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시체가 나타났다 (3)
주최 측에서 얻어온 흰 장갑까지 낀 경우는 방금 낙찰 받은 두루마리 족자로 된 붓글씨를 무슨 보물이나 되는 듯 소중하게 대했다.
“네가 서예를 이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아니, 뭐……. 잘 썼잖아.”
“그래?”
시큰둥한 누나의 반응에 경우는 음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자, 이 붓글씨로 말하자면 낙관이 없는 관계로 송나라 시대 이름 모를 서예가의 글씨로 추정했지만 사실 소동파의 제자로 알려진 황정견의 글씨였다.
서예 애호가인 어떤 남자가 이 붓글씨를 낙찰받은 후 마음에 들어 오래 보관하기 위해 족자 형태를 액자로 바꾸기로 한다. 족자를 떼고 조심스럽게 배접지를 떼어 내는데 무슨 이유인지 아래에 접혀 들어갔던 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거기에 숨겨진 낙관이 나오면서 작가가 밝혀지게 된다.
그가 바로 북송 때 시인 황정견이었으니 그야말로 서프라이즈.
경우는 글씨 옆 작은 얼룩을 보고 이전 생의 인터넷으로 봤던 그 글씨임을 확신했다.
사실 그는 서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이 붓글씨를 기억하고 있었던 건 중국 미술품 경매 사상 황정견의 글씨가 최고가를 찍었다는 뉴스 토픽 때문.
당시 그는 보증금이 올라 이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7천만 원은커녕 700만 원도 없어 허덕이는데 글씨 하나에 770억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도대체 황정견이 누군지, 그의 서예가 어떤 건지 일부러 찾아보게 된 것.
그러다 우리나라 자선 경매장에서 나온 작품이 뒤늦게 황정견의 작품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쨌든 집안 대대로 물려주겠다는 새 소유주의 뜻에 따라 정확한 값어치는 매겨지지 않았지만 이 작품 역시 상당히 높은 가격에 거래될 거란 기대감에 부풀었다.
금칠을 했다고 해도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어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대단한 작품을 손에 넣었으니 경우는 꼭꼭 감춰 두었다가 필요할 때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 소린 또 뭐야? 아이디어가 있다니? 네가? 너 쇼핑도 싫어해서 사다 주는 옷만 입잖아.”
“그러니까. 남자들은 보통 쇼핑을 좋아하지 않아. 따분하거든. 그래서 이번 복합 쇼핑몰에 남성 고객들이 체험할 수 있는 특화 시설의 비중을 확대하는 거지. 외식을 해도 애 있는 집 부부들은 놀이방이 있는 식당을 더 선호하는 것처럼.”
“식당에 놀이방이 있어?”
애를 키워 본 적 없으니 이런 곳에서 티가 났다. 놀이방을 갖춘 어린이 전문 병원도 늘어나는 추세거늘. 경우는 이런 쪽에 문외한인 누나를 보며 잠시 혀를 찼다.
“편하자고 외식하는 건데 애 때문에 더 고역이 되면 안 되잖아. 아무튼 쇼핑을 싫어하는 남자들도 쇼핑 가자는 여자들 말에 선뜻 따라나설 수 있는 그런 복합 문화 공간이 돼야 한다고. 백화점에 스크린 골프장 같은 거 없잖아.”
“그렇지.”
“근데 쇼핑몰에 스크린 골프장이 있다고 생각해 봐. 아내가 화장품 고르는 사이에 남편은 스크린 골프장에 가는 거야. 그리고 바로 옆엔 골프웨어 매장이 있는 거고. 그럼 매출로 이어지지 않겠어? 골프장만이 아니라 클라이밍이라던지 서핑이라든지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레저 스포츠 규모를 늘리면 좋잖아.”
민지선은 경우의 말을 끊지 않고 적당히 호응해 주며 듣고 있었다.
백화점이나 아울렛과는 다른 규모였기에 민지선은 이미 그쪽으로 준비를 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싼 돈을 준 전문가들 못지않은 경우의 의견을 들으며 동생의 남다른 식견에 감탄하고 있었다.
경우야 물론 남성 위주 체험 쇼핑몰이 주변 쇼핑몰보다 더 큰 매출을 올렸다는 기사를 떠올린 거였지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바로 그때였다. 여자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경우가 낙찰받은 작품의 원주인, 임채린이 서 있었다.
“어머, 사모님. 안녕하세요.”
“그래요, 민 대표. 오랜만이에요.”
경우가 어리둥절해하자 민지선이 그의 옆구리를 툭 치며 슬쩍 알려줬다.
“그 붓글씨 원 소유주, 한경병원 원장 사모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경우가 즉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자신이 자선 행사에 내놓은 이 붓글씨가 엄청난 고가라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경우는 궁금해졌다.
“안녕하세요, 민경우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민 작가님. 요즘 웬만한 연예인보다 유명하다죠.”
“부끄럽습니다.”
“그러라고 꺼낸 말 아닌데. 사람들은 누구나 달라지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쯤은 이야기해 보고 싶었어요.”
“과찬이십니다.”
“동생분이 듬직해서 참 좋으시겠어요, 민 대표.”
“네, 요즘 더 그런 기분을 느끼네요.”
“근데 사모님, 이 작품 어떻게 입수하게 되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일본 여행을 갔다가 골동품 취급하는 곳에서 샀어요. 글씨를 보는 순간 마음에 들었거든요. 누가 쓴 건지 낙관이라도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어쨌든 민 작가 잘 보관해 줬으면 좋겠어요.”
“네. 잘 간직하고 있다가 뜻깊게 쓰겠습니다.”
경우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임채린이 미소 지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한석인 의원 사모 강미란과 장석제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장석제에 비해 강미란의 얼굴은 냉랭하기만 했다.
마침 강미란이 이쪽을 바라보자 임채린이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
“여사님, 여기요!”
임채린의 부름에 강미란은 장석제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이들 무리가 있는 쪽으로 와 버렸다.
굳어지는 장석제의 얼굴에 민지선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곤란해하시는 것 같아서 일부러 불렀는데 무례한 거 아니죠?”
“그럼요, 고마워요, 여사님.”
“안녕하세요, 사모님.”
“민 대표 오랜만이에요. 민 작가님은 처음이죠?”
“네, 처음 뵙겠습니다. 민경우라고 합니다. 오늘 경매품 중 최고가 기록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경우의 너스레에 강미란이 눈을 흘겼다.
“그거야 결국은 작가님 덕인데, 솔직히 좀 짓궂으신 거 아닌가요?”
“무척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그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던 것뿐입니다. 어차피 좋은 일에 쓰일 돈이니 이왕 많이 내면 좋지 않겠습니까.”
경우의 대답에 강미란이 소리 내 웃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다 작가님 덕분이에요.”
동생이 이렇게 사교적이었나 오늘 여러 번 감탄하는 민지선은 허탈해하는 장석제를 보며 속담 하나를 떠올렸다.
죽 쒀서 개 줬네.
“이럴 게 아니라 저녁이라도 같이하는 게 어때요? 최고가 나온 기념으로 제가 사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정시 국회의원 한석인의 사모와 저녁을 먹을 수 있단 사실에 민지선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의 흑심을 본 경우가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주의를 줬다.
“누나, 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혹시라도 그 사모 앞에서 이상한 말 하지 마. 아까도 봤지? 장석제 별로 안 좋아하는 거. 무슨 이유 때문에 여기 온 건지 잘 아는데 자중해.”
“그래도 이게 어떤 기횐데, 입 꾹 다물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럼 목표를 바꿔.”
“목표를? 어떻게?”
“보통 꿈을 크게 가지라고 하잖아. 그런데 실패하면 타격이 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고. 그러니까 일단 목표치를 낮게 잡는 거지. 가령…….”
“가령?”
“어떻게든 이 사업권을 따내겠다는 생각보다는 누구 하나는 떨어뜨린다.”
“누구 하나를 떨어…… 장석제?”
“그렇지.”
돌이켜 보면 민지선은 썸 어패럴 인수 문제 때문에 민 회장의 떨어진 신뢰를 만회해 보겠다며 무리를 했던 게 패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새명에 유리한 것도 아니었으니.
경음으로 기운 사업체 선정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다 생각한 경우는 차라리 누나가 기대감을 버리는 편이 낫지 않나 싶었다.
물론 민지선은 장석제가 떨어지면 당연히 자신이 선정될 거라 생각했겠지만.
도착한 레스토랑에서 민지선은 경우의 조언에 따라 일부러 복합 쇼핑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행히 식사 분위기는 대체로 좋았다.
“근데 남매가 참 사이가 좋아요.”
“동생이 어렸을 땐 말을 안 들었는데 요즘은 철들었는지 예전보다 더 좋게 지내고 있어요.”
“참, 임 여사님도 남동생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나이를 먹어도 동생은 늘 물가에 내놓은 것 같죠.”
공감한다는 듯 지선이 미소 지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임채린은 피곤함 탓에 씻지도 못하고 소파에 누웠다. 그러다 생각이 났다는 듯 일어나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어, 정수야. 밥은 먹었어?”
임채린에게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개인 사생활에 대해선 일절 말하지 않는 그녀의 성향 탓이기도 했거니와 그의 남동생이 행복청 소속의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청탁이 있지 않을까 조심한 것도 있었다.
LH와 함께 이번 복합 쇼핑몰 사업을 주도하는 곳이 행복청이었다. 당연히 사업체 선정을 하는 일에 그 남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평소 동생과 통화하는 걸 즐겨 한 임채린은 민지선, 민경우 남매를 보며 동생이 떠올렸고 내친김에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들려주기 시작했다. 특히 쇼핑몰의 컨셉에 대한 경우의 말을 엿들었던 그녀는 자신의 호감 섞인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될지 알지 못했다.
* * *
“강범석 배우님?”
박종연이 <시체가 나타났다> 주인공으로 염두에 둔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보내 놨다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마침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는 박종연은 배우 미팅에 함께 가지 않겠냐며 경우에게 제안한 참이었다. 당연히 주인공을 맡을 배우가 누구인지 궁금해 최기원과 함께 박종연을 따랐던 경우는 약속 장소에 다른 사람도 아닌 천만 배우 강범석이 등장하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셀룰러 메모리> 촬영이 1년도 더 지났군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작가님?”
“저야, 잘 지내죠. 근데…….”
“작가님께 아직 말씀 안 드렸어요?”
“두 사람 인연이 있는데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비밀로 했지. 어떠냐? 우리 영화 주인공으로 강범석 배우, 괜찮은 거 같아?”
“괜찮은 게 아니라 두 팔 벌려 환영이죠.”
“실은 원래 범석이를 주인공 시킬 생각은 없었어. 범석이 소속사 유재성이 괜찮을 것 같아서 시나리오 보냈던 건데 난데없이 이놈이 나타난 거잖아.”
“감독님, 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이런 좋은 시나리오가 있었으면 저한테 먼저 보내셨어야죠.”
“자주 같이 일하면 좀 그렇잖아. 누구의 페르소나네 뭐네. 몇 번 일했다고 그러는 거 좀 우습지 않아?”
그러고 보니 강범석의 첫 데뷔가 박종연이 조연출한 영화였다. 박종연의 입봉 영화 주인공이 강범석이기도 했고. 그만큼 두 사람의 인연은 깊었다.
<시체가 나타났다>의 주인공은 온갖 불행이 따라다니는 인물이었다. 되는 일 하나 없고 뭘 하려 해도 되지 않는다. 주인공의 연기가 받쳐 주지 않으면 자칫 분위기가 무거워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영화는 사회 부조리에 초점을 맞춘 사회 고발 프로그램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영화는 어쨌든 오락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러니 강범석이라면 이 웃픈 상황에 웃음을 유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 통해서 시나리오가 들어왔길래 제가 가로챘습니다. 재성이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원래 작품마다 주인이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작품 욕심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실은 원작자가 민 작가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한 번은 작가님하고 다시 일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감독님 작품이 될 줄은 몰랐지만요.”
“뭐야, 나 때문이 아니야?”
“당연히 감독님 작품이니까 최종 선택한 거죠.”
삐친 척하는 박종연을 달래며 저녁 식사 자리는 그대로 술자리로 이어졌다.
서로 권하고 마시고……. 간단히 저녁만 먹고 빠지려 했던 경우는 결국 술이 거나하게 취해 버렸다. 대리를 부를까 했던 경우는 장난기가 발동해 김강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근 후에는 전화 쫌 하지 말라니까!]
짜증 가득한 놈의 목소리에 경우는 피식피식 웃었다.
“깡철아. 난 네가 짜증 내면 왜 이렇게 즐겁지? 너의 고통은 나의 즐거움. 흐흐.”
[너 술 마셨냐? 설마 운전하는 거 아니지?]
“안 했어. 사람을 뭘로 보고. 대리 부를 거야. 가만있어 봐, 전화번호가…….”
[됐어. 거기 어디야, 내가 갈 테니까 꼼짝 말고 있어.]
지금 같은 시기에 혹시나 음주 운전이라도 할까 봐 예민했던 김강철은 혀 꼬부라진 경우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해 한쪽에 걸터앉았는데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길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 봤더라면 평범했을 텐데, 밤이라 그런지 빛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골목이 마치 차원이 다른 세계로 이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그 골목을 바라보고 있던 경우는 휴대폰이 떨어질 줄도 모른 채 귀신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서 천천히 그 골목 속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어둠 속으로 경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