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69화 (69/250)
  • #69. 시체가 나타났다 (5)

    ‘여기가 어디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곳이었다.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병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는데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김강철이 들어왔다.

    “정신 들었냐?”

    “나 어떻게 된 거야?”

    “기억 안 나? 하여간 넌 당분간 술은 금지야.”

    “무슨 일이 있었냐니깐.”

    “무슨 일은. 네가 술 마셨다고 전화해서 데리러 갔는데 너는 없지. 전화는 길바닥에 깨져 가지고 있고. 너 찾느라 내가 그 동네를 얼마나 이 잡듯이 뒤졌는지 알아?”

    “그래서? 나 어디서 있었는데?”

    “거기 뒤쪽에 시장통이 있는데 얼마 전에 불이 나서 이번에 싹 리모델링하기로 했나 봐. 거기 쓰레기통 붙잡고 기절해 있었다. 차라리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시장 전체가 비어서 사람은 없고 설마 거기 있겠냐 싶었는데 그러고 있었으니 얼마나 식겁한지 알아?”

    “그랬어?”

    “그랬어? 야.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얘기할 게 아니야. 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내가 널 발견했을 때만 해도 비를 너무 맞아서 벌벌 떨고 있더라니까. 입술까지 파래서는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농담 아니라 너 당분간 술은 금지야. 알았냐?”

    “알았어. 어쨌든 고맙다.”

    “으이구, 내가 못살아. 근데 거긴 왜 들어간 거야? 아무리 술기운이었다고 해도 딱 봐도 귀신 나오게 생겼더만.”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네가 그런데서 옛날 생각이 날 일이 뭐가 있는데?”

    김강철의 말에 경우가 미소 지었다. 민경우의 기억이 아닌 이은석의 기억이었으니 그곳은 오랫동안 할머니가 장사를 하던 시장통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가 뛰어놀던 곳이었다.

    작가는 작품에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고 하더니 다른 이름, 다른 사람이 되었어도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이런 식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퇴원해도 되지?”

    “아직 안 돼. 안 그래도 예전에 누님이 너 정밀 검사 받아 보라고 했는데 바쁘다고 못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검사도 싹 받고 그러자.”

    “다음에. 영화도 시작했는데 그럴 시간 없어. 큰 병 걸린 것도 아닌데 그냥 퇴원해.”

    “잔말 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그리고 영화 걱정은 할 거 없어. 내가 안 그래도 너네 회사에 다 말해 놨거든.”

    씩 웃는 그의 얼굴에 어쩐지 경우는 불안해졌다.

    “뭐야, 왜 그렇게 웃는 건데?”

    “그동안 일이 좀 많았냐? 남들 쉬어도 넌 안 쉬었잖아. 그래서 과로한 상태에서 술을 마셔 쓰러졌다고 했지. 당분간 안정을 취하고 쉬어야 한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그 김 대표님이 엄청 놀라시는 거 같더라.”

    “야!”

    “쉬어. 일도 쉬어 가면서 하는 거야. 알았냐?”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경우가 투덜거렸다.

    그런데 그 일의 다른 곳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민 회장이 경우를 보겠다며 병원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래, 몸은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요즘 일을 열심히 한다며? 일도 쉬엄쉬엄해야지. 몸 챙겨 가면서 해.”

    민 회장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고 있자니 경우는 문득 처음 민경우로 깨어나던 그날이 떠올랐다.

    아들을 보는 것 같지 않던 싸늘한 눈빛, 냉랭하기 그지없던 말투, 정신이 번쩍이게 만들던 매운 손맛까지.

    그런데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참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강철이가 괜히 그러는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제야 문 앞에 선 채 웃음이 나오려는 참는 김강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민 회장까지 출동을 한 건지…….

    경우는 눈빛으로 그에게 욕을 해 대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긴. 확실히 전에 비해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이번 참에 검사도 받고 그러도록 해. 아예 네 외가 병원으로 옮기지 그러냐?”

    “아니에요. 괜히 다른 사람들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여기 있을게요.”

    “그래. 그건 너 좋을 대로 하도록 해라.”

    뒤늦게 자신이 입원했다는 사실이 기사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아버지에 이어 누나는 물론, 자선 경매 행사에서 만나 함께 저녁을 먹었던 강미란과 임채린까지 문병을 오자 자신의 달라진 위상을 체감할 수 있었다.

    * * *

    “과로로 쓰러졌다고 하더니, 며칠 쉬어서 그런지 얼굴은 오히려 좋아 보인다.”

    “영화는 어쩌고 오셨어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민 작가가 이러고 있으니까 일이 손에 잡혀야 말이지.”

    “그래서 퇴원하기 전날 오신 겁니까? 안 왔다가 제가 삐칠 것 같아서 얼굴도장 찍으러 오신 거 아니구요?”

    “다 들켰냐? 이래서 작가들은 속여 먹을 수가 없어요.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가거든. 확실히 네가 요즘 핫하긴 한 모양이야. 과로로 쓰러져서 입원했다고 기사까지 날 거 뭐 있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보다 영화 말인데요. 제가 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봤거든요.”

    경우는 그날 시장통에서 상상했던 장면들을 박종연에게 이야기했다.

    생각보다 생생한 이야기에 박종연이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너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어떻게 그런 집안에서 이런 놈이 태어났대? 작가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런가요?”

    “그래.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시나리오상 나와 있는 같은 부분도 다르게 보이지. 너 이참에 영화감독 해 볼 생각 없냐?”

    “예? 무슨 그런 말씀을. 지금 스크립터 하는 것도 고되거든요.”

    “고되기는. 그런 것 치곤 재미있어하더만.”

    “그거야 절 부려먹고 싶은 감독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하여간 한마디를 안 져요. 내가 볼 땐 너 영화감독도 충분해. 내가 괜히 초짜 불러다가 스크립터로-.”

    경우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박종연이 말을 멈췄다.

    “감독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네가 잘못 들은 거야. 어, 잘못 들었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기분 탓이지, 기분 탓. 어쨌거나 말 나온 김에 시나리오를 조금 수정하는 게 어때? 네가.”

    “예? 제가요?”

    “어. 방금 네가 말한 이야기 난 좋았다. 그걸 바탕으로 우리 시나리오를 조금 더 다듬자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감독님이 쓰신 시나리오를 제가 어떻게…….”

    “부담스러울 거 없어. 그냥 소신껏 적절히 수정을 해 보란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웃겨. 재벌집 아들이 돈이 없어 좌절하는 서민들 심정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냔 말이지.”

    “…….”

    “정 부담스러우면 같이 해 보자. 그 정도는 괜찮지?”

    “네.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도와야죠.”

    “아무리 봐도 이건 감독 재질-.”

    “감독님!”

    “야, 너 작가 하다가 감독 된 사람 여럿 있어. 왜 그러는 줄 아냐?”

    “왜 그러는데요?”

    “남한테 자기 대본 맡기다가 못해 먹겠다는 거지. 그런 의도로 쓴 거 아닌데 엉뚱하게 연출해 놓은 거 보면 흥분 안 하겠어? 그렇게 시작하는 사람들 많아. 작가 출신 감독 꽤 되잖아.”

    “저는 안 합니다. 글 쓰는 걸로 충분해요. 훌륭하신 감독님들도 많은데 제가 뭘 나섭니까?”

    “그거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어쨌든 내일 퇴원하지. 퇴원하면 바로 작업 들어가자.”

    “가만 보면 완전 악덕 상사 같-.”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웃음으로 무마했지만 박종연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으니.

    어쨌든 경우는 이번 일을 통해 마음먹은 게 한 가지 있었다.

    그동안 재벌 생활에 너무 빠져들어 성공에만 집착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 것이다. 시청률이 높게 나왔던 드라마들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을지만 생각하고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소재와 장면을 은연중 넣어 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원래 그가 왜 드라마를 쓰고자 했는지 그 마음을 잊은 것 같았다.

    김해영 작가에게도 시청자가 공감하는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해 놓고 정작 자신은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였다. 자극적인 이야기가 아닌 사람 냄새 나는 그런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다음 날 퇴원을 한 경우가 출근을 하기 전 들른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납골당이었다.

    그동안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할머니를 찾아뵙지 못했다. 자신의 기억 속 할머니가 그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사진 속 할머니 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은 아니었지만 그의 기억 속 할머니는 그대로였다.

    “할머니, 나 왔어. 그동안 내가 안 와서 서운했지? 미안.”

    한참 들여다보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 떠들어 댔다. 마치 살아 계신 할머니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그렇게 실컷 이야기를 하고 납골당을 나서는데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민경우?”

    고개를 들어 보니 거기엔 이은석이 서 있었다. 그의 생일날 짜장면 집에서 만난 후로 종종 통화를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어, 아는 분이 여기 계셔서 보러 왔어. 그러는 넌.”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여기 우리 할머니 계시거든. 인사나 하고 갈래?”

    “그, 그래.”

    경우는 이은석을 따라 방금 전 다녀간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어? 누가 왔었나? 국화, 우리 할머니가 좋아하는데. 근데 올 사람이 없는데…….”

    경우가 놓고 간 꽃을 이은석이 의아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할머니라고 친구 하나 없으시기야 하겠냐. 친구분이 오셨나 보지.”

    “그런가? 그나저나 할머니 친구가 아직도 살아계셨는 줄은 몰랐네. 어쨌든 인사해. 우리 할머니셔.”

    “아…… 안녕하세요.”

    “할머니. 이쪽은 내 친구 경우.”

    조금 전의 자신처럼 이은석 역시 할머니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에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경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사고가 나기 전에 자신은 이은석이었지만 지금은 민경우가 되어 버렸는데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은석은 원래 어떤 존재였을까?

    너는 누구니? 원래는 누구였는데?

    그러자 이은석이 천천히 돌아보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경우는 문득 그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졌다.

    * * *

    사무실로 출근한 경우는 박종연의 도움 아래 <시체가 나타났다> 수정 작업을 시작했다. 영화는 훨씬 더 현실적이면서도 진지하게 접근했다.

    수정 작업을 마치는 대로 그동안 미뤄졌던 본격적인 촬영 일정이 잡히기 시작했다.

    마침내 크랭크 인이 시작되자 경우와 박종연 두 사람의 협연으로 진지한 메시지를 가짐과 동시에 현실을 날카롭게 비꼬는 영화의 형태가 서서히 갖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경우의 작풍이 바뀌게 되는데 시청률이나 화제성에 연연하는 이야기가 아닌, 단순히 겉만 보고 흉내 내는 이야기가 아닌, 진짜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을 가지고 쓰는 작가로 경우는 거듭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미국에서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제임스가 제작한 드라마 <크리미널 리포트>가 높은 시청률과 화제를 기록하며 시즌 2를 제작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시즌2 역시 투자를 하기로 결정한 경우는 또 다른 중대한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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