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시체가 나타났다 (4)
“꼼짝 말고 있으라니까 얘는 또 어디로 간 거야?”
김강철은 술집 주변을 샅샅이 찾아봤지만 경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혹시 그사이 대리라도 불러 집으로 가버린 게 아닌가 싶었으나 경우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주차 되어 있었다.
그나마 음주 운전은 하지 않은 모양이라며 안심했다.
“하여간 이 자식은 술만 마시면 꼭 무슨 사달이 난다니까.”
아까부터 받지 않는 경우의 전화로 계속 전화를 걸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어렴풋하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김강철은 소리가 난 곳을 찾아 천천히 다가갔다.
마침내 바닥에 떨어진 경우의 전화기를 찾아낸 김강철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아래쪽에서부터 쫙 금이 간 액정 탓인지 뭔가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화면엔 술에 취해 짐승의 꼴을 한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었으니. 그 사진에 김강철은 흠칫 놀랐다.
“하여간 이 새끼, 이 사진 지우라니까.”
사진을 삭제하려 했지만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탓에 잠금을 해제하지 못한 김강철은 짜증이 치솟았다.
“잡히기만 해 봐라. 가만두나.”
말과는 달리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걱정하던 그때, 후드득후드득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이 더욱 초조해지고 있었다.
* * *
어둠에 익숙해 질수록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경우는 골목길 안쪽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쓰러진 의자, 깨진 유리창,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버려진 그릇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 같은 식당은 비어 있는지 오래되어 을씨년스러웠다. 주변의 몇몇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재개발이라도 하는 듯 사람이 떠나 온기가 하나도 없는 그곳은 시체가 나온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분위기였다.
경우는 그곳에 서서 가게 안을 바라봤다.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는 시장통 골목길, 추적추적 내리는 비, 거기다 기분이 좋아 평소보다 많이 마신 술까지……. 급기야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낮이고 밤이고 심지어 꿈에서까지 영화 생각만 하다 보니 영화에 딱 맞는 분위기를 보자 절로 영화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저쪽 모서리가 닳은 테이블엔 소주 한 병과 오이, 당근이 담긴 접시를 앞에 둔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오래된 가게의 전경이 영화 속 주인공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시체가 나타났다>는 숙취에 잠이 깬 주인공이 자신의 방 안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검은색 보스턴 가방을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처음 보는 낯선 가방, 자신의 것이 아닌 게 분명한 이 가방이 무언가 싶어 주인공은 열어 보다 그만 놀라 넘어진다. 가방 속에는 사람의 잘린 팔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가방이 어디서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왔는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경우가 쓴 단막극 대본엔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지만 박종연이 시나리오를 고치면서 달라진 탓에 경우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좁은 골목길로 들어온 순간, 대로변과는 이질적인 분위기 탓에 마치 자신이 영화 속으로 들어와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쪽저쪽에서 등장인물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침 비어 있던 저쪽 가게에 조명이 켜진 것처럼 밝아지자 한 남자가 술을 들이켜는 모습이 보였다. 경우는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갔다. 눈앞에 보이는 그는 분명 <시체가 나타났다>의 주인공 김이창이었다.
* * *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김이창은 빈 속에 소주를 들이켰다. 한 잔, 두 잔, 석 잔.
술이 뱃속을 돌며 서서히 열이 오르자 그의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잔 더 들이켠 그는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쁜 년, 네가 날 버리고 가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포기 못 해. 나는 너 절대 안 놔줄 거야!”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 그가 테이블 위에 5천 원을 내려놓고 허름한 가게를 벗어났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의 시작은 그의 동거녀 전수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김이창은 그녀가 떠나면서 자신에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집에는 왜 안 들어오는데? 너 요즘 어디서 지내는 거야?”
“집? 우리가 언제 집이 있었다고? 네가 무능력해서 돈도 못 벌어와, 내가 넣은 보증금까지 다 까먹고 쫓겨날 일만 남은 그 집 말하는 거면 그거 너 가져. 난 필요 없으니까. 그리고 이제 나한테 신경 꺼.”
“신경 끄라니? 내가 어떻게 그래?”
“너랑 나랑 뭔데? 물론 같이 살기는 했지. 근데 어차피 혼인 신고를 한 것도 아닌데 싫으면 남남 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너, 설마 남자 생겼냐?”
“그걸 이제 알았어? 맞아, 나 남자 생겼어.”
“누구야? 그 새끼 누군데?”
“누군지 알면. 네가 어쩔 건데? 왜 하던 대로 주먹질이나 하게? 근데 어쩌냐? 그 사람은 너처럼 찌질하지 않아. 돈도 많고 능력 있어. 툭하면 주먹질에 술을 입에 달고 다니는 놈하고는 다르단 말이야.”
“돈 있는 놈은 뭐가 다른데? 그놈 너랑 나 같이 산 거 알면 눈 뒤집어질 텐데?”
“아니던데. 이미 말했거든. 네가 어떤 놈인지 같이 살아 봤으니까 내가 더 잘 알잖아. 그래서 얘기했어. 같이 살던 남자 있었다고. 괜찮대. 다 이해한대. 과거 없는 사람 어딨냐고 자기도 만나던 여자 있었다고 하더라.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을 거란 생각 좀 버려. 전화도 좀 그만하고. 뭐 안 그래도 전화 번호는 바꿀 거지만.”
“너, 나 없이 살 수 있어?”
“무슨 신파 찍니? 당연히 살 수 있지. 그것도 호의호식하면서! 그러니까 알았으면 좀 꺼져 줄래.”
언제는 사랑한다고, 자기 없으면 못 산다고 하더니.
그녀가 변한 건 결국 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썩을 놈의 돈만 있으면 그녀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그때 그녀를 차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었으니 뭘 하면 돈이 생길지 궁리를 하고 있는 그때, 그의 귀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얘기 들었어? 시장통 국밥집 박 사장 말이야.”
“박 사장이 왜? 요즘 신수가 훤해졌던데…… 설마 로또라도 당첨된 거야?”
“로또는 아니고 어쩌다 운 좋게 국밥집이 방송을 탔다는 거 아냐. 그래서 식당에 손님들로 바글바글한다더구만. 요즘 돈을 긁어모은다지, 아마?”
“그런 운은 왜 박 사장한테만 오는 거야? 이럴 게 아니라 국밥집으로 가자고. 술이나 한잔 얻어먹어야지 가만히 못 있겠어.”
“아서라. 박 사장이 얼마나 짠돌인지 알면서 그런 소릴 해? 식당이 대박 나면 뭐 해? 그렇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도 아니더구만. 박 사장 너덜너덜해진 20년도 더 된 티셔츠 입고 다니는 거 못 봤어? 그 인간한테 술 얻어 먹을 생각일랑 접어.”
“하여간 그 인간 죽으면 시체도 안 썩을 거야. 하도 짜서.”
“내 말이. 오죽했으면 은행도 못 믿어서 번 돈을 집에 쟁여놓고 있는다잖아.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놈의 집구석, 홀라당 다 타 버려라.”
“에끼, 이 사람. 누가 들어.”
“들으라지.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인간은 뭔 탈이 나도 나게 돼 있는 법이야.”
박 사장이라면 김이창도 알고 있었다. 배달을 다니며 그 국밥집 앞을 여러 번 지나쳤었다.
그런데 그 집이 대박이 났다고? 돈을 긁어모아?
김이창은 하면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박 사장이 집에 쟁여둔 그 돈을 훔치자고 말이다. 돈만 있으면 전수경이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남자들의 말마따나 돈을 훔친 후 집에 불을 지르면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 * *
김이창은 국밥집에서부터 박 사장의 뒤를 쫓았다. 식당에 몇 시에 출근을 하는지, 언제쯤 장사를 마치고 퇴근을 하는지, 달리 가는 곳은 없는지. 그렇게 파악을 한 뒤 돈을 훔치기로 작정한 날이 되자 긴장되는 마음에 손이 떨렸다.
술을 마시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안주도 없이 빈속에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김이창이 그러고 있는 사이 맞은편 가게에서도 한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영화 제작사에서 소품 담당 연출부로 일하고 있는 조민채였다.
그의 옆에는 검은색의 보스턴 가방이 놓여 있었다. 영화 속에서 쓰일 소품을 보며 오늘 감독에게 왕창 깨진 일을 떠올렸다.
사실 영화 속에서 쓰일 소품으로 필요했던 건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이었다. 영화 속 피해자의 특징이 왼손잡이였다나 뭐라나.
시나리오 어디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 자신이 몇 번이나 확인했을 땐 오른팔이었는데 어느새 왼팔로 바뀐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결국 며칠 동안 특수 분장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오른팔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다시 만드는 것도 문제였지만 애써 잡은 촬영 일정이 자신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며 스탠바이 하는 동안 들어가는 돈이 얼만지 아냐고 소리치던 제작 PD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놈의 영화사 확 그만둬 버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랬다가 이 바닥에 발도 못 디딜 게 분명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것뿐. 맨 정신으로는 힘들 것 같아 술기운을 빌어볼 참이었다.
어느새 취기가 오른 그는 살짝 비틀거리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한 발 한 발 걸어가던 그때, 앞에서 오던 한 남자와 그만 부딪치고 말았다. 그 탓에 손에 들고 있던 보스턴 백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가방을 주우려던 그때 누군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김이창이었다.
“이봐,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사과를!”
“나만 잘못했나? 그쪽도 잘못한 거 아니에요? 이런 건 쌍방과실이라고요.”
“뭐? 쌍방과실. 너 지금 내 앞에서 문자 쓰냐? 나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아니, 이 아저씨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평소라면 싸우지 않았을 일.
하지만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두 사람은 결국 사소한 일로 주먹질을 하기 시작한다. 입술이 터지고 얼굴에 멍이 들고…….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불행이 눈앞의 사람 때문이라는 것처럼.
그렇게 싸우던 끝에 지칠 대로 지친 두 사람은 결국 나란히 바닥에 누워 버렸다. 잠시 후 먼저 정신을 차린 김이창이 일어났다. 눈도 뜨지 못한 채 기절한 듯 잠든 듯 누워 있는 조민채를 보며 그의 보스턴 가방을 챙겨 들고 떠나 버린다. 돈을 훔치지 못했으니 그 책임을 물러 가방이라도 챙겨야겠다면서.
다음 날, 누군가와 싸웠다는 기억만 어렴풋이 난 김이창은 처음 보는 보스턴 가방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생각한다. 자신이 누군가와 싸우다 사람을 죽인 게 아니었을까?
여기서부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참이었다.
* * *
마치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막이 내리고 조명이 꺼지듯 경우가 서 있는 곳은 다시 어두컴컴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래,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야. 주인공은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한 채 오해와 오해를 거듭해서 결국엔 그런 불행한 결말을 맞았던 거지.
상상 덕분이었는지 박종연이 고친 시나리오 속 주인공의 심정이 조금 더 이해되는 것 같았다.
어느새 비로 쫄딱 젖은 경우는 몸을 떨며 골목길을 벗어나기 위해 돌아섰다. 그런데…….
다시 돌아보니 경우는 어쩐지 이 장면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아니 오래된 기억 속의 한 장면처럼 드문드문 무언가가 떠오르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 한 소년이 뛰어가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아이 같은데 누구지?
아이가 돌아봤다. 아이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어린 자신이었다. 비로소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그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