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60화 (60/250)
  • #60.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3)

    경우가 병실에 문을 열자 다리에 깁스를 한 안청모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신도현 작가가 함께 있었다. 그가 함께 있는 모습에 경우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인사를 나눴다.

    어쨌든 경우의 등장에 안청모가 웃으며 말했다.

    “민 작가, 어떻게 알고 왔어?”

    “기사 보고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김 PD님 물고 늘어졌죠.”

    “어쨌든 고맙네. 여기 앉아. 민 작가도 음료수 하나 마실래?”

    벌써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한쪽엔 음료수 상자가 쌓여 있었다.

    해맑은 안청모의 모습이 경우는 더 쓰게 느껴졌다.

    “됐습니다.”

    경우의 등장에 신도현이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래요, 신 작가. 여기까지 같이 와 줘서 고마워요.”

    “네…….”

    잠시 머뭇거리던 신도현이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자 경우가 몰아붙이듯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시청률 링거 맞는 기분이라면서 진짜 링거를 맞고 이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갑자기 다리는 왜 부러졌는데요?”

    “어쩌긴, 까불다가 그랬지.”

    머쓱한 안청모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무슨 일인데요?”

    “아, 까불다가 넘어져서 계단 굴렀다니까 그러네.”

    “형님이 어디 그런 분이세요? 저한테도 말 못 할 정도의 일입니까? 전 진짜 형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서운할라고 하네요.”

    토라진 경우의 얼굴에 안청모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말은…… 그래, 알았어. 사실 촬영 준비하다가 오토바이 액션 씬이 있었는데 좀 위험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해 보다가 다친 거야.”

    “오, 오토바이? 그거 많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스턴트는요?”

    “오토바이 운전이야 스턴트가 했지. 그래서 그나마 이 정도만 다친 거야. 촬영 준비하다 보면 별일이 다 생기잖아. 그런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참, 너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

    “그건 왜요? 혹시 기사 그렇게 난 거랑 관련 있는 거예요? 설마 국장님이 독박 쓰라고 시켰어요?”

    “아니야. 국장님이 그럴 리가 있냐. 내가 그러겠다고 한 거야. 너도 알잖아. 작년에 나 조연출 할 때 우리 드라마 사고난 거. 결국 중단됐고……. 그래서 방송국 전체가 좀 트라우마가 있어. 사고에 대한 거.”

    “그런 거였으면 더 조심했어야죠.”

    “링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뽕이었던 거지. 완전 헤롱 맛이 간 거야. 어쨌든 단막극 이후로 첫 미니 시리즈 연출이잖아.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 내 몫이 아니었던 건데…….”

    “네 몫, 내 몫 어디 따로 있습니까? 그냥 선점하는 게 임자죠.”

    “예전엔 사고 났을 때 그 담당 PD, 무지하게 싫어했거든. 솔직히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내가 당해 보니까 벌 받았구나 싶은 생각이 드네. 결국 이렇게 돌고 돌아 화살이 나한테 돌아오기도 하는 건데…… 그치?”

    “그런 게 어딨습니까? 그럼 죄 짓고 산 놈들은 다 저승사자가 데려갔어야죠. 그냥 운이 없었던 겁니다. 이만 하길 다행이라 여기십시오.”

    “그래, 네 말이 맞다.”

    “…….”

    “사실 이 드라마 내가 하겠다고 욕심 부렸어. 허 PD님이라고 인턴 작가 담당하시는 베테랑 PD님 계시거든. 그분이 대본을 열심히 보시더라. 인턴 작가가 냈다면서. 심심해서 나도 보는데 와, 정말 대본만 봐도 너무 재밌어서 내가 하겠다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어.”

    “뭐, 마음에 들었으면 그럴 수 있죠.”

    “그때 허 PD님 다른 드라마 하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어서 내가 잘 끼어들었다 생각했지. 뭐 지금은 이 꼴이 났지만. 그래도 차라리 내가 다친 게 낫지, 다른 사람이 다쳤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 같아.”

    “형님 몸은 무쇠라도 됩니까? 다행은 무슨 다행이에요. 그러다 삼도천에서 세수해요.”

    “그런가? 그래도 나 다쳤다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영 못 살지는 않았어. 그치? 드라마에서 빠진 건 아쉽지만 나만 빠진 덕에 드라마는 계속할 수 있을 거 아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솔직히 저 그 드라마 보면서 조마조마했어요. 나가도 너무 나갔어요. 뭐 지금이야 입단속을 했다고 해도 듣는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는데 언젠가 알려지지 않겠어요?”

    “막을 수 있는 데까지는 막아야지. 다행히 그때 현장에 있던 사람 몇 안 되거든. 나랑 우리 조연출이랑 오토바이 탔던 스턴트맨이랑 작가님…… 참, 우리 작가님 괜찮나 모르겠네.”

    “작가님이 왜요?”

    “나 다친 거 보고 놀래서 울고불고…….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시더라.”

    “아니, 뭘 잘못 했길래?”

    “괜히 그런 씬 적어서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욕심은 내가 더 내서 이 꼴 난 건데…… 위험할 것 같다고는 생각했어. 그때 수정을 해 달라고 했으면 이런 일도 안 생겼지.”

    “그 욕심이 항상 문제를 일으키죠.”

    “그래도 쌤통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걱정도 해 주고 고맙다.”

    “솔직히 쌤통입니다. 결방까지 돼서 반응 장난 아니던데요.”

    “그건 하아……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올해 삼잰가?”

    “됐습니다. 전 그만 가 볼랍니다. 부러진 거야 뭐 금방 붙겠죠.”

    “근데 넌 어떻게 된 게 돈도 많다면서 음료수 하나를 안 사 오고 빈 손으로 오냐?”

    “물배 찰 일 있어요? 이미 받은 것도 많구만. 하여간 욕심도 많으십니다. 저 가요!”

    투덜대는 안청모를 뒤로 하고 병실을 막 빠져 나왔을 때 복도엔 아직 돌아가지 않는 신도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잠시 얘기 좀 하실 수 있을까요?”

    “그러세요.”

    그렇게 근처 커피숍으로 간 두 사람.

    막상 불러 놓긴 했는데 신도현은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작가님?”

    “네, 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 보세요.”

    “저기, 그러니까…… 저…… 글이…… 글이 안 써져요.”

    “네?”

    “한 글자도 못 쓰겠어요. PD님 저렇게 되신 게 다 저 때문인 것 같고 이렇게 쓰면 누가 또 다치는 게 아닌가 싶고 그래서…… 그래서…….”

    경우는 그가 사고 현장을 목격한 탓에 트라우마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간 PD에 이어 작가까지 교체될 가능성도 있었다. 경우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 그때 신도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황당하시죠? 갑자기 이런 이야기 꺼내는 거. 진작 PD님께 얘기해서 어떻게든 해결 했어야 했는데 도저히 입이 안 떨어져서……. 주변에 제가 달리 아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패닉에 빠진 듯 두서 없이 하는 말이었지만 경우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가장 의지하는 건 아무래도 안청모였을 테지만 자신 때문에 다쳤다는 생각에 이야기할 수 없었던 거겠지 싶었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저도 제가 이상하단 거 잘 압니다.”

    “뭐, 이해는 합니다. 솔직히 작가들은 현장에서 일하는 게 아니니까 PD님 아니면 좀 어렵죠. 그렇다고 새로 바뀐 PD님한테 털어놨다가 짤릴까 걱정도 되고요. 저야 안면도 있고 같은 입장이니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

    “네?”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경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그 이후 겪었던 그는 사실 기억 속 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거기다 누구보다 자신을 먼저 인정해 준 사람이었으니, 이런 상황에 다른 사람도 아닌 그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건 솔직히 말하자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좋습니다. 제가 도와드리죠.”

    “정말이세요?”

    “실은 제가…… 작가님 팬이거든요.”

    “네? 저, 저요?”

    당황해하는 신도현을 향해 경우가 씩 웃었다.

    “참, 저희 회사에서 동 시간대 경쟁작 하고 있는 건 알고 계시죠?”

    “그럼요.”

    “전 저희 드라마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당연하죠.”

    “그리고 작가님이 다시 집필을 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근데 이 사실이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좋을 거 없겠죠. 그러니 당분간은 비밀로 하죠.”

    “그렇게 해 주신다면 오히려 제가 더 고맙죠.”

    “물론 조건이 있습니다.”

    경우는 그를 향해 웃었다. 그런데 신도현은 그의 웃음이 어쩐지 사악한 악당의 웃음, 그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 생의 <제로섬>은 경우가 이전에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이전 생에서 <제로섬>이 청양고추를 팍팍 넣은 얼큰한 라면이라면 지금의 <제로섬>은 캡사이신을 왕창 부은 마라탕 같았다.

    그만큼 자극적인 요소가 더 많이 들어갔던 것.

    충분히 좋은 작가였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신도현과 지금의 신도현이 다르단 생각에 좀 안타까웠다.

    그래서 약간의 도움을 주고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게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와 이야기를 마친 경우는 사무실로 돌아가 새롭게 꾸린 홍보팀으로 향했다.

    “옛날에 그 광고 기억하세요? ‘선영아 사랑해’.”

    “알죠. 도대체 선영이가 누구냐고 난리 났었잖아요. 선영이란 이름 가진 여자들이 혹시 자기 아니냐고 설렜다고 하던데 광고인 줄 알고 김이 팍 샜다는 후문이 있죠.”

    “<제로섬> 결방하는 동안 우리 그 광고처럼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전봇대, 지하철 광고판, 버스 외부에 광고해 보자고요. 여주인공 이름 써서.”

    “그럼 수아야, 사랑해?”

    “시리즈로 가는 게 어떨까 생각했어요. 처음엔 ‘수아야 사랑해’, 다음엔 ‘수아야 나랑 결혼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맘 받아 줄 거면 월요일 10시까지 KBC로 와 줘’ 이렇게요.”

    “처음엔 수아가 누군지 궁금하게 만들고 마지막엔 그게 드라마라는 걸 알리자 뭐 그런 거죠?”

    “네. 자연히 옛날 광고를 떠올릴 테고 어떤 광곤지 궁금해하겠죠. 어중간한 시청률이라면 모를까 차라리 지금처럼 시청률이 낮은 시점이라면 광고 효과가 더 나올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확실히 호기심 자극은 할 것 같네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우리 목적은 월화극 시청률 1위가 아닙니다. 새로운 시청자의 유입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그 점 유념하세요.”

    “네.”

    그렇게 홍보가 결정되자 지하철, 버스는 물론 전봇대 벽면까지 광고가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광고에 대한 호기심에 <곰과 여우 사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났고 그 덕에 호기심은 드라마 다시보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 * *

    신도현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간 경우를 신도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 그때 그 형님!”

    “도윤 학생, 오래간만이에요. 아, 이제 대학생이려나?”

    “도윤이가 공부를 잘하거든요. 의대생이에요.”

    자랑스러운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눈빛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야, 대단하네. 어쩐지 공부 잘하게 생겼다 싶었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되세요.”

    “감사합니다. 형, 나 스터디 좀 다녀올게.”

    “이 시간에?”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려는 건지 진짜 스터디가 있는 건지, 신도윤이 밖으로 나가고 형이 그를 배웅하는 사이 경우는 집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형제 둘이 살고 있는 집치고는 깨끗한 편이었다.

    잠시 후, 신도현이 돌아왔다.

    “차라도 한잔 드릴게요.”

    “먹고 왔습니다. 그보다 좀 앉으시죠.”

    앉은뱅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경우는 미리 준비해 온 계약서를 꺼냈다.

    그러니까 안청모가 입원한 병원에서 경우는 신도현을 돕는 조건으로 자신의 제작사 ‘스튜디오 글로리’와 작가 전속 계약을 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저, 저를요?”

    “왜요? 이상해요? 말씀드렸잖아요. 작가님 팬이라고. 거짓말 아니고 진짠데.”

    “아니, 그러니까 그게…….”

    “설마 벌써 유니언 스튜디오하고 계약하신 건 아니죠?”

    경우에 말에 놀란 신도현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걸 어떻게.”

    “설마 벌써 계약하셨어요?”

    “아니요, 아직.”

    “조건은 나쁘지 않을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신도현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작사에선 훌륭한 인재를 모으는 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작가님은 앞으로 더 좋은 작가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

    “솔직히 말하자면 누굴 물 먹이고 싶어졌거든.”

    박현호를 떠올린 경우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오르자 신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웃음이 어쩐지 과거 그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품게 한 그때를 떠올리게 만든 탓에 이 계약이 정말 괜찮은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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