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58화 (58/250)

#58.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1)

경우는 호텔 방 창문을 통해 타임스퀘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국에서 한 해를 마감하는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많은 일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카운트다운을 세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5, 4, 3, 2, 1.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하늘 위로 솟아 오른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2008년이 가고 2009년 새해가 밝았다.

* * *

<곰과 여우 사이>가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면서 ‘스튜디오 글로리’는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급하게 편성된 <셀룰러 메모리>와 달리 시간에 쫓기지 않아 마음만은 상당히 여유로운 편이었다.

작가인 김해영을 비롯, KBC의 신지홍 PD와 제작 PD를 맡은 이세길은 물론 김종수와 경우까지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항들 중 일주일 간에 걸쳐 본 오디션 결과를 먼저 정해야 했다. 우선 남자 주인공 이상연 역에 누가 좋을지 의견을 모았지만 감독인 신지홍과 작가인 김해영의 의견이 충돌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작가와 PD의 관계는 상당히 미묘해서 당연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시선이 조마조마했다.

“저는 하준필이 괜찮았던 것 같은데요.”

“PD님 이상연은 찌질한 남자의 대명사에요. 헤어지자고 먼저 질러놓고는 술만 먹으면 울면서 전화하는…… 근데 하준필은 솔직히 좀 찌질한 거하고는 거리가 있잖아요. 차라리 오규화가 더 이미지엔 맞아요.”

“작가님. 싱크로율이 잘 맞으면 좋기야 하죠. 근데 너무 현실적이면 사람들이 보다가 짜증 내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려는 건 어디까지나 환상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니까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하지만 이 드라마의 강점은 리얼리티에요. PD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거야…….”

좀처럼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이세길이 김종수에게 물었다.

“대표님 의견은 어떠세요?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을 것 같아요?”

“나? 글쎄. 두 사람 의견이 다 납득이 가. 하준필은 판타지를 충족한다면 오규화는 훨씬 현실감을 줄 테니까. 내 의견이 뭐가 중요하겠어. 두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지.”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럽니까? 아무리 해도 의견이 모아지지 않잖아요.”

괜한 불똥이 튀고 싶지 않았던 김종수가 몸을 사리자 이번엔 화살이 경우에게로 향했다.

“그럼 민 작가님은요?”

“저요?”

“네.”

자기 편을 들어달라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보고 있는 김해영의 시선에 잠시 생각에 잠긴 경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하준필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역시 민 작가님은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왜, 왜요?”

김해영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작가님 말씀대로 이미지는 오규화가 훨씬 잘 맞아요. 근데 이미지와 연기는 다르잖아요. 오디션 때 봤던 하준필의 연기, 전 나쁘지 않던데요.”

“그거야 그렇지만…….”

“일부분이었긴 하지만 드라마 전체를 볼 때 하준필이 연기하는 이상연이 더 잘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PD님 말씀대로 판타지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냥 제 의견이 그렇단 겁니다. 대표님께서도 말씀하셨듯 선택은 두 분이 하시는 거니까요.”

경우의 말에 김해영이 고개를 숙였다. 괜히 한쪽 편을 든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경우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전 생에서 <곰과 여우 사이>에서 이상연은 하준필이 했으니까.

그리고 찌질한 그의 연기는 생각보다 잘 맞아서 이보다 더 나은 캐스팅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있는데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경우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신지홍은 싱글벙글했지만 심상치 않은 김해영의 반응에 슬쩍 눈치가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생각을 정리한 김해영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이상연엔 하준필로 하죠.”

“아니 작가님. 내가 그렇게 말할 때는 안 된다고 하더니.”

“민 작가님 말씀이잖아요. 당연히 따라야죠.”

“예? 그게 무슨.”

“PD님이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에는 그런 말이 전해지고 있어요.”

“?”

“민 작가를 따르라!”

“에?”

의기양양한 김해영이 말을 이었다.

“경험해 보시면 알 거예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신지홍을 향해 김종수와 이세길이 웃으며 김해영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경우의 반응은 신지홍과 다르지 않았으니.

경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듯 말해 버린 것이었다.

가령, 지난해 있었던 올림픽 메달수라든가, 시청률 순위, 혹은 정부의 정책 같은 것들이 경우가 찍은 건 여지없이 맞아 들어갔다. 사람들은 경우가 감이 좋다고 생각했고 우스갯소리로 경우가 하는 대로 따르면 망하진 않는다는 주문 같은 것이 전해졌다.

어쨌든 의견 충돌이 있을 때마다 경우의 조언에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캐스팅이 끝이 나고 추운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바람이 불 무렵 드디어 첫 촬영이 시작됐다.

<셀룰러 메모리> 촬영 때 등장한 간식차가 <곰과 여우 사이>의 촬영장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배우들은 물론 스텝들의 열렬한 환영에 간식차를 준비한 경우의 마음 또한 흡족했다. 더불어 ‘스튜디오 글로리’에 대한 이미지가 배우와 스탭들 사이에서 높아지고 있었으니 일주일 근무시간을 52시간으로 지키려 한다는 점이었다.

훗날 근로기준법을 지켜 제작된 영화가 화제가 될 정도로 흔히 말하는 드라마 판과 영화 판에선 밤샘 촬영, 초과 근무는 쉽게 바뀌지 않는 고질병이었다. 그래서 늘 사고가 따라다녔다.

경우는 이 점을 바꾸고 싶었다. 해서 김종수와 상의해 근무 시간은 웬만하면 지키기로 했다. 누구보다 환영한 건 함께 일하는 스탭들이었고 그들 역시 일을 마치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기 위해 계획된 촬영 스케줄을 성실히 지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첫 방송의 날이 다가왔다.

사무실에 앉아 모두 함께 첫 방송을 보기로 했던 이들의 얼굴이 어쩐지 어두웠다. 이유를 알고 있는 경우는 코 빠뜨리고 있을 김해영을 찾아 사무실을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김 작가님 어디 가셨어요?”

“댁에요. 아무래도 같이 못 보겠대요. 저 같아도 긴장될 것 같아요.”

“그러게. 대본 정말 좋았는데. 대진 운이 너무 안 좋다.”

“MBS에서 그렇게 강력한 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무실의 모든 식구들이 한 목소리로 걱정했던 점, 경우도 예상하지 못한 점이었으니 <곰과 여우 사이>와 맞붙게 된 <제로섬>이 그것이었다.

<제로섬>은 사실 <곰과 여우 사이>보다 2주일 먼저 시작했는데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호평을 이끌어 내며 월화는 물론 주말을 제외한 드라마 시청률에 화제성까지 1위를 기록했다. 당연히 도전자 입장이 된 김해영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김해영이 빠진 사무실엔 남은 이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첫 방송을 함께했다.

* * *

“작가님, 어제 드라마 재밌던데요? 대본도 재밌었지만 드라마도 잘 나왔더라구요. 대본만큼 못하는 드라마도 많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시청률 팍팍 오를 테니까.”

“저,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괜찮다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김해영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작가님, 설마 못 주무신 건 아니죠? 그러다 몸 상해요.”

“걱정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말은 그렇지만 전혀 괜찮은 모습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시청률에 울고 웃는 게 방송 관계자들이었다. 어느 누구도 시청률에 자유롭지 못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을 땐 조기 종영으로 그대로 드라마가 아웃되는 일이 있었으니 단 1퍼센트에도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예전 어떤 작가님은 분 단위 시청률을 분석해 드라마를 수정하느라 쪽대본이 난무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나쁘게만 볼 수 없었다.

60분 이었던 드라마가 70분으로 늘어난 것도 결국 그 시간만큼 시청자를 붙잡아 어떻게든 시청률 상승으로 이어지도록 한 꼼수였으니, 덕분에 10분이나 드라마를 더 써야 하는 작가들만 죽어 나가는 일이었다.

그만큼 경쟁이 심했기에 스트레스 또한 많이 받는 직업이었다.

물론 예외인 인물이 있었으니 경우. 고명희한테 시달릴 대로 시달렸던 그는 어느 순간 시청률에 초연해져 버렸다. 거기다 이전 생에서 <곰과 여우 사이>는 낮은 시청률로 시작, 점점 상승했기에 별 걱정을 하진 않았지만 변수 또한 무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복잡하던 그때, 김해영의 전화가 울렸다.

“네, PD님. 아…… 알겠습니다.”

전화 내용을 짐작한 경우가 물었다.

“평균 시청률 나왔대요? 얼마래요?”

“3퍼센트요…….”

달라졌다. 이전 생에선 분명 4퍼센트로 시작했는데.

그만큼 <제로섬>이 너무 강력했던 것일까?

나중에야 웰메이드 드라마라고 평가받았지만 당시엔 대진 운이 좋지 않아 시청률이 낮은 드라마가 종종 있었다. 아무리 <곰과 여우 사이>가 대본이 좋다고 해도 봐 주지 않으면 무용지물. 혹시라도 <제로섬> 때문에 자신이 예상한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올까 경우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제로섬>의 상승세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던 경우는 <제로섬>의 연출을 맡은 안청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접니다.”

[오, 우리 민 작가. 어쩐 일이야?]

“<제로섬> 시청률 얼마나 나왔어요?”

[흐흐, 25퍼센트. 지난 주보다 3퍼센트나 더 나왔다. 반응 진짜 장난 아니야. 요즘 날밤 새고 일하느라 죽겠는데, 이거 시청률로 링거 맞는 기분이랄까? 하나도 안 피곤해. 근데 웬일이야? 시청률까지 물어 보고. 아, 너희 쪽에서도 이번에 드라마 하지. 미안, 돌아볼 여력이 없어서. 하하.]

“얄밉게 그러실 겁니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우리 게시판 와 봐 봐. 진짜 반응 장난 아니야. 앞으로 계속 미안하게 생겼는데 어쩌지?]

“어쩌긴요. 저희도 금방 따라잡을 겁니다. 긴장하시죠.”

[그래, 긴장하마. 근데 생각만큼 쉽진 않을 거다. 하하.]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고민에 잠긴 그때 걱정스러웠던 김해영은 태연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작가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9부 촬영 들어가기 전에 수정을 좀 해야겠어요.”

“제가 봤을 땐 괜찮았는데요.”

“수정을 하면 더 좋아질 거예요. 걱정 마세요.”

저건 좋지 않은 반응인데…….

어차피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었으니 경우는 일단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경우의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 윤정숙이었다.

“오늘 점심이나 같이했으면 하는구나.”

가뜩이나 심란한 이때 혹시라도 제작사 일은 그만두고 다시 건설사로 들어오라고 하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하던 경우는 약속 장소인 ‘더 퍼스트 밀레니엄 호텔’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 오랜만이죠.”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곳엔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 여사님이 너를 한번 만나 보고 싶으시다고 해서 불렀다.”

지난 연말 모임에서 처음 만났던 재경 그룹의 손주옥 여사가 경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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