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63화 (63/250)
  • #63.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6)

    [지난 해 인기리에 방송된 MBS 수목 미니 시리즈 <셀룰러 메모리>의 작가 민경우가 새명 그룹의 삼남으로 밝혀져 화제다. <셀룰러 메모리>는 박재현과 이선영이 출연하기로 했던 <사냥개>의 사고로 방송이 중단되면서 긴급 편성된 드라마로…….]

    기사는 경우가 드라마 작가가 되고 ‘스튜디오 글로리’라는 제작사의 대표가 된 과정을 상세히 알려 주고 있었다. 문제는 경우가 학창 시절 모범 학생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번듯한 작가가 되었고 그 모든 것이 경우 뒤에 있는 새명 그룹의 힘 때문이라는 듯한 뉘앙스로 끝을 맺었다는 데 있었다.

    김예신은 기사를 꼼꼼하게 읽고 있는 윤정숙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은근히 돌려 깠네? 우리 경우가 대진일보에 뭐 잘못한 게 있나 봐?”

    “대진일보 박현호 본부장님이 민 작가님과 친구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신도현 작가를 영입했는데 먼저 접촉한 건 박현호 본부장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 먹은 건 그쪽이 먼저다? 잘했네. 맘에 드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뺏어야지. 기사 좀 난 게 대수야?”

    “저 그런데…….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민 작가님 학창 시절 행적이 좀 밝혀지면서 그게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 근데 사춘기 때 사고 안 친 사람 어디 있나?”

    윤정숙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도 여론이 좋지 않으면 어떻게든 민 작가님께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겁니다. 수습 할까요?”

    “음……. 놔둬. 손석중한테도 전화해서 나서지 말라고 해.”

    “네?”

    “예신 씨는 경우가 그동안 인터뷰를 멀리하고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옛날 일 때문에 사람들한테 비난받을까 봐?”

    “아예 없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글쎄. 근데 난 그런 것만은 아닐 것 같거든. 세상에 비밀이 어딨어. 언제 어느 때가 됐든 밝혀질 일은 언젠가 밝혀질 거라고 생각해. 경우도 그 정도 생각 못 했을까?”

    “제 생각이 짧았군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난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김예신이 이사장실을 나가자 윤정숙은 생각에 잠겼다. 기사를 보는 내내 윤정숙의 머릿속엔 한 단어가 떠올렸다.

    드라마틱.

    문제아가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는 성서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으로도 전해진다.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그 그림을 처음 본 순간 윤정숙은 강렬한 감동을 느꼈다. 오랜 시간 방황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아 주는 온화한 아버지의 미소.

    경우는 마치 그 그림 속의 주인공과 같았다.

    옛날부터 문제아가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우 그 자신이 드라마 작가였으니 그의 이야기는 드라마처럼 하나의 컨텐츠가 되어 또 다른 힘을 가질 게 분명했다. 윤정숙은 아들이 이 일을 잘 수습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 * *

    새 식구를 맞았다는 기쁨도 잠시 ‘스튜디오 글로리’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어 버렸다. 경우의 신상이 공개되자 학창 시절 민경우의 행적이 먼지 털리듯 낱낱이 밝혀진 탓이었다.

    - 왕이었음, 선생님도 걔 앞에서 쩔쩔 맴.

    - 학교 수업 째는 건 기본, 심심하면 애들 괴롭혔음.

    - 그중 최강이 축구 선수 강제 은퇴시킨 거. 근데 걔가 새명 모델 되고 있는 거 웃김.

    -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강제 은퇴시켰는데 모델을 할 리가 있냐?

    - 알바생이냐, ㅋㅋ 꺼져.

    - 돈이면 다 됨. 분노도 가라앉혀 줌. 절대 권력!

    - 술 쳐먹고 운전하다 걸려 놓고 다쳤다고 입원함. 잠재적 살인마

    - 얼마 전 민경우 새명 아들이라고 나온 게시글 있었음. 성지 순례 가야 함.

    - 그 글 없어졌다, ㅂㅅㅇ. ㅅㅁ에서 두고 보겠냐.

    - 님들 조심하셈. 말 잘못했다간 고소당함. 상대는 재벌임.

    댓글을 읽는 작가실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웠다.

    “정말 너무들 하네. 이건 인신 공격이죠. 안 그래요?”

    “그러게. 우리 작가님 좋은 분이신데 벌떼처럼 몰려들어서 너무한다, 정말.”

    “근데 작가님 이 이야기 사실이실까요? 학교 다닐 때?”

    “이 작가는 그거 믿어요? 딱 봐도 부풀리기잖아. 조그만 잘못을 해도 돌팔매질하는 거 사람들 특기 아냐? 그런 말에 휘둘리면 안 되죠. 겪어 봤으니 작가님 어떤 분인지는 이 작가가 더 잘 알면서.”

    “그렇기는 한데. 너무 나쁜 말 일색이니까. 전에 작가님 화난 얼굴 한번 본 적 있거든요. 그때 솔직히 좀 움찔했어요.”

    “그거야, 원래 화를 안 내는 사람이 한번 화를 내면 무섭다고 하잖아요.”

    “그래요. 전 작가님이 우리 편이라서 좀 다행이라고 느껴지던데요. 원래 그런 캐릭터 있잖아요. 적으로 만나면 무섭지만 같은 편이면 세상 든든한 사람.”

    “어쨌든 괜한 말에 휘둘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리되면 작가님이 다 알아서 말씀해 주시지 않겠어요?”

    어떻게 보면 가장 오랜 시간 같이 생활한 작가들이었으니 인터넷상에 떠들어 대는 이야기보다 자신들이 겪은 경우를 더 믿으려 했다.

    그때 마침 마무리 집필 여행을 떠났던 박종연이 돌아왔다.

    “여러분들 안녕. 다들 오랜만. 그동안 잘 지냈어?”

    “감독님!”

    “왜 이제 오세요?”

    “뭐야, 다들 무슨 일 있었어? 어? 뉴페이스도 있네.”

    어수선한 분위기에 의아한 박종연에게 작가들은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인터넷 게시글을 확인한 박종연이 입을 열었다.

    “저거, 다 사실인데?”

    “네?”

    “다들 몰랐구나. 민 작가, 지금하곤 사뭇 달랐지. 좀 심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고나 할까? 오죽했으면 쟤는 커서 뭐가 될까 그랬다니까. 뭐 결국 드라마 작가가 됐네. 하하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야기하는 박종연과 달리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던 작가들은 눈만 끔뻑끔뻑할 수밖에 없었다.

    * * *

    매일같이 출근하던 제작사에도 나가지 않은 채 두문불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경우의 모습에 김강철이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 놔둘 거야? 아무 반응을 안 하니까 다 달라붙어서 이젠 없는 소리까지 하잖아. 이참에 악플러들은 좀 걸러서 고소해 버리지.”

    “됐어. 인력 낭비 뭐 하려 해. 경찰분들도 다 바빠. 민중의 지팡이라고 하지만 필요할 때 써야지. 안 그래?”

    “그렇다고 두고 보자고?”

    “아예 없는 말도 아니고, 이제 와서 고소하고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태풍도 시간 지나면 소멸한다.”

    “그래도. 수현이도 걱정하는 것 같던데.”

    “너 행여라도 수현이한테 뭐라 하지 마. 당분간 라면 가게 문도 닫으라 그래. 괜히 기자들 거기까지 기웃거리게 해서 옛날 일 들춰지고 애 맘 상하게 하지 말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면 관심도 사그라들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으니까.”

    “알았다, 알았어.”

    그런데 그때 김강철의 전화가 울리고 전화를 받은 그는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뭐?”

    “왜, 무슨 일인데?”

    김강철은 새로 바꾼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접속을 시작했다. 그리고 올라온 기획 기사 하나.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한 적 있는가? 목격하고도 방관하는 당신이야말로 학교 폭력의 동조자]

    그것은 경우가 학창 시절 괴롭혔던 박정훈이 자신의 실명을 걸고 한 인터뷰였다.

    * * *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과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사과를 받았다고 느낄 만큼 하는 것이다.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한 적이 있는가? 당신이 잘못된 순간을 목격하고 방관하고 침묵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우와, 이분 대단하시네. 실명까지 걸고 인터뷰하신 것 보면.”

    “익명에 숨어서 하면 조작이라고 안 믿을 테니까 그런 거겠죠.”

    “그래도 이러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러게. 그리고 사과를 하는 것도 쉽지 않죠.”

    “진짜 우리 작가님은 범상치 않은 분은 확실한 것 같아요.”

    “맞아요. 전에는 그냥 글만 잘 쓰시는 친절한 분인 줄 알았는데 참 우여곡절이 많네요.”

    “어쩐지 예전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어요. 재벌집 아들에 뭐든지 다 잘하는 엄친아 같았는데 실수도 하고 반성하는 거 보니까 보통 사람처럼 보인달까?”

    “근데 그게 더 어렵다는 건 알죠.”

    “네.”

    “자, 이쯤하고 우리도 일합시다. 이번 소동 때문에 아이템 회의도 못 했는데 다음번엔 기깔나는 걸로 한번 뽑아 봅시다.”

    “네에.”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작가실을 비롯 ‘스튜디오 글로리’가 수습되는 반면 경우는 자신을 위해 실명을 내건 박정훈이 걱정돼 전화를 걸었다.

    “너는 뭘 그렇게까지 했냐?”

    [고마우면 고맙다고 하는 거다.]

    “고맙지. 그리고 미안하고. 어쨌든 나 때문에 실명 깠잖아.”

    [그러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예전 여친한테서까지 연락 오더라.]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했어?”

    [이산가족 상봉은 무슨. 아주 지긋지긋하게 헤어졌구만.]

    “고맙긴 한데 미안하네. 안 그랬어도 괜찮았을 텐데.”

    [당사자인 내가 괜찮다는데 지들이 뭐라고 떠들잖아. 솔직히 좀 웃기지 않냐? 내가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거야. 네가 불쌍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알아. 어련하려고. 어쨌든 당분간은 시끄러워질 거야.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도와줄 테니까.”

    [돈지랄할 거면 됐다. 당분간 사람들 관심 좀 받아 보지 뭐. 예전엔 사람들 시선도 참 싫었는데 이젠 괜찮아졌거든. 즐겨 볼라고.]

    전화를 끊은 경우는 자신을 위해 용기를 내준 친구를 향해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김강철이 옆구리를 툭 치며 물었다.

    “근데 넌 언제 그런 짓을 벌였대?”

    “뭘?”

    “아니, 나 모르게 정훈이한테 언제 가서 사과한 거야? 내가 네 스케줄은 항상 꿰고 있었는데…….”

    “모를 수도 있지. 너라고 다 알기야 하겠냐?”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근데 너 설마 이럴 줄 알고 그렇게 태연한 거였냐?”

    “뭔 소리야?”

    “아니, 나는 네가 일일이 반응할 거 없다. 해명도 하지 말라고 하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지. 근데 박정훈이 그럴 줄 이미 알고 있었으면-.”

    이야기를 듣던 경우가 김강철의 머리통을 때렸다.

    “아악! 갑자기 왜 때려?”

    “넌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뭘 해? 가뜩이나 미안해 죽겠는 사람한테.”

    “폭력 금지! 너 논란 벗어난 지 얼마 안 됐다고. 이럴 때일수록 몸을 사려야지.”

    “너는 하여간 쌓아 온 거 입으로 다 까먹는다는 것만 알아 둬라.”

    “그건 그렇고 대진일보는 어쩔 거야? 가만 놔둘 거야?”

    “처음엔 어린애 투정이라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결국 정훈이까지 끌어들였으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어떻게 할 건데? 이러다가 완전 쌈 나는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바본가? 하여간 똑똑하다고 소문난 박현호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어. 자고로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잖아.”

    “그 반대 아니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거야 좋은 일이니까 그런 거고, 나쁜 일은 반대여야지.”

    “오호, 그럼 나쁜 짓을 저지르겠단 소리?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도련님?”

    “‘내일 프로덕션’ 정명도 대표한테 전화 넣어. 내가 찾아가겠다고. 이런 일까지 내 손에 흙 묻힐 필요 없잖아.”

    싸늘한 경우의 모습에 김강철은 순간 사람 근본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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