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61화 (61/250)
  • #61.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4)

    경우는 신도현이 짜놓은 시놉시스를 토대로 대본을 쓰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물론 도왔다기보다는 막힌 부분에 실마리를 줘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한 것뿐이었다.

    늘 혼자 하는데 익숙했던 신도현은 막혔던 글이 술술 풀리자 그 모든 것을 경우의 덕으로 돌렸다.

    “작가님은 정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이미 <제로섬> 봐서 그 기억을 떠올리며 거들어 준 것뿐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참았다.

    “그거야 시놉시스가 워낙 잘 나와 있잖아요. 아카데미는 안 다녔다고 하더니 어떻게 이렇게 잘 쓰는 거예요?”

    “그냥 하는 소린 거 아는데 작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부끄럽네요.”

    “아니에요. 정말 잘 쓰신다고 생각해요. 궁금해서 그래요.”

    “별 건 없고…… 드라마 엄청 많이 봤어요. 드라마 보는 거 좋아해서요. 만화도 많이 보고.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다가 날밤 샐 때 많거든요. 그래서 동생한테 만날 혼나요.”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하더니 신도현을 두고 하는 소린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경우의 반응에 신도현은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근데 제가 세 살 어린데 그냥 편하게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그럼 신 작가도 저한테 형이라고 불러요. 형, 동생 하죠.”

    “어,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럴 순 없어요.”

    안 된다며 펄쩍 뛰는 신도현의 모습에 경우는 살짝 의아했다.

    “왜요?”

    “작가님처럼 대단하신 분한테 제가 어떻게…… 저, 그렇게 못 해요.”

    “그럼 저도 편하게 말 못 놓죠. 저만 그럴 순 없잖아요.”

    잠시 생각하던 신도현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잠시만요.”

    곧이어 문이 열리자 이것저것 바리바리 챙겨온 김강철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신도현 작가님?”

    “전데, 누구세요?”

    “아, 내가 갖다 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경우의 부름에 안으로 들어온 김강철이 문 밖에 쌓아 둔 물건을 하나둘 옮기고 있었다. 뿌듯한 얼굴로 보고 있는 경우를 향해 김강철이 그를 째려봤다. 분명 눈으로 욕을 하고 있음을 분명했다.

    ‘다 저녁에 이런 걸 시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할 말 많지만 나중에 보자.’

    대충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경우는 짐짓 모른 척했다. 짐을 다 내려놓은 김강철이 돌아가자 선물 상자를 열어 보듯 경우가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건 지하 방이라 공기가 좀 안 좋을 것 같아서 공기청정기, 이건 작가님 좋은 글 쓰시려면 체력 보강을 해야 하니까 홍삼, 한국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밥심! 밥 굶으면 안 되니까 반찬 몇 가지랑 또…….”

    잡상인처럼 늘어놓는 경우의 모습을 잠시 보던 신도현이 물었다.

    “저기 이걸 왜 주세요?”

    “왜냐니요? 계약서에 도장 찍었잖아요. 아직 입금 안 했는데 무르자고 하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일종의 족쇄 같은 거죠. 공짜 아니고 반품은 안 되니까 알아서 하세요.”

    신도현이 잠시 동생을 배웅 나간 사이 집안을 둘러보던 경우는 깔끔하긴 했지만 허술한 집안 살림이 마음에 걸렸다. 그도 혼자 살고 있었지만 가끔 본가의 살림을 맡고 있는 함양댁 아주머니가 봐주고 있었으니 부족한 것이 없었다.

    형의 마음 조금, 팬 된 입장에서 조금, 그를 돕고 싶었다.

    신이 나서 물건을 꺼내놓는 경우와 달리 신도현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작가님?”

    “아니, 그게…….”

    조금은 울쩍한 마음으로 신도현이 경우를 보고 있었다.

    “사실 저 작가님 처음 봤을 때 되게 싫어했었어요.”

    “저를요? 왜요?”

    잠시 머뭇대던 그는 호텔 발렛 파킹을 하면서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경우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그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으니.

    ‘민경우 이 자식! 도대체 날 얼마나 더 부끄럽게 만들 참이야!’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경우는 이너피스를 외치며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근데 그날 만났던 작가님이랑 최근에 봤던 작가님이 너무 달라서 좀 혼란스러웠어요.”

    경우를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제가 할 말이 없는데요, 그…… 그때는 제가 좀 정신적으로 몰려 있어 가지고 아무튼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이제는 그런 일 없습니다. 진짭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네, 이제는 괜찮습니다. 작가님이 과거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진 걸 제가 봤으니까요.”

    부끄러워하는 경우를 보던 신도현이 잠시 망설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전요, 한번도 이런 호의 받아 본 적 없어요. 전 사람이 착하다는 말 믿지 않아요. 사람은 굉장히 이기적이든요.”

    그의 드라마 속 인물들의 가치관이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정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3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좀 편찮으셨어요. 그때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계시고…… 전 밥도 할 줄 몰랐어요. 동생을 학교엔 보내야 하니까 처음 밥하고 반찬도 만들고 그랬죠.”

    “고생 많았겠어요.”

    경우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고생 축에나 끼나요. 그때 주인 집 아주머니가 사내애들 둘이 뭘 해 먹냐 면서 생선하고 김치를 가져다 주셨는데 생선은 냉동실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말라서 구워도 딱딱하고 김치는 또 몇 년이나 된 건지 군내가 나더라고요.”

    “…….”

    “자기들은 딱한 애들 돕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먹기는 싫고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 처리하려고 했단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없이 사니까 그런 것도 감사해하면서 먹을 거라고. 근데요, 저 그날 그거 다 버렸어요. 혹시라도 동생이 볼까 봐, 그래서 맘 상할까 봐 몰래 버렸어요. 세상은 저한테 그랬어요. 불쌍한 사람, 도와줘야 할 사람. 그래서 사정이 조금 더 나은 자신들은 행복한 거라고 위안을 느끼게 하는 존재.”

    “…….”

    “그래서 작가님이 그때 병원비 내주신 거 좋게 보이지 않았어요. 예전 일도 있었으니까 다른 의도가 있겠거니, 나중에라도 책잡힐 일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돈부터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사람은 달라질 수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선의를 베풀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경우는 그 마음,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해장국집 사장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도 신도현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해장국집 사장님을 만난 후 세상엔 저렇게 좋은 사람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으니까.

    경우는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신 작가, 뭔가 잘못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네?”

    “이유 없는 선의가 어딨습니까?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못 들어봤어요? 있는 놈들이 더하다는 말.”

    “…….”

    “이거 나중에 다 돌려받을 거예요. 앞으로 우리랑 같이 만들 드라마, <제로섬>만큼 대박 나게 만들어 달란 뇌물이란 말입니다. 아셨어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신도현은 그게 경우식 농담임을 깨닫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거야 돈 받았으니 당연히 할 일인데요.”

    “그렇죠. 당연한 거죠. 근데 그런 생각도 안 하고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전 손해 날 짓은 절대 안 합니다. 이건 작가님에 대한 제 투자예요. 어쨌든 회사 대표니까 소속 작가님 케어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경우의 말에 신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심각한 표정에 경우는 혹시 자신이 잘못 말한 게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잠시, 신도현이 입을 열었다.

    “저기, 이런 말씀드리기 좀 조심스러운데요…….”

    “말씀하세요.”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순식간의 태세 전환에 경우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경우는 오랜만에 해장국집을 찾았다.

    카운터에는 예전 그대로 사장님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 어, 어서오세요. 아니, 이게 누구야? 민 작가 아니야?”

    “사장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나야 잘 있었지. 근데 요즘은 왜 통 안 왔어?”

    “좀 바빠서요. 저 배고픈데 식사 돼요?”

    “당연하지. 얼른 앉아. 내가 갖다 줄게. 참, 그리고 지난번 건강 검진, 안 그래도 된다고 그러네.”

    “별 이상은 없다죠?”

    “뭐, 무슨 수치가 조금 떨어졌다고 조심은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거야 나이 든 사람 다 그렇지 뭐.”

    “그래도 해마다 건강 검진 받으세요. 병원 홍보 차 건강 검진 쿠폰이 오니까 걱정 말고 그냥 쓰세요. 다른 사람 주시면 안 되고 꼭 사장님이 가셔야 해요, 아셨죠?”

    “알았어. 얼른 앉아 있어.”

    “사장님…….”

    “왜? 뭐 또 필요한 거 있어?”

    “그게 아니라…… 고맙습니다.”

    “응? 뭐가?”

    “그냥요. 전부 다.”

    “고마우면 내가 고마워해야지. 사람 참 싱겁긴. 얼른 앉아 있어, 내 금방 가져다 줄 테니까.”

    “네.”

    사장님이 가져다 준 해장국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경우는 속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든든해졌다.

    * * *

    <제로섬>의 방송이 재개되고 상승하던 <곰과 여우 사이>의 시청률은 정체되는 듯했으나 드라마가 회를 더해 갈수록 호평이 이어졌다. 시청률 역시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상승한 덕에 시청률 2위를 기록하며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경우는 그동안 고생한 김해영 작가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이거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왜요? 그래도 드라마 시청률 2위에 착한 드라마로 마감할 수 있었잖아요. 다 작가님 노력 덕분이죠.”

    만약 자신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제로섬>과 붙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시청률이 나왔을 거란 생각이 경우는 사실 아쉬웠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도 선방을 한 건 김해영의 능력이었으니까.

    드라마가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 반, 아쉬운 마음 반, 어수선한 그때 경우가 박수를 탁탁 치며 모두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 여러분들께 새로 알려드릴 소식이 있어요. 새로운 작가님을 모시게 되었어요.”

    눈을 반짝이며 누가 올 것인가 다들 궁금해하던 순간이었다.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출입문으로 신도현이 어색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제로섬>을 쓰신 신도현 작가님이십니다.”

    신도현의 얼굴을 몰랐던 사람들은 그의 정체에 놀라 웅성대기 시작했다.

    * * *

    [<제로섬> 신도현 작가, 경쟁작 <곰과 여우 사이> 제작사 ‘스튜디오 글로리’ 전속 계약!]

    [어제의 적, 오늘의 동지 신도현 작가의 깜짝 행보]

    [경쟁 관계 작가도 포용하는 김종수 대표]

    신도현의 ‘스튜디오 글로리’행에 관련된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던 박현호는 책상을 쾅 내려쳤다. 앞에 서 있던 서필진이 잠시 움찔했을 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필진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죄송합니다.”

    “네가 그 작가 새ㄲ…… 작가 직접 만나라고, 그럼 성의를 봐서라도 우리 쪽으로 올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직접 가서 만났는데, 그 결과가 이거냐?”

    “저쪽에서도 나섰을 줄은 예상 못 했습니다. 제 실책입니다.”

    “이제 미디어법 통과됐는데 내년에 방송 승인 받고 개국 준비하려면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대본이 뚝딱 나오는 거 아니라며!”

    “유니언 스튜디오의 기존 소속 작가들도 업계에선 탑입니다. 일단 아이템 회의부터 해서 준비를 하면-.”

    “그런 말 듣자고 비싼 돈 줘 가면서 너를 미국에서 데려온 게 아니잖아. 고이다 못해 썩었다며. 됐다. 이미 끝난 일 더 미련 둬 봐야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나가 봐.”

    서필진이 방을 나가자 박현호는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허? 이 자식 완전 웃기네. 곧 넘어올 것처럼 해 놓고 어딜 가? 가만, 어디라 했지?”

    잠시 생각하던 박현호가 숨겨져 있던 인터넷 창을 띄우자, 경우의 사진과 함께 짤막한 기사가 나왔다.

    “스튜디오 글로리. 민경우 이 새끼, 네가 중간에서 가로챘다 이거지? 그럼 가만히 당해 줄 내가 아니지.”

    생각을 정리한 박현호가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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