우지 않는 것도 고정 관념 아니냐고. 술은 정신이 흐트러져 남한테 해를 끼칠 수 있지만 담배는 머리가 잘 돌아가게 해서 창작 활동에 도움이 된다나 뭐라나. 지금이야 간접 흡연도 나쁘니까 금연이 대세지만 그땐 어디서나 담배를 피웠거든.”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교수님 얼굴이 아직도 안 잊혀지는 게 완전 한 방 먹은 얼굴이었지. 근데 또 그렇게 꽉 막히시는 분은 아니어서 크게 웃으시더니 그러자고 하시더라. 근데 그렇다고 누가 대놓고 담배를 펴. 사석에서도 권하지 않으면 맞담배도 어려운데 수업 시간에? 에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근데 나 감독님은 담배를 폈군요.”

    “어, 그 교수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착 물고 수업을 듣더라니까. 자기 일을 못하면 꼴불견으로 보이지만 상재는 우리 축에선 은근 선구자로 여겨졌거든. 그래서 어린 마음에 또 그게 멋있어 보였어.”

    “그래서 따라 하셨어요?”

    “뭐, 딱 한 번. 어쨌든 그런 경험, 쉽게 못하지. 그 녀석은 좀 그런 녀석이야.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거 먼저 시도해 보는 놈. 그래서 대단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위태롭지.”

    밝았던 박종연의 얼굴에 살며시 그늘이 생겼다.

    “예술가적 기질을 따지자면 상재만 한 놈도 없어. 아마 그 시절이 지금 같았다면 그 녀석 졸업작품, 칸에 가고도 남았을 거야. 근데 고집이 너무 세. 그 고집만 조금 꺾었어도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었을 텐데.”

    쓸쓸한 그의 얼굴에서 경우는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천재 모차르트를 지독하게 질투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안토니오 살리에리. 그래서 뛰어난 능력자를 보고 질투에 사로잡히는 열등감이나 무력감에 그의 이름을 따 살리에리 증후군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그건 모차르트 독살설에서 이어진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의해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 것이었을 뿐, 실제 살리에리는 수많은 이들에게 존경 받는 음악가였다. 모차르트를 존중하고 그의 사후 그 아들에게 음악 교육을 하는 등 영화 속 질투에 사로잡힌 그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천재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나상재를 걱정하는 모습이 살리에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경우는 생각했다.

    “자기만의 철학이 너무 확고하달까? 제작사에서 싫어할 만한 타입의 감독이야. 제작사는 영화를 만들려면 투자자를 설득해야 하잖아. 투자자는 사실 돈 벌려고 투자를 하는 거니까 예술보단 상업성을 더 따지고. 그러니 중간에서 제작사만 난처해지는 거야.”

    “근데 아까 그 말씀은 뭐였어요? 이번 영화 혹시 무슨 영환지 알고 계시는 거예요?”

    “하여간 날카로워. 그냥 내뱉은 말을 흘려 듣는 법이 없어. 얼핏 듣기론 이번에 하기로 한 영화가 <비밀의 계단>인가 그럴 거야. 그거 실은 상재 졸업 작품으로 구상했던 시나리오였거든. 근데 우리가 다 말렸지.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랄까. 지금이라면 배우만 잘 캐스팅 된다면야 괜찮은 작품이 될 것 같긴 해.”

    그래서 뽑혔던 사람이 우재환. 마치 몸에 맞춘 듯 꼭 맞았던 우재환의 소화력 덕에 영화는 더욱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경우는 어쩐지 걱정이 깊어졌다.

    * * *

    다음 주, 제의를 받은 드라마의 작가와 감독을 만나기로 이미 약속이 정해져 있었다. 그쪽에선 우재환을 캐스팅 1순위로 새각했기에 그만 승낙하면 바로 촬영에 들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경우와 대화를 하고 생각이 많아진 우재환은 결국 영화 <비밀의 계단> 오디션에 오고야 말았다. 당연히 합격할 거라 생각하는 하 실장과 달리 우재환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길고 짧은 거는 대 봐야 아는 법. 하지 않고 후회하느니 차라리 시도라도 해 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일을 저질러 놓고도 혹시나 회사로 이야기가 들어갈까 싶었던 그는 마스크에 모자까지 쓰고 오디션장에 왔지만 그런 수상한 차림의 그를 보고 오히려 유명 배우가 오디션에 온 거 아니냐는 소문만 더욱 빠르게 퍼졌다. 물론 그가 누구였는지는 결국 알려지지 않았다.

    * * *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주인공 오디션에 <비밀의 계단> 관계자는 다들 지쳐 있었다. 그래도 내일이 되면 오늘 봤던 기억들이 희석될까 봐 커피로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고 주인공을 선택하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박철민 씨 어때요? 그만하면 연기도 안정적이고 괜찮을 것 같은데.”

    “저는 박철민 씨보다는 우재환 씨가 좋던데요?”

    “우재환 씨 연기는 좋은데 좀 어리지 않아요?”

    “어차피 우리 영화 주인공이 그렇게 나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우재환 씨 정도면 충분히 커버 되잖아요.”

    “우재환 씨가 그 사람 맞죠? <셀룰러 메모리>.”

    “네, 그 드라마 보셨군요.”

    “예. 근래 본 장르물 중에서 꽤 괜찮았죠. 특히 우재환 씨가 맡았던 역, 풋풋한 소년미에 예리한 원숙미가 합쳐진 느낌이랄까.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영화에도 잘 어울릴 것 같네요.”

    함께 오디션 심사를 본 조감독과 촬영 감독, 제작사 대표 및 그 외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상재가 물었다.

    “그 드라마 무슨 내용입니까?”

    “감독님 설마 <셀룰러 메모리> 안 보셨어요? 지난해 화제작이었는데. 한번 보세요. 재밌어요..”

    “거기 주인공이 오늘 오디션 보러 왔던 우재환 씨거든요. 거기 나오는 등장인물들 중에서 제일 어린 편에 속하는데 연기력은 절대 밀리지 않아요. 전 우재환 씨가 우리 영화 출연하는 거 좋게 생각하는데 감독님은 어떠세요?”

    나상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사실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전혀 끼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디션에서 우재환의 연기 또한 그의 마음에 찬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려 보면 꽤 괜찮게 나올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그를 선택하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그날 밤, 결국 나상재는 날을 꼴딱 새며 <셀룰러 메모리> 16부를 정주행하고 말았다.

    * * *

    “여기가 좋겠어.”

    마침내 마음에 든 건물을 찾은 경우는 그 길로 계약에 들어가기로 했다. 신축 건물이었던 덕에 세입자를 내보낼 필요도 없었고 간단한 공사만 끝나면 바로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 계약금을 보내고 나자 우재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마침 그의 소속사가 있는 사무실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어서 두 사람은 만나기로 했다.

    “작가님. 저, 오디션 떨어졌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까운 카페에서 만난 우재환은 얼굴을 보자마자 고해성사라도 하듯 자신이 한 일탈에 대해 내뱉고 말았다.

    “작가님 말씀이 떠올라서요. 그래서 저 회사 몰래 오디션 보러 갔어요. 도저히 말하고 갈 자신이 없어서요. 근데 떨어졌어요. 그래서 오히려 지금은 속이 시원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재환이 <비밀의 계단> 오디션에서 떨어졌다니 경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럼 누가 되는데?

    “근데 저희 실장님 알아 버리셨어요. 제작사 쪽에서 연락이 간 모양이더라구요. 그쪽에서 보기엔 나름 유명 배우라고 배려해 준 것 같긴한데…….”

    “그래서 실장님이 뭐라고 하세요?”

    “완전 길길이 날뛰죠. 어떻게 떨어뜨릴 수가 있냐고요. 전엔 떨어지면 연락도 안 주더니 괜한 짓을 하셔 가지고.”

    오디션을 보러 간 일을 화낼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하긴 내 배우가 어디서 안 좋은 취급을 당하면 좋다고 할 소속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이 보기에 우재환은 연기에 손색 없는 배우 그 자체였을 테니.

    “솔직히 좀 창피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그래도 안 해 본 것보다는 오디션이라도 본 게 속은 시원하네요. 그래도 작가님이 고민 상담도 해 주셨는데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예. 잘하셨어요.”

    시원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경우의 마음은 사실 찜찜했다.

    그리고 며칠 후 경우는 아는 사람을 통해 영화 <비밀의 계단> 캐스팅 명단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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