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59화 (59/250)

#59.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2)

“우리 애가 좀 늦네.”

경우는 슬쩍 어머니 윤정숙을 돌아봤다. 이 자리가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윤 이사장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 이 자리 내가 부탁한 거니까.”

“아, 네.”

“그날 내가 민 작가를 좋게 봤어. 우리 애랑 만나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윤 이사장한테 부탁했지.”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기는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하필 지금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난처한 그때 윤정숙이 말을 이었다.

“여사님 어쩌죠? 제가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요.”

“여긴 내가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들어가 봐요. 바쁜 사람 시간 뺏으면 안 되지.”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요. 다음에 봐요.”

그렇게 자리에 일어나는 윤정숙의 눈짓에 경우도 함께 일어났다.

“어머니 배웅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엘리베이터 앞까지 오자 경우가 불만을 터뜨렸다.

“미리 말씀이라도 해 주지 그러셨어요.”

“그럼 네가 이 자리까지 왔겠니?”

“…….”

“설마 만나는 여자는 없지? 하긴, 있을 리가 없지. 집 아니면 사무실만 다니는데 여자 만날 새가 어디 있겠어.”

“이제 제 뒷조사도 하세요?”

“뒷조사는 무슨.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알아본 것뿐이야. 손 여사님, 우리 미술관에 아주 중요한 고객이셔. 그러니까 예의 지켜. 그 말은 네가 먼저 자리 박차고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이고. 알지?”

“알았어요.”

그렇게 윤정숙이 돌아가자 경우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손 여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이런 자리 불편하죠?”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요. 사실 결혼을 전제로 만나라 그런 건 아니에요. 이따 보면 알겠지만 우리 애가 워낙 일밖에 모르는 애라. 참, 우리 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죠?”

“네. 어머니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셨거든요.”

“그랬겠지. 실은 우리 딸이 세상을 일찍 떴어요. 그래서 손녀라곤 해도 내 손으로 키운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야. 어서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루고 그렇게 살아야 내가 눈을 감을 것 같은데 저렇게 일만 하고 있으니…….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하더니 저기 왔네요.”

경우가 돌아보니 긴 머리를 질끈 동여 맨 남색 슈트 차림의 젊은 아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일이 좀 많아서.”

“여기 다 바쁜 사람들이야. 유난은.”

“아이, 할머니.”

손녀의 애교에 손 여사는 무장 해제된 듯 녹아내렸다.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잠시 지켜보고 있던 경우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민경우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강희주라고 해요.”

“그럼 두 사람, 이야기들 나눠요. 나이 많은 사람은 여기서 빠져 줘야지.”

그렇게 손 여사도 자리를 비우자 강희주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아, 배고프다. 일단 뭐 좀 먹죠.”

웨이터를 부른 두 사람은 가장 빨리 되는 것으로 주문했다.

“이런 자리 처음이죠?”

“네.”

“그럴 것 같았어요. 앞으로 이런 자리 종종 생길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한번 만나 볼래요?”

“예?”

“뭘 그렇게 놀라요? 그러려고 이 자리에 나온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알아요, 알아. 이러다 오해하겠네. 민경우 씨가 마음에 든다는 게 아니라 어른들 장단에 적당히 맞춰 주자는 거죠. 솔직히 아무것도 모르고 불려 나와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만나는 거 좀 부담스럽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어른들한테는 당분간 좀 만나 보겠다 그러자고요.”

“뭐, 좋습니다.”

곧이어 음식이 나오자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작가라고 하시던데.”

“네, 드라마 씁니다.”

“그럼 민 작가님, 민 작가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러세요. 그럼 전 검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편할대로요. 강 검이라고 불러도 되고 저보다 한 살 많으시다고 했으니까 그냥 이름으로 부르셔도 돼요. 희주.”

“그냥 검사님이라고 할게요.”

“네, 민 작가님. 근데 민 작가님 좀 특이한 거 아세요?”

“뭐가요?”

“솔직히 평범한 집안은 아니잖아요.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이미 가진 것도 많으면서 적어도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민 작가님은 아니더라구요. 듣기론 본인이 원해서 했다고 했는데.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거 전 그거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검사님은요? 왜 검사가 된 거예요? 본인이 원하신 건가요?”

“당연하죠.”

“그럼 검사님도 저랑 같은 과겠네요.”

“그런가? 사실 방금도 조서 보다가 시간 가는 줄 몰라서 늦은 거거든요. 그러고 보니 맞네요. 그래서 민 작가님을 더 편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적어도 이야기는 통할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떠드는 통에 경우 역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작가란 모름지기 할 이야기가 많아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걸 글로 적은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지낸 경우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희주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특히 그 이야기들이 그녀가 직접 다룬 사건들이었기에 생생하고 흥미진진했다. 이야기꾼으로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그렇게 밥을 다 먹고도 수다쟁이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민경우?”

소리에 돌아보니 대진일보의 박현호였다.

“여기 웬일이야?”

그러더니 슬쩍 강희주를 바라봤다.

“데이트?”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알았다. 불청객은 빠져야지.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니까.”

그렇게 돌아서서 가는 박현호의 모습을 보며 강희주의 인상이 잔뜩 찌푸렸다.

“우리 데이트 아니에요?”

“네?”

“농담이에요, 농담. 작가님 은근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근데 저 사람은 누구예요? 오우, 완전 느끼해. 데이트처럼 보였으면 아는 척을 말아야지. 안 그래요? 아, 미안요. 친구분한테 제가 너무 막말했네요. 아시다시피 눈치 보고 자라지 못했거든요..”

“아니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가끔 그런 소리 듣거든요. 어려운 거 없이 자라서 막말한다고.”

디저트를 마저 먹으려는 그때 멀찍이 앉은 박현호가 누군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누굴 만나나 싶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향한 경우는 상대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신도현 작가? 드라마 땜에 바쁜 사람이 여긴 왜?’

잠시 생각하던 그에게 강희주가 입을 열었다.

“그만 일어나죠. 시간도 많이 지났는데.”

“그러시죠.”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전화번호를 주고 받은 후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우는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박현호와 신도현의 모습에 시선이 갔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돌아섰다.

* * *

“수정본 좀 봐주세요.”

날을 꼴딱 샌 건지 다크서클이 더 깊게 내려온 김해영이 9부 수정본을 내밀었다. 경우는 새로 나온 9부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대본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얼굴은 더욱 굳어지고 말았다.

김해영이 <제로섬>을 너무 의식한 탓이었다.

<제로섬>은 신체 포기 각서까지 쓴 사채 빚이 있는 사람들이 한강으로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기본 골자였다.

베일에 싸인 게임에 참가해 끝까지 살아남으면 지금까지의 빚을 모두 청산해 주는 것은 물론 재기할 수 있는 상금이 주어진다.

하지만 게임에서 탈락하면 빚은 두 배가 된다.

만약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차피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빚이 두 배로 늘어나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한다면 빚을 청산하고 재기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다.

‘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의 모티브가 된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

통제가 되지 않는 혼돈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보여 줬던 이 실험을 참고한 <제로섬>은 각양각색의 등장인물들로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파격적인 소재와 내용, 다음 화를 예상할 수 없는 흥미진진함은 물론 <제로섬>이 사람들의 인기를 끈 이유는 기존 드라마 문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 첫째로 주인공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었다.

등장 인물은 모두 열 명. 회별로 비중이 달라지지만 나중에 보면 결국 비등비등하다는 것. 특히나 지난주 방송에서 사람들이 주인공이라 생각했던 등장인물 하나가 죽음을 맞았다. 그 탓에 지켜보던 시청자들의 충격은 매우 컸다.

거기다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경제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등장인물들에게 자신이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너무 자극적이라는 항의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라는 주장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시청률 상승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현실은 이보다 더하다며 설정은 그저 드라마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일 뿐이라고 드라마 관계자는 논란을 정리하려 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자연히 <곰과 여우 사이>는 결혼을 앞둔 커플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해도 결국 사랑놀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 점을 의식했던 김해영은 결국 9부 대본에 자극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다. 여주인공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 밝혀지며 두 사람의 결혼에 먹구름이 끼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남녀 연애의 현실적인 문제를 시작으로 결혼 문제까지 들여다보려 했던 드라마의 기획 의도가 바사삭 깨지는 순간이었다.

대본을 내려놓은 경우는 초조해하는 김해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작가님, 초조한 건 알겠는데 이건 아니에요. 작가님은 이 대본이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저도 알아요. 쓰면서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고…… 근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작가님, 전에 작가님이 저한테 그러셨죠? 제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있다고. 저의 의견을 따른다고요.”

“네.”

“작가님을 못 믿겠으면 저를 믿으세요. 민 작가를 따르라면서요.”

그제야 굳어졌던 김해영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작가님 전에 보여 주신 9부 대본 그거 좋았어요. 제가 표현이 부족해서 그렇지 작가님은 작가님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를 믿으세요. 아셨죠?”

“네. 작가님 믿을게요.”

김해영은 수정한 9부 대본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는 훨씬 개운해진 얼굴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모든 것이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박민정이 소리쳤다.

“어? 이게 뭐지? <제로섬> PD가 바뀐다는데요.”

“네?”

갑작스러운 소식에 의아한 경우가 박민정의 자리로 가 화면 가득 채운 인터넷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안청모 PD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제로섬>에서 빠지고 허선재 PD가 바통을 이어 받아 연출을 이어 갈 예정이다. 그와 별개로 CG와 특수 효과 탓에 드라마는 2주일 결방, 스페셜로 대체?”

“와, 드라마 결방한다고 악플 장난 아닌데요.”

“드라마 하다가 PD가 바뀌는 경우도 있나?”

“글쎄요. 아예 없지는 않지만 아주 드문 경우죠.”

“그럼 이거 우리한테 좋은 거 아니예요?”

사무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란 속에 경우는 어쩐지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이전 생에서 <제로섬>은 사실 안청모가 아닌 다른 PD가 맡았다. 어차피 시간도 더 앞당겨진 탓이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경우는 안청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김은기에게 전화를 건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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