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57화 (57/250)
  • #57.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 (3)

    100퍼센트 사전 제작이라고 알려진 미국 드라마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파일럿 시스템이었다.

    국내에선 예능을 파일럿 형태로 만들어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고 정규 방송으로 편성했지만 미국은 드라마가 이런 시스템이었다.

    1~2회 맛보기 형식으로 방송을 하고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시청률이 저조하면 탈락하고 다른 프로그램으로 교체되는 식이었다. 만약 반응이 좋아 여기서 통과되면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제작에 들어가는 거였다.

    계약서 작성을 마치자 꼼꼼하게 다시 살펴본 로이드가 각자 계약서를 나눠 주고 자신도 보관용으로 한 장 챙기면서 물었다.

    “그럼 이제 파일럿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겁니까?”

    “네. 파일럿에 맞는 만들 대본도 이미 준비되었고 섭외할 배우들 목록도 미리 작성해 두었습니다. 제작비를 투자 받지 못해 올스톱 된 상태였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죠. 월급도 제대로 못 줘 파트타임 뛰러 간 작가들도 다시 불러야겠습니다.”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제임스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꼽으며 살짝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혹시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제 전화로 연락 주세요.”

    로이드의 말에 잠시 그의 명함을 보던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데이존스 로펌이면 혹시 칼 브라이트라고 아십니까? 제 친군데.”

    갑작스러운 칼 브라이트의 등장에 경우가 고개를 들었다.

    “잘 알죠, 저하고 같은 층에서 일합니다. 제임스 씨가 칼 씨 친구셨군요.”

    “뭐, 그렇죠. 그 친구 요즘은 어떻게 지냅니까? 전화로밖에 이야기를 못 해서 말이죠.”

    “안 그래도 지금 준비하고 있는 소송이 꽤 까다로워서 바쁘세요. 휴가도 반납하고 일에 파묻혀 지내십니다.”

    “허허. 다행이네요. 일 없이 지내 보니까 알겠어요. 차라리 바쁜 게 낫지 일을 못하며 사람이 참…… 어쨌든 만나면 이야기나 잘 전해 주세요. 저도 바쁘게 되었다고요.”

    “네. 그러죠.”

    제임스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었으나 그냥 입을 닫아 버렸다.

    경우는 혹시라도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경우는 칼 브라이트와 서필진이 어떻게 연결된 것인가 싶었는데 한국 사람인 로이드 최가 그 연결 다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계약을 마친 경우는 제임스와 악수를 나누고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선 어느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 호텔로 돌아갈 거지? 아, 쉬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으려니까 정말 피곤하다.”

    “나는 갈 데가 있어. 먼저 들어가.”

    “뭐가 그렇게 바빠? 쉬엄쉬엄하지.”

    “참, 깜빡할 뻔했네. 잠깐만.”

    경우가 카드를 꺼내 김강철에게 내밀었다.

    “자, 이건 보너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경우의 카드를 받아 든 김강철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내 옆에 붙어 다니는 거 싫을 거 아니야. 호텔로 들어가서 여독을 풀든 쇼핑을 하든 앞으로 이틀간은 알아서 해.”

    “정말이지? 나 진짜 마음대로 긁는다.”

    “그래, 어디까지 긁나 너의 배포를 보자.”

    “무르기 없기!”

    “한 번 뱉은 말은 지킨다.”

    “아싸! 근데 여기서 찢어지면 너 이동은 어떻게 하려고?”

    “여기 로이드 씨한테 미리 부탁했어. 아이구, 그래도 걱정은 되나 보다.”

    “뭐래, 길 잃었다고 나 불러낼까 봐 그러지. 그럼 난 이만, 나중에 호텔에서 보자.”

    뒷일까지 대비한 덕택에 김강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 가 버렸다. 저렇게 신나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약이 오르기도 했지만 갑작스러운 미션을 잘 해결한 친구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부려 먹을 일이 많았으니 보상은 확실히 하는 편이 좋았다.

    어쨌든 뉴욕까지 왔는데 브로드웨이를 안 보고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

    김기영으로부터 로이드가 이쪽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미리 들은 경우는 로이드에게 브로드웨이를 안내해 줄 것을 부탁했다.

    “김기영 변호사님께 듣기론 최 변호사님도 연극인이셨다고 하시던데요?”

    경우의 말에 로이드가 수줍게 웃었다.

    “뭐. 그랬던 시절도 있었죠. 근데 현실을 깨닫고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좋아하기만 했지 연기 재능은 눈곱만큼도 없었거든요.”

    “확실히 연기를 하려면 끼라는 거 무시 못 하죠.”

    “네, 노력만 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노력만으로 가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제 길을 찾았으니 다행인 거죠.”

    “불행한 배우가 될 바에야 행복한 관객이 되는 길을 선택하셨군요.”

    “맞습니다. 작가라고 하시더니 비유가 탁월하시네요.”

    몇 번 나가지 못한 드라마 아카데미였지만 첫날, 선생님은 그런 말을 했다.

    ‘불행한 작가가 되기보다 행복한 시청자가 되라.’

    창작에 대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느니 여기서 그만두고 드라마를 편한 마음으로 보는 시청자가 되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고.

    어느 분야든 고통이 따르지 않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경우는 작가가 돼서 얻는 고통보다 되지 못했을 때의 고통이 더 컸기에 결국 불행한 작가가 되었지만 행복했다.

    어쨌든 조금 전 칼 브라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경우는 그 부분에 대해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미국엔 이민을 오신 건가요?”

    “네, 고등학교 때요.”

    “한창 사춘기 때였을 텐데…….”

    “네, 사실 제가 그땐 영어를 그렇게 능숙하게 하지 못해서 반대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사기를 당하셔서 한국은 꼴도 보기 싫다고 도망치듯 떠나온 거거든요.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 버리니 적응을 잘 못했습니다.”

    “힘드셨겠어요.”

    “네, 그러다 연극에 빠졌죠. 그때 어쩌다 보니 알고 지낸 한국인 친구가 있어요. 순전히 그 친구 때문이었죠. 그 친구가 틈나면 저를 연극 공연하는 곳에 데리고 가 줬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싶어서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했죠.”

    “그래도 좋은 친구였나 보네요. 사춘기 때 친구 잘못 사귀면 나쁜 길로 빠지고 그러는데 변호사님은 결국 이렇게 잘되신 것 보면 말이죠.”

    “참 좋은 친구죠. 아, 혹시 작가님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친구 얼마 전 제작사에 파견되었다고 관련된 업무를 본다고 했거든요. 저 보고도 이쪽에 괜찮은 투자할 곳 없는지 묻는 통에 좀 곤란했거든요.”

    “그 친구 이름이……?”

    “서필진이요. 뭐라더라, 유니언 스튜디오? 뭐 그랬던 것 같은데. 혹시 아세요?”

    “아, 유니언 스튜디오면 유명한 곳이죠. 근데 친구분은 아직 못 만났네요.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같은 업계 종사하다 보면 조만간 만나겠죠.”

    경우의 말에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그렇게 된 거였구만.

    어쨌든 투자 문제가 해결된 제임스가 다시 투자자를 찾는 상황은 오지 않을 테니 경우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세상 참 좁다고 하던데 이런 식으로 인연이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브로드웨이에 도착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인터넷 예매가 모두 매진된 바람에 현장에서 티켓을 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무엇을 볼까 싶어 고민하던 차에 경우는 공연장에서 무료로 나눠 주는 Playbill을 하나를 챙겼다. 배우와 프로덕션에 대한 정보가 쓰인 Playbill을 살펴보던 경우는 마침내 하나를 골랐다.

    “‘오페라의 유령’ 혹시 남았을까요?”

    “잠시만요.”

    다행히 ‘오페라의 유령’ 티켓이 남아 있어 두 사람은 공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한국에서도 종종 뮤지컬을 보기는 했지만, 영국 웨스트엔드와 함께 뮤지컬이 본고장으로 통하는 브로드웨이에서 보는 공연은 색다른 즐거움을 줬다.

    이미 수십 번은 더 본 것 같은 로이드도 공연이 끝나자마자 손바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저렇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어떻게 이성적인 법을 다루는 일을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안 갈 지경이었다.

    “정말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네. 이런 공연은 저도 처음이네요.”

    “여기는 브로드웨이니까요.”

    흥분한 로이드의 모습에 경우가 살짝 웃었다.

    “저기, 이 꽃다발을 배우분께 감사의 인사로 전해 드리고 싶은데 직접 만나는 건 불가능하겠죠?”

    혹시 몰라 경우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 공연장 앞에서 팔고 있던 꽃다발을 하나 샀다.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던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음, 아무래도 어렵겠죠. 보안 문제도 있고 크리스틴은 인기 배우니까요. 그래도 모르니 잠시 기다리세요. 제가 여기 관계자를 아니까 좀 부탁해 보겠습니다. 직접은 못 만나도 꽃다발만은 전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크리스틴이 아니라…….”

    ‘오페라의 유령’에서의 꽃은 당연히 크리스틴이었으니 로이드는 경우가 그녀에게 꽃을 주고 싶어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Playbill을 본 순간 경우는 이곳에 온 것이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우는 의아해하는 로이드에게 Playbill에 나온 배우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자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 배우라면 직접 꽃다발을 전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로이드가 떠나고 얼마 후, 로이드는 관계자와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안내를 받은 경우와 로이드는 공연장 뒤쪽 분장실로 향했다.

    좁고 긴 복도의 끝, 개인 분장실조차 허락되지 않은 한 단역 배우가 복도 한쪽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환하게 미소 지은 경우가 그에게 꽃다발을 거넸다.

    “Jun Richards, I’m a fan of yours. I enjoyed your performance today.”

    “Me? You mean me?”

    본인조차 이 상황에 얼떨떨해하며 꽃다발을 받았다.

    “정말 이분이 맞으신 겁니까?”

    로이드가 경우에게 한국말로 작게 이야기하자 준 리차드가 소리쳤다.

    “혹시 한국분이십니까?”

    능숙한 한국어에 로이드가 당황하며 말했다.

    “하,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어머니가 한국분이시거든요.”

    준 리차드.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배우가 되기 위해 브로드웨이의 단역부터 시작하지만 행운은 그에게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왔던 그는 광고 에이전시의 캐스팅 관계자의 눈에 띄어 한국의 스포츠 음료 광고의 모델로 첫발을 디디게 된다.

    혼혈의 이국적이면서 신비로운 외모와 한국인 어머니 덕에, 능숙한 한국말로 드라마 카메오 출연에 이어 비중 있는 역할까지 하게 된 그는 한국에서 필모를 쌓는 것을 시작으로 끝내는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흙 속의 진주라고 하더니 이런 곳에서 우연히 준 리차드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이곳까지 온 기념으로 집에 가져갈 생각에 챙긴 Playbill에서 그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이런 만남은 없었을 터였다.

    “제가 이쪽 일을 하고 있어서 어떻게 준 리차드 씨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이것도 인연인데 여기.”

    경우가 명함을 건넸다.

    “스튜디오 글로리 대표님?”

    “한국에서 조그만 드라마 제작사를 하고 있습니다. 혹시 한국에 오실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아, 네.”

    경우는 혹시나 싶어 한글과 뒷면엔 영문으로 된 명함을 판 걸 다행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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