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66화 (66/250)
  • #66. 시체가 나타났다 (2)

    박종연 감독의 새로운 시나리오가 완성되자 가장 바쁜 것은 이제 막 조감독을 맡은 최기원이었다. 스탭을 꾸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캐스팅은 물론 시나리오 분석하는 것까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덕분에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았다.

    특히 막내인 줄 알았던 스크립터가 돈줄을 쥐고 투자까지 하고 있는 제작사 대표라면 더욱. 가뜩이나 조감독이 처음이라 걱정이 많은데 상전으로 모셔야 하는 막내라니…….

    일도 못하는데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인턴, 참교육하겠다며 갈궜는데 알고 보니 회장님의 귀한 외손자였다는 사실을 안 사원의 기분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나마 경우가 배려해 주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

    순풍에 돛 단 듯 순항할 거라던 연초 점괘를 떠올리며 복채로 줬던 5만 원을 돌려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든 <시체가 나타났다> 영화 팀에서 경우가 맡은 포지션은 스크립터. 막내의 탈을 쓴 이 상전에게 최기원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는 중이었다. 드라마를 쓴 경험 덕분인지 경우는 스크립터 일을 빠르게 습득해 갔다.

    “스크립터는 모든 것을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프리 땐 씬 리스트 작성할 건데 그건 저랑 하시면 되고요. 촬영 들어가면 카메라 렌즈는 뭘 쓰는지, 카메라 워크는 어떻게 되는지 소품 위치 같은 거 다 적어야 합니다.”

    “카메라 렌즈도 종류가 다양하군요. 미리 숙지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예전 TV에서 옥의 티 찾는 것처럼 물건이 위치가 바뀌었다든가 그런 거 맞죠?”

    “네, 거기 나온 건 연결이 제대로 안 됐다는 거죠. 그 문제에 까다로운 감독님들도 많아요. 그래서 다들 스크립터한테 물어보죠. 그러니까 기록을 해서라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드라마에도 스크립터는 있는데 막상 제가 하려니 생각보다 까다롭네요.”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직접 해 보는 것 사이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그 사실을 경우는 여실히 깨닫는 중이었다.

    “대신에 영화 돌아가는 전반적인 걸 알 수 있죠. 그래서 감독님이 그 자리를 추천하신 건가 봅니다. 촬영 들어가면 감독님 옆에 꼭 붙어 기록하시면 됩니다.”

    우선 씬 리스트를 작성해 보자며 경우와 머리를 맞대고 있던 그때 박종연이 다가와 콘티를 내밀었다. 기대감에 콘티를 펼쳐보던 경우에게 박종연은 은근히 물었다.

    “어제 데이트는 어땠냐?”

    “데이트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남자 여자 만나서 저녁 먹으면 데이트지, 데이트가 별거냐? 그 여자 너한테 마음 있다니까.”

    “아니에요. 모르셔서 그렇지, 강 검사 성격이 좀 별나거든요. 자기 입으로 그랬어요. 어려운 거 없이 자라서 막말한다는 소리 듣는대요. 사람 앞에 두고 대놓고 그런 말 하는 거 보면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겠죠.”

    “검사였어? 그렇게 안 보이던데?”

    “검사 하는 얼굴이 따로 있나요?”

    “그래서 너는? 같이 밥 먹을 정도면 아예 관심 없는 거 아닌 것 같은데?”

    “방패막이 같은 겁니다. 슬슬 선자리 들어오거든요.”

    “아, 아직 어린애구만. 소싯적에 같이 술 마셔서 그런가, 난 가끔 너랑 이야기하면 내 또래라고 착각이 들어서 말이야.”

    “개인사엔 관심 끄시구요, 일 얘기나 합시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뭐긴 보는 그대로 콘티지.”

    “졸라맨이요?”

    “어딜 봐서 졸라맨이냐?”

    “이 동그란 머리, 선 하나로 대체한 팔다리하며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졸라맨이 분명한데요.”

    “얘가 뭘 모르네. 원래 나 같은 천재들은 추상적으로 그리는 거다. 피카소처럼.”

    “그냥 그림 실력이 안 되는 거겠죠. 이럴 바에야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뭐 하러 감독님이 직접 그리십니까? 이런 거 보고 다시 그려야 하는 사람 심정도 좀 생각해 주시죠.”

    “힘들었어? 나는 조감독이 한 번도 그런 말 안 해서 몰랐지.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생각한 그대로 그려 놨길래 내가 선만으로 표현을 무지 잘하는 천재인 줄 알았잖아.”

    전문가가 최종 수정한 콘티 전 중간 단계의 콘티를 본 적이 있는 경우는 졸라맨을 만화가 수준의 그림으로 탈바꿈한 것이 최기원이란 사실에 감탄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조감독님 그림 엄청 잘 그리시는군요.”

    “어릴 때 만화 좀 봤거든요. 원래 좋아하는 건 끝까지 파는 성격이라 몇 번 따라 그리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조감독님이야 말로 천재 아닙니까? 대단하세요.”

    “봤냐, 내 조감독이다.”

    “괜히 감독님이 우쭐대지 마시죠.”

    “하여간 이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귀여운 맛이 없어.”

    박종연의 투덜거림에 경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전 생에선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우상이었건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콩깍지가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씬 리스트 작성 끝나는 대로 스케줄을 짜 보겠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배우 캐스팅인가요? 주인공으로 생각해 둔 사람 있으세요?”

    “있지. 벌써 시나리오 보내 놨는데?”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던 경우는 두 사람이 조연급 배우 캐스팅을 두고 논의하는 모습에 슬쩍 자리를 비켜 줬다. 최기원에게 받은 박종연의 이전 영화 씬 리스트를 보며 나머지 공부라도 하려는 그때, 누나 민지선의 전화에 그녀가 부르는 곳으로 달려갔다.

    * * *

    “뭐 재미있는 기사라도 났어? 아까부터 뭘 그렇게 들여다보는데?”

    “별거 아냐.”

    한동안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경우가 살짝 미소 지으며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김경진 작가와 정해용 감독 콤비가 ‘내일 프로덕션’과 결별하고 새로운 제작사에 둥지를 틀었다는 기사가 인터넷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유니언 스튜디오’는 홍보 차원에서 두 사람이 새로운 드라마 제작에 나선다며 그 소식도 전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설명에 사람들은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었다. 경우는 특히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기대감이 커질수록 실망감은 더 커질 테니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갈무리한 경우는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근데, 여기는 뭐 하는 데야?”

    “정재계 사모님들이 우아하게 사교놀이 하는 곳?”

    “응?”

    “좋은 일 한다는 명분 아래 돈 자랑하는 곳이야.”

    그러고 보니 행사장 한가운데 걸려 있는 현수막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자선 경매 행사?”

    “사모님들이 소유하고 있는 비싼 물건을 경매로 내놓는 거야. 수익금은 불우 이웃 돕기에 쓰는 거고. 그러면서 난 이런 것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좋은 일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겠다 이런 자랑도 되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여기 왜 온 건데?”

    “경매장에 왜 왔겠어? 경매하러 왔지. 너 돈 좀 있지?”

    “뭐야, 나보고 하라고? 누난?”

    “내가 돈이 어딨니? 사업하는 데 돈이 한두 푼 드는 줄 알아? 어려울 때 너 도와줬으니까 이럴 땐 군말 없이 돕는 거다.”

    “알았어. 근데-.”

    “여, 이게 누구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남매의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 돌아본 민지선의 인상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지난해 맞선을 봤던 경음 그룹의 둘째 장석제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다. 아, 이쪽이 최근 그 유명한 막냇동생? 준호는 종종 봤는데 이쪽은 처음이네. 반가워요. 나 누나랑 맞선 봤던 장석제라고 합니다.”

    “아! 민경우라고 합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널 보러 온 건 아니다만, 곧이곧대로 말했다가 서운해서 울면 안 되니까 그렇다고 해 두자.”

    “꺼져 줄래? 왜 왔는지 대충 감은 오네. 잘해 봐. 쉽지 않겠지만.”

    “너야말로. 사업권은 무조건 내가 따낼 거거든. 그러니까 괜한 데 힘 빼지 마.”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거지?”

    “그래? 뭐 나중에 후회해 봐야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럼 건투를 빌게.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약 올리는 듯한 말투에 민지선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해 갔다.

    “무슨 소리야? 사업권? 그냥 자선 행사에 온 게 아니야?”

    “내가 미쳤다고 고상한 사모님들 취미 생활 구경 왔겠어? 목적이 있으니까 온 거지. 고정시에 복합 쇼핑몰이 들어설 예정이거든.”

    “근데 그거하고 자선 행사가 무슨 상관이 있는데?”

    “고정시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한석인 의원 사모가 오늘 경매에 참석해. 이왕이면 한석인 의원 사모가 내놓는 경매품 낙찰받으려고.”

    “어차피 사업체 선정에 국회의원은 상관없는 거 아냐?”

    “그래도 쇼핑몰 들어설 지역구 의원인데, 사업체 선정하는 데 입김 정도는 불어넣지 않겠어?”

    “어째 난 그 반대일 것 같은데…… 영 내키지 않네.”

    “사업은 사업대로 제대로 할 거야. 대신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야 하지 않겠어?”

    “좋아. 근데 나는 왜 데리고 온 건데? 설마 돈 내라고 데리고 온 건 아닐 테고.”

    “그 사모가 드라마 좋아한대. 로맨스를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액션에 스릴러가 취향이시라네.”

    “아하. 나랑 취향이 좀 맞으시구만.”

    “낙찰받고 나면 이야기할 시간은 생길 거 아냐.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동생 덕 좀 보자.”

    “근데 저쪽은 왜 저렇게 자신만만해하는 거야?”

    “우리쪽은 아직 이런 복합 쇼핑몰은 처음이거든. 저쪽은 이미 경험이 있고.”

    적자만 나던 유통을 민지선이 대표 자리에 앉으면서 흑자로 돌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연히 규모가 큰 사업에 덤벼들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달라졌단 소리고.

    “경험 차이에서 밀린다?”

    “아무래도. 근데 쟤도 여길 온 것 보면 아예 잘못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업권을 따내야 돼. 대지 면적만 3만 평에 연면적은 11만평이라고. 부지 매입에 공사까지 8,000억 규모야. 이 정도 사업권 따내면 아버지도 나를 다시 보지 않겠어?”

    옷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영화관, 서점, 게임 센터는 물론 문화와 레저까지 갖춘 복합 쇼핑몰.

    이미 그곳을 경험해 본 기억이 있는 경우는 민지선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전 생의 기억을 떠올려 봤을 때 이 사업권을 따낸 쪽은 새명이 아니었다. 경음이었지.

    이전 생의 장석제는 소탈한 재벌의 소통 행보를 보여 주며 SNS에 열중했다. 일일이 받아다 옮긴 기사 탓에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아 버렸다. 다행히 그 일이 지금 도움을 줄 줄은 몰랐지만.

    솔직히 누나 일이 아니라고 해도 장석제는 좀 밥맛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반드시 사업권을 따내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경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경매에 올라온 물건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자, 이번에 나온 물건은 주경도 명인이 빚은 백자입니다.”

    “저거야, 저거 꼭 낙찰받아야 해.”

    “500만 원부터 시작합니다. 500, 600, 700, 천만 원 나왔습니다.”

    눈빛을 불태우는 누나의 모습을 슬쩍 본 경우가 팻말을 들었다.

    “1억!”

    경우가 지르자 민지선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조차 놀라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경매장이 슬슬 흥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네, 1억 나왔습니다.”

    그러자 인상을 팍 쓴 장석제가 팻말을 들었다.

    “1억 1천!”

    “네, 1억 1천. 다른 분 안 계십니까?”

    “1억 5천!”

    “네, 1억 5천 나왔습니다.”

    랠리에 가까운 두 사람의 경쟁에 주변 사람들도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지지 않겠다는 듯 장석제의 모습에 경우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

    “2억 9천.”

    “네, 2억 9천 나왔습니다. 더 안 계십니까? 5초 이상 나오지 않으면 그대로 낙찰입니다.”

    “야, 너 왜 가만히 있어?”

    “누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뭐?”

    “네, 2억 9천만 원에 낙찰되셨습니다.”

    장석제가 제시할 수 있는 금액이 최대 3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경우는 2억 9천이 나오자 랠리를 멈췄던 것이다.

    결국 500만 원에 나온 백자는 2억 9천만 원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장석제의 품으로 돌아갔다. 의기양양해하는 그의 모습에 민지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도와달라고 했지, 남 좋은 일 시키라고 널 데려왔는 줄 알아?”

    “누나, 앞만 보지 말고 넓게 봐. 저거 낙찰받는다고 사업권 따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결국 저게 독이 될 수도 있어.”

    “…….”

    “지금은 웃고 있지만 아무 쓸모도 없는 천만 원짜리 도자기 2억 9천에 샀다는 걸 깨달으면 속 꽤나 쓰릴 거야.”

    한석인 의원의 사모가 좋은 취지에서 500만 원에 내놓은 도자기의 실제 가치는 천만 원. 장석제는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을 거라 여기겠지만 한석인 의원이라면 모를까 그 사모는 생각보다 강직한 여자였다.

    의기양양한 장석제의 모습이 꼴 보기 싫었지만 이렇게 단호한 모습을 보일 때면 경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민지선은 경우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잠자코 있었다.

    “누나, 쇼핑몰 사업 제안서 벌써 제출한 건 아니지?”

    “아직 아니지. 근데 왜?”

    “나한테 아이디어가 하나 있어서.”

    하루 종일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씬 리스트를 작성해서 그런지 핵심, 효율적이란 말이 머릿속에 남은 경우는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랐다. 그거라면 사업권을 따내는 것까진 몰라도 도움은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 다음은…….”

    다음 경매 물건이 나오자, 경우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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