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70화 (70/250)
  • #70. 나비효과 (1)

    2009년이 저물고 2010년 새해가 밝았다.

    영화 촬영이 어느새 막바지 접어들고 있던 탓에 경우는 연말연시를 느낄 새도 없이 일에 빠져 있었다.

    촬영을 하는 내내 박종연의 옆에 딱 붙어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기록하는 게 주된 업무였던 덕에 경우는 육체적인 피로는 덜했지만 혹시라도 빠진 게 있지는 않은지 신경은 늘 곤두서 있었다.

    그래도 클로즈 업이나 풀 샷밖에 몰랐던 그가 미디엄 샷, 웨이스트 샷, 바스트 샷 등 여러 가지 용어도 차츰 알아 가고 상황에 따라 어떤 카메라 렌즈를 사용해야 하는지도 배워 갔다.

    모든 것이 다 공부였다.

    촬영은 대부분 콘티대로 진행이 되었다. 오랜 시간 박종연과 손발을 맞춰 온 조상욱 촬영 감독은 박종연의 의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둘의 시너지로 완성된 촬영본을 볼 때면 경우는 박종연이 단지 그림 솜씨만 좀 없었을 뿐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 장면을 머릿속에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설렁설렁하는 듯 허술해 보여도 그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 중 하나였으니 그런 사람에게서 영화를 배우는 것은 다시 올 수 없는 행운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에 취해 있는 사이 경우의 전화가 울렸다.

    “어, 누나. 무슨 일이야?”

    건너편에서 흥분된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민지선이 동생에게 전화를 걸기 10분 전.

    그녀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이번 복합 쇼핑몰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 쏟아부었다. 그리고 지난달 경기도에 있는 어느 연수원에서 마지막 프리젠테이션까지 마친 후 이제 결과만을 앞두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청심환까지 마셔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자꾸만 손에 차는 땀을 닦아 내고 있는 그때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초조한 속내를 감추려 다급하게 자리에 앉은 민지선이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들어오세요.”

    곧이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1년 365일 변함없는 표정의 박 실장. 힐끔 그녀의 얼굴을 봤지만 도무지 표정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민지선은 물었다.

    “무슨 일이죠?”

    “고정시 복합 쇼핑몰 사업권, 우리가 따냈습니다.”

    무덤덤하게 내뱉는 박 실장의 말에 민지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변함없는 박 실장의 표정에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 되물었다.

    “저기, 다시 말해 줄래요?”

    “해냈습니다, 대표님!”

    살짝 미소 지은 얼굴로 말하자 그제야 믿음이 가는지 민지선이 활짝 웃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지선은 박 실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의아한 박 실장이 어쨌든 내민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간 고생했어요. 앞으로 더 고생할 일이 많겠지만 우리 잘해 봅시다.”

    “네, 대표님.”

    그렇게 박 실장이 방을 나가자 민지선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없는 환호성을 불렀다. 어쨌든 꼼수를 쓰지 말라는 동생 경우의 조언은 물론, 카메라까지 가지고 와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도와준 덕을 본 것 같아 그녀는 즉시 경우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민지선이 좋은 소식으로 기쁨을 누리고 있는 그 순간, 정반대의 소식을 들은 장석제는 눈을 치켜뜨며 소식을 전해 온 자신의 비서를 향해 물었다. 그의 눈빛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살벌함에 비서는 몸을 떨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 경음 대신 사업권을 가져간 쪽이 누군데? 재경? 송일?”

    “저…… 그게, 새명유통이라고 합니다.”

    “뭐? 새, 새명? 다른 곳도 아니고 새명? 하. 하. 하하하하.”

    새명의 다른 계열사라면 모를까 유통은 구멍가게 수준이라 생각했던 장석제는 다른 곳도 아닌 새명에 자신들이 밀렸다는 사실에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자선 행사에서 참석한 그녀를 보며 참 애쓴다고 측은하게 여겼는데. 다른 곳도 아닌 민지선에게 사업권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장석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장석제는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다 밀어 버렸다. 우당탕탕 쏟아지는 집기들을 보며 비서가 나중에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장석제는 거기서 멈출 기세가 아니었으니 한쪽 책장 위에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 백자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문제였다. 성큼성큼 그 앞으로 다가간 장석제가 백자를 집어 들어 바닥에 내 던지려는 순간 비서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차, 참으십시오. 자그마치 2억 9천만 원 짜리 도자깁니다.”

    “그래, 이 쓸데없는 걸 내가 2억 9천만 원이나 주고 샀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 도발에 넘어간 내가 병신이지, 안 그래?”

    액수를 올리며 도발하더니 결국 물건은 사지 않았던 민지선의 동생 민경우가 떠오른 장석제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 비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자를 바닥에 내던지고 말았다.

    쨍그랑!

    백자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 * *

    촬영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경우는 잠시 귀를 긁적이던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사무실 이전을 좀 해야지.”

    경우는 부쩍 사람이 많아진 탓에 사무실이 비좁게 느껴졌다.

    경우가 오고 난 후 ‘스튜디오 글로리’는 조금씩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작가들은 물론 홍보팀 직원에 촬영 스탭들까지. 일단 식구도 늘어났지만 드라마 제작은 물론 영화 제작까지 끊임없이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회의실도 부족했고 작가실도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지금 현재는 한 층당 50평 정도 되는 건물의 세 개 층을 쓰는 중이었다. 원래 4층과 5층을 사용했지만 최근 식구들이 늘어나면서 계약이 만료된 3층까지 계약을 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이 많은 식구를 감당하기 벅찼다.

    아무래도 사무실을 이전해야겠다 마음 먹은 경우는 즉시 김강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쁘지 않으면 잠깐 사무실로 와.”

    얼마 후 김강철이 오자 경우는 용건부터 꺼내 놓기 시작했다.

    “마포에 건물 하나 알아봐 줘. 이왕이면 층당 못해도 100평 정도 됐으면 좋겠고 주차장 있어야 하니까 지하 2개층 정도는 주차장, 위로는 7~8층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갑자기 건물은 왜? 요즘 부동산값 떨어졌다고 하던데. 투자라도 하려고?”

    “그렇기도 하고……. 사무실 이전을 할까 해서.”

    “하긴, 사람을 그렇게 많이 불러들이더니. 내가 보기에도 좀 간당간당하더라. 근데 마포에 매물이 있으려나? 요즘 거래량이 확 줄어서 매물이 줄었다고 하더라고.”

    부동산 빙하기라고 불릴 정도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시기였다.

    나중에야 무서울 정도로 치솟는 부동산 시세에 아예 내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하락세인 지금 건물을 사 두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좋고 나중에 몇 배는 오를 테니 여러모로 좋은 일이었다.

    “근데 이러다 계속 떨어지면 어떡하냐?”

    “앞으로 한 2~3년은 더 떨어질 거야.”

    “그럼 차라리 그때 사는 게-.”

    “지금 사무실이 필요하다니까. 어차피 더 떨어진다고 해도 나중에 더 오를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 그냥 무상 임대 아니야. 월세도 받을 건데 그렇게 손해는 아니지.”

    “응? 월세를 받아?”

    “제작사는 법인이잖아. 나 혼자 쓰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쓰는 건데 지금처럼 월세 계약해서 그 월세 내가 받으면 되잖아. 같은 월세로 더 넓게 쓰니까 사무실 사람들도 좋을 테고. 그렇게 따지면 손해는 아닐 것 같은데?”

    “……그런가? 근데 어차피 대표가 넌데, 네 건물하고 계약? 아, 뭐가 뭔지 모르겠네.”

    “됐으니까 건물이나 찾아봐.”

    “알았다, 알았어.”

    거래량이 감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매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현재는 영화를 제작하고 있지만 ‘스튜디오 글로리’의 주력은 드라마였으니 마포라면 방송국도 가까워 여러모로 좋은 입지 조건이었다.

    경우는 김강철이 알아 온 건물들을 하나씩 꼼꼼히 살펴봤다. 여러 사람들이 써야 하는 공간이라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1층은 사무실 직원들이 애용하기 좋게 카페를 할 생각이었기에 자신의 그림에 맞는 건물을 찾느라 발품 꽤나 팔아야 했다.

    지친 다리를 잠시 쉬기 위해 들어갔던 카페에서 경우는 오랜만에 우재환을 마주했다.

    “작가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볼일 보러 왔다가 잠시 쉬려구요. 아, 그러고 보니 사계절 엔터가 이 근처였죠?”

    “네. 오랜만에 봬서 반가운데 커피는 제가 사 드릴게요.”

    “좋습니다.”

    김강철은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켜 주자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런데 우재환의 얼굴이 어쩐지 밝지 않았다. 꼭 어딘가 걱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무슨 일인가 싶어 경우가 그에게 물었다.

    “배우님, 혹시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 죄송해요. 제가 딴생각에 좀 빠졌네요.”

    “괜찮으시면 저한테 말씀해 보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잖아요.”

    “그게…….”

    잠시 망설이던 우재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른 건 아니고 저희 실장님 때문에 좀 곤란해져서요.”

    “실장님이라면 하도섭 실장님? 하 실장님이 왜요?”

    “실은 얼마 전에 소속사로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거든요. 물론 저한테 들어온 건 아니고 회사 차원에서…….”

    “그런데요?”

    “시놉시스를 보니까 꽤 마음에 드는 역할이었어요. 잘할 자신도 있고요. 근데 하 실장님이 안 된다고 자꾸 말리셔서요.”

    “말려요? 왜요?”

    “하실장님은 지금까지 신인 배우를 키워온 노하우가 있으신데 신인일수록 영화보다는 TV에 주력하게 하시는 편이거든요. 그리고…….”

    “그리고요?”

    “영화감독님이 이전 작품, 결과가 좀 안 좋아서 불확실한 영화보다 드라마가 더 나을 거라고 하시네요.”

    <셀룰러 메모리>로 주목을 받았고 차기작도 중박을 터뜨리며 인지도를 높여 가고 있었지만 아직 소속사 입장에선 부족한 수준이었다.

    예능에 나가면 단박에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지만 신인인 탓에 이미지가 잘못 각인되기라도 하면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해서 하도섭은 차근차근 드라마로 시작해 연기력으로 인지도를 넓혀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뜻을 경우 역시 모르지 않았다.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일단 하 실장님께 말씀드리고 오디션이라도 보지 그래요. 제 생각이야 우 배우님은 당연히 오디션 보면 합격할 것 같긴 하지만 사람 운이라는 게 또 모르잖아요.”

    “그게…… 다음 드라마하고 촬영 시간이 겹쳐져서.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거든요.”

    “그래요?”

    아무래도 고민이 되겠다 싶은 경우는 불현듯 잊었던 무언가가 떠오르고 말았다.

    “저기 배우님, 혹시 마음에 든다는 그 영화 제목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비밀의 계단>이요.”

    헉!

    다른 것도 아니고 <비밀의 계단>이라니.

    오랜 무명을 거친 배우 우재환을 단박에 스타덤으로 올려놓았던 <비밀의 계단>. 신들린 그의 연기가 아직도 경우의 뇌리에 박혀 있건만.

    <셀룰러 메모리>의 차수혁도 우재환에게 잘 어울리는 편이었지만 <비밀의 계단>에서 그의 연기는 대체 불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재환과 잘 맞는 역할이었고 연기였다.

    그런데 이번 선택으로 그의 그 연기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니……. 경우는 자신 때문에 <셀룰러 메모리>에 출연한 그가 결국 대표작이 될 수 있는 영화에 출연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우재환이 이렇게 고민을 할 정도라면 이미 저쪽에선 드라마 제작진과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고집대로 할 수 없는 아직은 소속사의 뜻에 따라야 할 신인급 배우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미래에 이렇게 될 테니 영화를 놓쳐선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하던 경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만약 여기서 우재환이 <비밀의 계단>을 선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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