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64화 (64/250)
  • #64.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7)

    지난 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영국 생활을 공개한 박지성 선수는 그런 말을 했다.

    축구를 잘하고 싶지만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

    경우 역시 드라마를 잘 쓰고 싶었지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드라마 작가이면서 동시에 재벌 그룹의 일원이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언제고 이런 일이 터질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김강철에겐 말을 안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대책은 이미 세워뒀다. 기회를 봐서 꺼낼 생각이었지만 박정훈의 인터뷰는 그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물론 그의 인터뷰로 모든 논란을 종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박정훈의 인터뷰는 도화선이 되었고 그동안 경우가 해 왔던 선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전 생에 그가 지냈던 보육원 후원이라든가, 형편이 어려운 축구 유망주에게 축구화와 축구공을 계속 지원해 주었던 일이라든가, 최근엔 드라마 제작사의 52시간 근무까지 모두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의 과거 잘못이 모두 없던 일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후에 해 온 선행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엔 충분한 일들이었다. 여전히 그를 미심쩍게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를 둘러싼 논란은 대부분은 종식되었다.

    * * *

    정명도는 분명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가 억지임을 경우 또한 알고 있었다.

    사실 정명도 입장에서 경우는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고명희가 잘못한 일이긴 했지만 그 여파로 ‘내일 프로덕션’이 흔들렸으니 말이다.

    거기다 주가 하락 이후 경우가 주식을 다량 매입했음은 물론 차명으로도 사들였음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혹시라도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주주들과 손이라도 잡는다면 경영권마저 위협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정명도는 지금 경우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 것인지 긴장하고 있었다.

    “김경진 작가와 정해용 감독, 계약 기간이 곧 끝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지금 계약 협상 중입니다.”

    “그만두시죠.”

    “네?”

    “그 두 분과 계약하지 마시라는 소립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의 경영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차라리 주주 총회를 여세요. 이런 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저는 정 대표님께 오히려 도움을 주려는 건데요?”

    “도움이라구요? 고 작가 일이 그렇게 되고 작가들이 몇이나 빠져나갔는지 아십니까? 그나마 김경진 작가는 흥행성이 보장된 몇 안 되는 탑급 작가라 이겁니다. 그런데 그런 작가마저 놔줘 버리면 우리 ‘내일’은 주춧돌이 빠지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거야 김경진 작가가 잘나갈 때나 하는 소리죠.”

    “예전에 비해 화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웬만한 중박 작가보다는 낫습니다.”

    “정 대표님 이제 보니 감각이 많이 떨어지셨군요.”

    “뭐라구요? 도저히 더는 듣고 있을 수 없군요. 이만 돌아가시죠.”

    “김경진 작가가 새로 준비하고 있다는 드라마,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으로 알고 있는데요?”

    갑작스러운 경우의 말에 정 대표는 얼어붙었다. 대본을 본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였는데 이미 외부로 유출되었다는 사실이 적잖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경우는 이미 이전 생의 경험으로 그 드라마가 어떤 드라마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드라마 하기엔 매력적인 시대입니다. 전차가 다니고 밤이 되면 가스등이 거리를 비추죠. 잘만 찍으면 그림이 꽤 될 겁니다. 특히나 정해용 감독님이 그런 장면은 기가 막히게 잘 뽑으시죠.”

    “…….”

    “근데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김경진 작가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을까요? 아, 친일파의 자식과 독립 운동가의 운명적 사랑 이야기라죠?”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요즘 예전 같은 전통 사극이 보기 힘들어졌죠. 왜 그런지 잘 아실 테고요.”

    “돈 때문이죠. 돈이 많이 드는데 PPL이 쉽지 않으니까요.”

    “그렇죠. 임금님부터 시작해서 천민들까지 옷이며 장신구며 세트, 소품까지 전부 돈이죠. 근데 협찬을 받을 수 있는 품목은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시대극은 다르나요? 아니죠. 시대극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드라마만 뽑을 수 있다면 제작사 입장에서 그만한 투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제작비도 회수 못 할 정도로 완전히 망해 버리면요?”

    “처음부터 흥행을 따지고 들면 드라마 못 찍습니다.”

    “이제 보니 정 대표님은 낭만파셨군요. 대표라면 의당 손익을 따지는 게 제일 우선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

    “영화판에서 일제 강점기 영화가 흥행이 실패한다는 징크스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한쪽에선 나라에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는데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으면 공감이 전혀 가지 않죠. 반대로 가도 마찬가지예요. 주제 의식 때문에 드라마가 너무 무거워집니다. 물론 둘 다 잡으면 좋겠지만 욕심 부리다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될 수 있어요.”

    “그건 영화니까 그런 거지 드라마는-.”

    “예전 드라마 제작비 생각하시면 안 되죠. 시대극 잘못 건드렸다간 제작비 감당 못 합니다. 어설프게 하면 고증 문제를 들고 시청자들의 원성을 살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시청자들 눈높이 높아진 거. 참, 지난번에 어떤 영화에서 클래식 자동차 한 대에 4억이 들었다고 하던데 당연히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아직 확실하지도 않는 일로 그만두라고 하시는 겁니까?”

    “확실합니다. 흥행이 되면 제가 못하게 막을 거니까요.”

    “그 무슨!”

    “어려울 것 같습니까? 예전에 <푸른 구름>이었던가요? 그 영화 친일 논쟁에 빠졌죠. 알고 보니 그쪽 제작사가 연이은 흥행에 성공하자 그 성공을 시기한 경쟁 제작사에서 벌인 일이라고 하더군요.”

    “!”

    상대는 언론사도 쥐락펴락하는 재벌.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었다. 만약 경우가 악의를 품고 그런 일을 벌인다면 당하는 건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 될 터. 끝까지 고집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유니언 스튜디오에 김경진 작가와 정해용 감독을 스카우트하도록 흘리죠.”

    “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정명도는 의아했다.

    “지금까지 뭘로 들으셨습니까? 제가 말한 모든 리스크 유니언 스튜디오에 넘겨주자는 겁니다. 대표님이야말로 유니언 스튜디오를 넘어서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제가 돕겠다니까요.”

    업계 1위로 올라서고픈 정명도의 야망, 그런 그를 항상 가로막았던 ‘유니언 스튜디오’. 제작사의 성장을 저해하는 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정명도에겐 그중 가장 큰 적이 ‘유니언 스튜디오’였다. 원하는 작가를 빼앗길 때도 있었고 편성에서 밀릴 때도 있었으니까.

    정명도는 자신의 목표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설렘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경우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경우는 이전 생에서 고명희 밑에서 있던 시절 이야기가 떠올랐다.

    집에 가지도 못하고 날을 지새며 글을 쓰던 어느 날, 술을 마시고 온 정명도는 술기운을 빌려 고명희에게 자신의 야심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아마 ‘유니언 스튜디오’에 무언가 밀렸을 때였겠지. 유니언을 넘고 싶다고.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애초 번지수가 잘못되었지만 그 덕에 그의 마음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태에선 내일 프로덕션은 ‘유니언 스튜디오’를 이길 수 없다. 박현호로 대표되는 대기업의 자본이 들어간 곳을 따라잡는 건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 이미 그의 눈빛에서 마음이 기울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경우가 입을 열었다.

    “유니언 스튜디오에 은밀하게 흘리세요. 김경진 작가 협상 중인데 계약금 문제로 협상이 잘 되지 않는다고요. 드라마가 끝내주게 좋다는 소문도 같이 흘리는 편이 좋겠죠. 그럼 그쪽에서 접촉할 겁니다.”

    “결국 두 사람은 보내 줘야 한다는 겁니까?”

    “장기적으로 생각해도 그 편이 나을 겁니다. 어차피 대표님도 알고 계셨잖습니까. 정해용 감독은 몰라도 김경진 작가, 하락세인 거.”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유의미한 건 아니라고 봤습니다. 드라마야 시청률이 좋게 나올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 않습니까.”

    “미미하긴 하지만 꾸준히 하락세였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세요. 누구보다 대표님이 더 잘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잠깐의 욕심에 판단이 흔들려선 안 됩니다. 세상에 인재는 많습니다. 아직 흙 속에 묻혀 있어서 그렇지. 어쩌면 정 대표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구요. 그리고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제 말씀 잘 알아들으셨길 바랍니다.”

    “좋습니다. 민 작가님이 원하는 대로 해 보죠. 대신 민 작가님 말씀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당연하죠. 잊으셨는지 모르지만 저도 주주입니다. 손해 날 짓은 하지 않아요.”

    “‘스튜디오 글로리’가 우리 ‘내일 프로덕션’을 앞서가고 싶어서가 아니고요?”

    “누군가를 밀어내서 올라서야 하는 건 1등 앞에 가로막혀 2등만 하는 수험생 괴담에나 나오는 이야기 같은데요.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는 그렇게 못나지 않습니다.”

    은근히 자신을 돌려 까는 이야기에 기분이 상했지만 어쨌든 구두라도 잘못될 경우에 대한 약속을 받아 냈으니 경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경우는 ‘내일 프로덕션’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그때까지 입 다물고 있던 김강철이 다다다 묻기 시작했다.

    “이게 나쁜 일이야? 이러다 유니언 스튜디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냐?”

    “너 시대극 하나 찍는 데 얼마나 들어간다고 생각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회당 15억. 사극이나 시대극은 못해도 24부는 만들어야 해. 그럼 360억 정도 들겠지. PPL하기에도 쉽지 않아. 기껏해야 한복이나 비녀 같은 장신구, 지역 특산품이 대부분이야. 그것도 조건이 맞을 때만 그렇다고. 그러니 충당이 안 되면 제작사 부담이야.”

    “야, 그런 거 아는 놈이 미국에다가 500억 던졌냐?”

    “걱정 말라니까 그러네.”

    “내가 볼 때는 네가 제일 걱정이야. 만약 그 드라마, 제작사 옮겨서 대박 나면 어쩔 건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거지.”

    걱정에 김강철이 미간은 펴지지 않았으나 미래를 알고 있는 경우는 하나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저 정명도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줄지 그게 문제였다.

    이전 생에서 ‘내일 프로덕션’ 김경진의 드라마 <마지막 사랑>은 빼어난 영상미의 예고편이 나가면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첫 방송 역시 15퍼센트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

    하지만 방송 이후 ‘내일 프로덕션’의 주가가 7퍼센트나 하락한다. 거기다 2회 시청률부터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한 번 떨어진 시청률은 쉽게 반등하지 못한다. 가뜩이나 어마어마한 회당 제작비까지 그 모든 건 결국 ‘내일 프로덕션’ 실적에 부담으로 돌아갔다.

    흥행 보증 수표, 김경진 작가와 정해용 감독 콤비의 첫 실패작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니 <마지막 사랑>을 ‘유니언 스튜디오’가 제작하도록 한다면 그 손실은 고스란히 박현호에게 돌아갈 게 분명했다.

    “야, 네 말대로 그 드라마가 망한다고 쳐. 근데 그걸로 괜찮겠어. 어차피 그쪽에선 네가 뒤에서 뒷공작을 하는 줄도 모를 거 아냐.”

    “상대는 거대 언론사야. 그쪽도 재벌이란 소리지. 어차피 재벌은 쉽게 망하지 않아. 괜히 적으로 돌렸다가 상대한테 공격을 하게 할 빌미만 줄 뿐이라고. 효율적으로 괴롭히는 편이 나아.”

    “하여간 얍삽한 놈 같으니라고. 사나이라면 정면 승부!”

    “그랬다가 대가리 깨질 일 있냐. 나서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성공한다.”

    “예, 알았습니다요.”

    경우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스튜디오 글로리’로 향했다. 그의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들 때문에 다른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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