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62화 (62/250)
  • #62.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5)

    신도현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여섯.

    아카데미 교육 기간 최소 2년 이상, 거기다 보조 작가로 몇 년 구르다 온 작가진들에게 신도현은 확실히 어린 축에 속했다.

    특히나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여자들이었으니 형 노릇만 하던 신도현은 졸지에 작가실의 귀염둥이 막내가 되고 말았다.

    “나는 신 작가, 되게 김환규 작가님처럼 덩치 크고 수염 기르고 그런 이미지로 생각했다니까요.”

    “확실히 신 작가 글이 좀 거친 면이 있어요.”

    “솔직히 신 작가 때문에 내 드라마 시청률 엉망으로 시작해서 달갑진 않지만 그래도 한솥밥 먹게 된 거 앞으로 잘 지내 봐요.”

    “에이, 톡 까놓고 그게 어떻게 신 작가 탓이에요? 그냥 작품의 분위기가 완전 다른 거지.”

    “뭐야, 지금 그새 막내 들어왔다고 편들어 주는 거예요?”

    “편은 무슨. 좋게 좋게 지내자는 거죠.”

    “솔직히 말해 봐요. <제로섬> 본방 본 적 있죠?”

    “아니, 뭐…… 없어요.”

    “잠깐의 공백, 뭐죠? 본 것 같은데.”

    티격태격하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사이가 좋은 작가실에서 신도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적응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전까지 막내나 다름없던 박민정이 말을 붙였다.

    “작가실은 굳이 매일 나올 필요는 없어요. 집필은 편한 곳에서 하면 되니까. 우리는 여기가 편해서. 일주일에 한 번 아이템 회의도 하거든요. 참석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아요. 편하실 대로 하면 돼요.”

    “네.”

    “작가실 쓰실 거면 여기 이 책상 쓰면 돼요. 뭐 지금은 나름 신입이 왔다고 들떠서 이렇게 떠드는 거지, 막상 일 시작하면 타자 치는 소리밖에 안 들리니까 걱정 말고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들은 신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고명희 밑에서 오래 보조 작가를 했던 이시연이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민 작가님, 좀 대단하지 않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쟁 관계 사람인데 신 작가 데리고 오는 것 보면 말이에요.”

    “것도 그렇지만 전 이번에 우리 드라마 홍보할 때요, 출근하려고 집에서 나오는데 우리 집 앞 전봇대 앞에 ‘수아야 결혼하자’ 딱! 엄청 놀랐다니까요. 이거 우리 회사에서 한 거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다고요.”

    “우리 회사 민 작가님 들어오고 나서 좀 커진 거 같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커졌죠.”

    “전요, 유니언 스튜디오 안 부러워요. 아마 거기 들어갔으면 쟁쟁한 작가님들한테 밀려 기획만 하다 끝났을지도 몰라요.”

    “드디어 우리 이 작가도 입봉을 하네. SBC 자체 제작이랬죠?”

    “네. 아참, 신 작가도 받았어요? 작가 키트?”

    이들의 대화 텐션에 적응하지 못했던 신도현은 갑작스러운 이시연의 질문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네? 작가 키트요?”

    “민 작가님이 작가들한테 집필에만 전념하라고 선물 주시거든요. 저는 노트북 받았어요. 그때 노트북이 너무 오래돼서 부팅하는 데만 한참 걸렸거든요. 나중에 돈 모아서 사려고 했는데 어떻게 아시고 선물로 딱 주시는데 완전 감동.”

    “전요. 민 작가님 대표로 계시는 동안 여기 뼈를 묻을 거예요.”

    모든 작가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선물로 줬다는 사실에, 경우가 생각보다 세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신도현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런데 왜 대표님이라고 안 부르고 작가님이라고……?”

    “아, 우리도 처음엔 대표님, 대표님 불렀는데 부담스러우시대요. 자기도 작가니까 작가로 불리는 게 더 좋다고.”

    “아.”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신도현은 마음이 뿌듯해졌다.

    * * *

    로이드 최가 쫓기듯 미국행을 택한 거라면 서필진의 가족은 아메리카 드림을 찾아 미국 이민을 택한 케이스였다.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렵게 생활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서필진은 반드시 성공을 하고 말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신문 배달을 하고 밤이 늦도록 공부했던 그는 결국 뉴욕대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동양인이라는 핸디캡은 그의 성공이 유리 천장에 가로막혀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던 중 만난 박현호.

    부모 잘 만난 덕에 호의호식하는 그를 보며 인식이 바뀐 건, 둘째 아들이라는 결함을 극복하려는 자신 못지않은 그의 남다른 야망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사람들이 신문을 볼 것 같아? 학창 시절 새벽에 신문 배달하면서 용돈 벌고 낮엔 공부했단 거 이제 옛날 얘기가 될 거야. 신문을 보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겠지.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보지도 않는 신문에 광고를 실을 기업은 없어. 그럼 자연히 신문사는 사양 산업이 될 거야.’

    ‘그럼 뭘 봐?’

    ‘영상 미디어. 앞으로 사람들은 손에 들고 다니면서 TV를 보게 될 거야. 들고 다니면서 보기 편하게 짧게 편집된 형식도 나오겠지. 신문에 난 기사보다 TV에 나온 방송인의 말 한마디에 대한민국이 들썩이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너는 그 영상 미디어를 휘어잡고 싶다는 거네. 근데 어차피 한국은 대기업의 방송 진출을 규제하고 있잖아.’

    ‘그래서 법을 바꿀 거야. 지금 한창 로비하는 중이거든. 그렇게 되면 24시간 방송하는 지상파 채널을 갖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는 거야. 어때? 나랑 같이 한국으로 가지 않겠어? 그럼 내 오른팔 자리를 너한테 줄게.’

    그렇게 택한 한국행.

    대진일보의 미디어 사업부 본부장이었던 박현호의 전폭적인 지지에 서필진은 미디어법이 통과된 후 종편 개국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가고 있었다.

    대진일보의 부국장을 보도본부장에 내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예능 제작사와 드라마 제작사를 투자해 자회사로 편입시킬 계획도 세워 두었다. 그리고 실제로 몇 년 동안은 그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가 하려던 일을 누군가 가로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끝에 모두 ‘스튜디오 글로리’, 정확히 말하면 민경우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필진은 올 초 설 연휴를 맞아 가족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 갔던 길에, 친구 로이드 최를 만나 들었던 뜻밖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스튜디오 글로리라고 알아?’

    ‘드라마 제작산데, 갑자기 거기는 왜?’

    ‘거기 큰 회사야?’

    ‘아니, 신생이라 아직 방송국 쪽에서도 영향이 그렇게 크지는 않는데…… 근데 네가 거길 어떻게 알아?’

    ‘신생이라 작게 시작하는 건가? 자금력이 꽤 괜찮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얼마 전에 한국에서 연락이 왔어. 한국 고등학교 친구 중에 변호사 하는 애가 있는데 걔가 연락해서는 자기 대신 가 달라고 해서 갔지. 그랬더니 그 제작사에서 새로 제작할 드라마에 투자를 하데. 덕분에 용돈 쏠쏠하게 벌었지.’

    ‘그래? 스튜디오 글로리가 맞아?’

    ‘대표가 민경우라던가?’

    ‘진짠가 보네.’

    ‘와, 한두 푼도 아니고 나 깜짝 놀랐잖아. 조그만 제작사도 그렇게 돈이 많은 거 보면 확실히 우리나라 발전하긴 많이 발전했어, 그치?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냥 한국으로 갈걸 그랬나?’

    ‘아서라. 아무리 그래도 미국이 낫지. 소송의 천국이라는 말이 괜히 있냐? 미국만큼 소송이 많은 나라도 없잖아. 한국 가 봤자야. 손가락만 빨다가 결국 문 닫은 변호사 여럿 봤다.’

    ‘그래? 하여간 여기나 거기나 먹고사는 거 참 쉽지 않아.’

    ‘그나저나 그 얘기나 더 해 봐.’

    ‘무슨 얘기? 드라마 투자? 별거 없어. 그냥 투자하고 끝.’

    ‘얼마나 투자했는데?’

    ‘자세한 얘기 묻지 마라. 그냥…… 드라마 한 시즌 통째로 만들 정도의 액수라는 것만 알아 둬.’

    최근 한국도 드라마 제작비가 올라가고 있지만 미국과는 비교 불가능한 수치였다. 그런데 한두 편도 아니고 한 시즌 전체라면 상당한 액수임이 틀림없었다.

    ‘좋아. 그럼 네가 보기에 그 드라마 제작사, 전망은 어때? 투자, 할 만해?’

    ‘너도 알잖아. 미국 드라마는 방송국보다 제작사 권리가 크다는 거. 잘만 되면 돈 버는 거야 문제도 아니지. 어차피 시청률만 높게 나오면 방송국에서 다음 시즌 만들어 달라고 할 거 아냐. 문제는 드라마가 흥행을 하느냐 마느냐지.’

    ‘어떤 드라만지 알아? 그 드라마 흥행할 것 같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드라마 대본을 본 것도 아니고, 또 그걸 본다고 내가 아냐? 파일럿 방송이라도 나왔다면 그걸 본 사람들 반응 즉각 알 수 있으니까 또 혹시 모르지.’

    ‘근데 그 사람은 어떻게 알고 투자를 한 걸까?’

    ‘그러게.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러고 보면 운명이란 것도 있으려나?’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사실 거기 제작사 대표, 우리 로펌 변호사하고 친구더라고. 투자자를 못 구해서 나한테도 혹시 투자자 아는 사람 있는지 부탁하려고 했었다나 봐. 근데 내가 투자자를 어떻게 알아? 주변에 돈 있는 사람이라고는 너, 아니 너네 보스밖에 더 있냐? 만약 그 사람이 나한테 이야기를 했더라면 난 너한테 물었겠지. 생각 있냐고.’

    ‘근데 나까지는 안 왔다라…….’

    ‘그러니까 운명이라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난 그런 거 안 믿어.’

    ‘그러는 넌? 만약에 드라마 제작사에 투자할 의향이 있냐고 물으면 넌 뭐라고 대답했을까?’

    고민이 되기는 했겠지만 분명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이 기회의 땅인 건 분명한 일.

    특히나 파일럿 시스템이었으니 파일럿 반응을 보고 이후 투자 규모를 조정하면 그렇게 리스크가 큰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미국 드라마를 투자할 기회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서필진의 입맛이 썼다.

    거기다 신도현까지.

    충분히 타 제작사에서도 노릴 만한 필력이었다. 한국에는 없을 스케일의 상상력. 그런 건 노력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었으니 남들이 노리기 전에 데려와야 한단 생각에 박현호에게 직접 만나 보라고 권유까지 했다. 그런데 결국 빼앗겼다. 그것도 민경우한테.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살짝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순간, 그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서필진입니다.”

    * * *

    “짜장면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짜장면을 비빈 경우가 입 안 가득 면을 넣고 우적댔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경우 역시 어릴 때 짜장면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으니, 할머니는 그의 생일이 되면 아껴둔 쌈짓돈으로 짜장면을 사 주시곤 했다.

    이곳은 그의 생일 때마다 할머니와 함께 오던 중국집이었다. 오늘은 경우가 아닌 이은석의 생일, 가게는 그대로였지만 할머니가 안 계셔서인지 짜장면이 그때만큼 맛있지 않았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추억을 곱씹던 경우가 다시 한 젓가락 가득 뜬 순간, 출입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 민 작가님?”

    그의 앞에 이은석이 서 있었다.

    “오래간만이네요. 지난번 경찰서에서 만나고 처음이죠? 연락 한번 주실 줄 알았는데. 솔직히 저 기다렸거든요.”

    어느새 자연스레 경우의 앞에 앉은 이은석은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었다.

    “이모님, 여기 짜장면 하나요!”

    주문을 한 그가 태연하게 물을 따라 마셨다.

    그런 그를 경우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긴 이젠 그의 생일이었으니 그가 이곳에 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 그,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좀 바빴습니다.”

    “바쁘시겠죠. 아, 그 드라마 잘 봤어요. 재미있더라구요.”

    “감사합니다.”

    “근데 작가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여기 되고 외진 골목에 있어서 아는 사람 잘 없는데.”

    “어릴 때 와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생각이 나서 와 봤습니다.”

    “그러시구나. 작가님 되게 부자시라면서요. 부자들은 이런 데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아, 형사과 형님들한테 들었어요. 되게 부자시라고.”

    “돈 많다고 뭐 다를 거 있나요. 사람 사는 거 똑같죠.”

    “하긴, 맞는 말씀입니다.”

    그사이 짜장면이 나오자 이은석이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역시! 이 맛이지.”

    “복스럽게 잘 드시네요. 한 그릇 더 시켜 드릴까요? 제가 사겠습니다.”

    “아니요,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실은 오늘 제 생일이거든요. 비싼 거 먹었다고 하도 자랑을 해서, 저는 부자한테 짜장면 사 줬다고 형사과 형님들한테 자랑하렵니다. 흐흐.”

    입가에 짜장면 소스를 묻히며 먹는 그를 보며 경우는 자신과 같으면서 전혀 다른 그가 신기하면서도 이상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선물을 좀 하고 싶은데. 필요한 게 있습니까? 이왕 선물할 거 필요한 걸 주자는 주의라.”

    “그럼, 저랑 친구하실래요? 듣자 하니 나이도 우리 같은 거 같은데.”

    의외의 이야기에 잠시 망설이던 경우는 이내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은석아. 우리 친구 하자.”

    이은석이 씩 웃자 경우 역시 웃었다. 그런데 그때, 경우의 전화벨이 울렸다.

    [지금 포털 사이트 들어가 봐.]

    “왜?”

    [보면 알아.]

    다급한 김강철의 목소리에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든 경우가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봤더니, 실시간 검색어 순위 상위권이 온통 경우와 관련된 것들로 도배돼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