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65화 (65/250)

#65. 시체가 나타났다 (1)

“나 없는 사이에 완전 유명인이 되어 있더라?”

“예. 그 일로 아주 피곤했습니다. 여행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시나리오 완성하셨구요?”

“그래, 여기.”

박종연이 <시체가 나타났다> 완성본을 경우한테 내밀었다.

“저 보여 주시는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작잔데 괜찮은지 네 의견을 묻고 싶어. 물론 부탁할 것도 있고.”

“부탁이요?”

“일단 보고 이야기하자.”

박종연의 권유에 경우는 그가 각색한 시나리오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애초 경우가 쓴 단막극의 원래 내용은 돈 없고 백 없고 있는 거라곤 전과 기록뿐인 주인공이 우연히 영화 촬영장에 쓰일 특수 제작한 손과 팔을 진짜 사람의 것으로 착각하고 범인을 잡는 과정을 보여 준다.

말도 안 되는 억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는데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다고 그렇게 진짜 범인을 잡으면서 끝이 난다.

반면 박종연이 각색한 시나리오는 시작은 비슷했지만 끝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사는 것도 팍팍하고 되는 일도 없어 매일 취해 있던 주인공은 우연히 영화 촬영을 위해 만들어진 소품을 발견하고 진짜 사람의 시체 토막으로 착각한다.

술기운 탓에 자신이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에 결국 신고하지 못하고 이 팔을 처분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전과자라는 사실에 그를 미심쩍게 보고 있던 이웃의 누군가가 의심스러운 상황이 발생하자 경찰에 신고를 하고 결국은 붙잡힌다.

공교롭게도 며칠 전 많은 비가 내린 탓에 인근 야산에 토사가 흘러내리고 그 속에 파묻혔던 토막 시체가 발견되면서 용의자를 찾고 있던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오해하고 체포한 것이었다.

자신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며 호소하지만 들어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과거 경찰의 강압에 의해 공무 집행 방해죄로 몰려 전과가 있던 그는 경찰은 결국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생각에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죄 없는 경찰 하나가 죽고 그는 살인자가 되어 영원히 도망자 신세가 된다.

뒤늦게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 사람의 것이 아닌 소품이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이야기는 우연히 벌어진 상황이 결국 한 남자를 비극으로 몰고 간 블랙 코미디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리고 사이사이 들어 있는 온갖 비유들과 대사들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어떠냐?”

“이거 뒷맛이 너무 씁쓸한데요?”

“그래? 그럼 잘 나온 거네. 그걸 노리고 쓴 거니까.”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전개가 될 줄은 몰랐어요.”

“애초에 네가 쓴 대본은 병맛 코미디잖냐.”

“네, 근데 현실은 오히려 이것과 가깝죠.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그래서 그 팔이 소품이었다는 게 금방 밝혀지면 그런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불안은 의심을 낳고 비극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법이지.”

“아, 기분 완전 별로예요.”

“시나리오가 잘 나왔다는 뜻이지? 고맙다.”

“대가의 손을 거치면 평범한 내용도 이런 시나리오가 되는 거군요.”

“아부하기는. 뭐 그래도 원작자가 좋다니까 나쁘진 않네.”

“그럼 이제 촬영에 들어가는 겁니까? 촬영 준비를 해야겠네요. 스탭들 먼저 꾸려야죠.”

“전부터 나랑 같이 손발 맞춰 일했던 사람들 있으니까 스탭은 내가 꾸릴게. 넌 걱정할 것 없어.”

“돈만 내면 된다 그겁니까?”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지.”

“뭐, 걱정 마세요. 누구한테서 나온 소슨데…… 제 사비를 털어서라도 영화 완성되도록 돕겠습니다.”

“돈 걱정은 원래 안 한다. 내가 영화 찍겠다고 하면 돈 대 주겠다며 사람들이 줄을 서.”

“암요. 자타 공인 대한민국 최고 감독님이신데 당연히 그러시겠죠.”

“그래서 말인데, 돈도 돈이지만 다른 쪽으로 도와 보지 않을래.”

“다른 쪽으로 도우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감독. 너 조감독 한번 해 보지 않을래?”

“예? 그 무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그걸 제가 어떻게 합니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다 배워 가면서 하는 거지. 내가 해 봤는데 욕 얻어 들어가면서 일 배울 때가 제일 빨리 배우기는 하더라.”

“그 말은 곧 감독님 욕받이가 되라, 그 말입니까?”

“욕받이? 하하, 그래. 맞다 욕받이.”

“원래 같이 하던 조감독님 있었잖아요. 그분은 어쩌고요. 설마, 짤랐어요?”

“짜르긴. 걔도 입봉해야지. 언제까지 내 뒤치다꺼리만 시킬 순 없잖냐.”

“아, 입봉하세요?”

“그래, 지금 한창 촬영 중이야. 안 그래도 거기도 한번 가 봐야 하는데.”

“말씀하세요. 제가 감독님 이름으로 간식차 보내겠습니다.”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감독님은 영화 준비하셔야죠.”

“뭐야, 스케줄 관리도 하고, 벌써부터 조감독 자리 꿰찬 거냐?”

“됐습니다. 드라마 판도 이제 겨우 돌아가는 시스템을 이해하는 수준인데 영화판에 기웃거릴 깜냥이나 되나요. 다른 사람 뽑으세요.”

“그러지 말고 같이 해 보자니까. 그래도 네가 원작자잖아. 엔딩 크레딧에 원작자 말고도 스탭으로도 네 이름 들어가는 거 의미 있지 않겠냐?”

“부담스럽습니다. 괜히 감독님 영화에 누를 끼칠까 싶구요.”

“대본은 넘겨 놓고 조감독은 싫다네. 그래, 좋다. 그럼 부담스럽지 않은 자리면 같이 일해 볼래? 그래도 명색이 제작사 대푠데 이 기회에 영화에도 참여해 보면 앞으로 제작사 일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겠어?”

드라마 작가로 잔뼈가 굵었지만 막상 현장의 경험이 없었던 탓에 경우는 지난번 <셀룰러 메모리>를 제작할 때 일부러 방송국에서 대본 수정을 하며 현장을 더 자주 찾았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영화도 제작하는 마당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종연의 영화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는 게 아니었으니 경우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조감독이 부담스러우면 연출부 막내는 어때?”

“연출부요?”

“그래, 연출부 일을 해 봐야 영화가 어떻게 제작되는지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지.”

“연출부 막내라면…… 좋습니다. 한번 해 보죠.”

그렇게 제안을 받아들인 경우는 그 모든 것이 박종연의 술책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야 말았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경우라고 합니다.”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가기 앞서 박종연은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인 조감독과 촬영 감독을 경우에게 소개했다.

생각을 시나리오로 옮기고 그것을 영화로 만드는 건 감독이었지만 막상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을 통솔해야 하는 건 바로 이 두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박종연은 다른 이들에 앞서 이 둘은 경우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나 조상욱이라고 합니다.”

“민 작가도 알다시피 여기 조상욱 촬영 감독은 내가 조감독 시절부터 함께해 온 죽마고우나 다름없는 사이지.”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취향이며 웃음 포인트가 비슷했다. 처음부터 친구는 아니었고 두 사람 모두 잔챙이 시절부터 만나 커 온 셈이었다.

“그리고 여기 최기원 조감독은 스크립터부터 시작해서 연출부에서 꽤 오래 일했지. 조감독은 이번이 처음이야. 일하는 게 아주 꼼꼼해. 앞으로 민 작가가 이 친구한테 일을 많이 배워야 할 거야.”

“최기원이라고 합니다.”

숏컷을 한 머리에 화장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녀의 손은 꽤나 차가웠다.

그렇게 악수를 나눈 경우는 은근 슬쩍 박종연을 째려봤다. 애초 조감독까지 다 내정되어 있었으면서 자신을 꾀어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조감독 자리를 제안했단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짐짓 경우의 시선을 모른 척한 박종연이 운을 띄웠다.

“자. 인사들 나눴으니 오늘은 친목 도모를 위해서 우리끼리 조촐한 회식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좋지. 역시 사람은 술이 넘어가야 거리도 가까워지고 그러는 법이야, 안 그래?”

“운전은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죽이 딱 맞는 세 사람을 보며 이 속에서 자신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경우는 괜히 걱정만 앞섰다.

그냥 드라마나 쓸 걸 그랬나 싶었지만 영화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지 그 역시도 궁금했다.

경우는 그들을 따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 * *

“어디 가시는 모양이네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경우가 돌아보니 며칠 전 맞선 아닌 맞선을 본 상대인 강희주가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강 검사님, 여긴 어떻게…….”

“오늘 모처럼 일이 일찍 끝나서 작가님하고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하고 왔는데 선약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서프라이즈 하고 싶었는데.”

“누구셔?”

강희주에게 관심을 보인 박종연이 다가왔다.

“혹시 우리 민 작가 여자 친구?”

“아, 아니요. 감독님도 참.”

“지금은 아니고 앞으로 될지 안 될지는 두고 봐야 할 사람입니다. 강희주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박종연이라고 해요. 여기 민 작가랑 같이 일하는 사이면서 삼촌 같은 사이기도 하죠. 우리 민 작가랑 잘됐으면 좋겠네.”

“혹시 영화감독 박종연 감독님?”

“나를 알아요?”

“대한민국에서 박종연 감독님,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와, 저 팬이에요.”

“고맙워요. 아, 그럼 우리 회식은 다음에 하고 민 작가는 데이트를-.”

“아니에요. 연락도 없이 온 제 잘못이죠. 방해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다음에 봐요, 작가님.”

경우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쿨하게 돌아선 그녀를 보며 박종연이 경우의 어깨를 툭 쳤다.

“예쁘네.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잘해 봐.”

“그런 사이 아닙니다. 그냥 딱 한 번 만났다구요.”

“원래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면 님이 되기도 하고 그러는 법이다. 연애가 별거고 결혼이 별거냐. 그렇게 만나고 같이 살고 그러는 거지.”

“이러다 자식 낳고 그 자식이 시집 장가가는 이야기까지 하겠어요. 그만하시고 얼른 가시죠.”

“짜식, 부끄러워하기는.”

최기원과 조상욱이 기다리고 있는 차로 박종연을 억지로 데려가던 경우는 자신의 차로 가는 강희주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 * *

“그래서? 바람 맞고 그냥 왔어? 그러게 연락을 해 보고 가지.”

“회식이 있을 줄 누가 알았나. 이게 다 할머니 때문이야. 서프라이즈는 무슨. 처음부터 그냥 할머니랑 밥 먹었으면 오죽 좋아. 민망한 거 티 안 낼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경우를 보내고 강희주는 그 길로 할머니 손주옥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자주 얼굴을 봐야 정이 들고 그래야 마음이 생기지. 마음에 든다며. 그래서 소개까지 해 줬더니. 똑 부러진 줄 알았더니 순전히 맹탕이야.”

“나한테 마음이 아예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해? 무작정 들이밀 수도 없잖아.”

“뭘 밀어? 사람은 쓰는 말에서 품격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건 도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아, 몰라.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옆에 같이 있던 여자도 엄청 이쁘던데. 배우들이랑 일하는 데 익숙해져서 나는 오징어처럼 보이면 어쩌지?”

손주옥은 호들갑을 떠는 손녀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시간 날 때마다 만나.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서든 일단 얼굴부터 마주하고 정이 드는 게 우선이야. 솔직히 나 민 작가 네 짝으로 성에 안 차. 사내 대장부가 돼서 야심이 없어도 너무 없잖니.”

“할머니 기준에 맞는 사람이 있기는 해?”

“크흠. 도대체 그놈 어디가 좋은데? 이야기나 한번 들어 보자.”

“음, 잘생긴 얼굴? 역시 남자는 얼굴이 제일이지.”

서른이 가까워 오지만 처음 손녀를 키울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철이 없는 모습에 손주옥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고 말았다. 그나마 생전 그런 말 없던 아이가 모임에 참석한 경우를 보고 소개해 달라고 조르는 것만 해도 큰 발전이다 싶었다.

“할머니,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작가님이 하는 제작사가 앞으로 어떻게 커 나갈지 모르는 거잖아.”

“그러면 다행이고.”

바로 그 순간 강희주의 전화가 울렸다. 경우였다.

“헉! 민 작가다.”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아…… 네…… 좋습니다. 그럼 그때 뵙죠.”

전화를 끊자,

“뭐래?”

“찾아온 사람 그냥 보내서 미안했다고 주말에 보자는데?”

“아주 경우 없는 놈은 아니구만. 그렇게 좋아? 아주 입이 찢어지겠다.”

“헤헤.”

기분 좋게 웃는 손녀의 모습에 손주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 사이 전화를 끊은 경우는 미심쩍은 얼굴로 박종연을 바라봤다.

“감독님 때문에 괜히 전화했잖아요.”

“괜히하긴, 넌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 그 여자가 거기까지 왜 왔겠어?”

“왜긴요,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었나 보죠.”

투덜대던 경우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눈치없는 그의 모습에 박종연은 혀를 끌끌 찼다.

“너는 멜로 쓰면 큰일 나겠다. 저래가지고 연애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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