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56화 (56/250)
  • #56.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 (2)

    미국의 연말 연휴는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친한 이들과 모여 집안에서 파티를 즐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해서 중심가가 아니라면 거리를 오가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그를 기다리는 가족도, 그의 하소연을 들어줄 친구도 없었던 제임스는 홀로 너저분한 그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가진 걸 다 털어 얻은 이 사무실에서 꿈을 꾸며 잘될 거라고 희망에 가득할 때도 있건만.

    지금은 그런 희망조차 사라져 버렸다.

    투자를 위해 온종일 사람들을 만났지만 모두 다 거절했다.

    철옹성 같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뒤 금융 회사들 역시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당에 작은 드라마 제작사에 투자할 사람은 없었다. 그 역시도 언제 사무실을 비워 줘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 당장 얼마간의 돈이라도 융통된다면 모를까 빚만 늘어가는 형편이라 암담하기만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고민에 빠진 그는 마지막으로 칼에게 전화를 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예전에 지나가면서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전화가 울렸다.

    “Hello?”

    [Hello? Mr. Roygan, Please.]

    능숙하지 않은 영어 발음이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그가 물었다.

    “내가 제임스 로이건인데 누구시죠?”

    [아, 혹시 거기가 배드 보이 프로덕션입니까?]

    “그렇습니다만.”

    [배드 보이 프로덕션에 투자를 하고 싶어서요. 그 문제로 상의드릴 게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투자?

    하루 종일 투자자를 찾아다니느라 녹초가 된 탓인지 제임스는 투자라는 말에 웃음부터 나왔다. 물론 자신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진짜 투자를 할 생각이 있었다면 말이다.

    더듬더듬 서툰 영어 발음을 듣다 보니 미국 사람이 아닌 것 분명했다. 혹시나 싶어서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한국.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에서 자신에게 투자를 한다니 말도 안 되지.

    최근 투자를 받으려 뛰어다녔더니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한 사기라는 생각이 든 제임스는 적당히 호응해 주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고 말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알겠는데 나한테는 더 이상 털어 먹을 것도 없다고.”

    안 그래도 없는 기운이 팍 꺾이고 나니 제임스는 더 이상 일어날 힘도 없었다. 그대로 소파에 벌렁 누워 버렸다.

    * * *

    제임스 로이건.

    각본가로 먼저 데뷔한 그는 시나리오는 물론 영화와 드라마 연출까지 영역을 확대한다. 급기야 제작사를 설립,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드라마를 제작하지만 시대를 앞서 나간 탓인지 그의 드라마는 흥행에 실패하게 된다.

    연이은 실패 탓에 투자자도 떠나가고 미국에 금융 위기까지 겹치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지만 칼 브라이트를 통해 서필진을 알게 되면서 유니언 스튜디오의 투자로 마침내 날개를 단다.

    단순히 성공적인 투자만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제임스 로이건이란 인물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으니 아시아인은 돈만 밝힌다고 생각했던 그는 모두가 외면하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손 내밀어 준 그 덕에 아시아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된다.

    유니언 스튜디오와 끈끈한 인연을 유지한 그는 급기야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의 연출에 나서기에 이른다.

    한국의 영화감독들이 해외에 나가 영화와 드라마를 연출하는 일은 드물긴 해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시장의 규모나 제작 방식과 문화가 다른 한국 드라마를 미국 감독이 연출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었으니.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부터 결국 그가 연출한 한국의 드라마는 역으로 미국으로 수출되고 유니언 스튜디오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리게 된다.

    거기에 앞으로 배드 보이 프로덕션이 제작한 영화의 한국 배급을 유니언 스튜디오가 맡게 되면서 배급사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된다.

    그러니 유니언 스튜디오가 했던 투자자의 자리를 먼저 선점할 수 있다면 두고두고 은혜를 갚을 복덩이가 굴러 들어오는 것이다.

    호텔에 간단히 짐을 풀고 곧장 맨해튼으로 향한 경우와 김강철은 배드 보이 프로덕션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떨리는 마음으로 노크를 한 경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넓은 사무실의 작은 소파 위엔 덩치가 산만 한 한 남자가 쪼그린 채 누워 있었다.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빈 맥주 캔이 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아직 투자자를 구하지 못한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지저분한 몰골에 김강철의 얼굴은 찌푸려졌지만 경우는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Exesuse me. Mr. Roygan?”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깬 제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요?”

    “한국에서 온 Mr.Min이라고 합니다. 투자 건으로 상의할 게 있다고 전화드렸을 텐데요.”

    당신이 하는 일에 돈을 대 주겠다며 제 발로 찾아온 사람을 순순히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그 말을 날더러 믿으라는 거요?”

    “믿지 않으면요? 투자자 구하고 있으셨잖아요.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럼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이라도 있어서 동양인 투자는 받고 싶지 않다, 뭐 그런 건가요?”

    “그렇다기보다는…….”

    말을 잇지 못하는 제임스의 모습에 경우가 사무실을 둘러봤다.

    “있다고 해도 지금은 실속을 차리세요. 한국에는 그런 말이 있어요.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다.”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다?”

    “나도 한국에서 드라마를 쓰는 사람입니다. 로이건 씨도 시작은 각본가이지 않습니까?”

    “제임스라고 불러요. 뭐, 지금도 그렇습니다.”

    동양인에 대한 그가 가진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경우는 그가 쓴 드라마와 영화는 물론 망해 버린 드라마에 대한 문제점까지 이야기했다. 생각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경우의 모습에 제임스는 놀랐다. 이 정도의 성의라면 솔직히 사기꾼이라도 그가 하는 말 정도는 들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투자를 하려고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왔는데 여긴 손님 대접도 안 해 주는 모양이죠?”

    “아, 잠깐 기다리세요. 사무실에 있는 거라곤 어제 저녁에 사온 맥주 캔밖에 없네요.”

    “좋네요. 미국 맥주 맛이 어떤가 좀 보죠.”

    그렇게 말하고는 미소 짓는 경우의 모습이 제임스에겐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천사가 나타난 건가, 아니면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온 건가?”

    “천국 갈 정도로 좋은 일 많이 했나 보죠?”

    속으로 생각을 한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에 제임스가 당황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천천히 이야기해 봅시다. 천사가 온 건지 악마가 온 건지 얘기해 보면 알 수 있겠죠.”

    경우의 곁에 보디가드처럼 서 있는 김강철은 모든 게 못마땅했지만 미리 주의를 들었던 탓에 하고 싶은 많은 말을 그저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가 냉장고에서 꺼내 준 맥주는 무척 시원하고 맛있었다. 그런 경우의 눈치를 보던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네, 그러세요. 뭐가 궁금합니까?”

    “왜 나한테 투자를 하겠다는 거요?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고 하죠. 그래서 꿈을 갖는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미국으로 모여듭니다. 재능이 차고 넘치는 사람은 많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다 두고 나한테 투자를 하겠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요?”

    이번 위기만 넘기면 당신의 앞은 승승장구,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거고 거기에 숟가락 좀 얻으려고 그런다는 말을 할 순 없었다.

    “일단 나도 한 사람의 창작자입니다. 창작을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죠. 당신의 이야기에는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

    “당신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당신이 만든 이야기를 더 보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제임스 당신을 어딘가 가둬 놓고 군만두만 먹이면서 일만 하게 만들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투자라도 해야죠.”

    “Oh, Old Boy!”

    다행히 이야기는 통했다.

    어쨌든 다른 거 생각할 거 없이 드라마 만드는 일에만 전념하게 만들고 싶었다.

    “할 이야기 다 했으면 본론으로 넘어가죠. 얼마가 필요합니까?”

    제임스가 입을 달싹이려던 찰나, 누군가 허둥지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는데 마침 소리의 주인공이 문을 노크했다.

    “혹시 한국에서 오신 민경우 씨?”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한국말에 그가 누군지 경우는 알 수 있었다.

    까치집이 지어진 머리하며 체크 남방, 두꺼운 뿔테 안경.

    아무리 봐도 공대생 패션인데 문, 이과의 조합인가? 솔직히 변호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변호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으니 오죽했으면 드라마 제목도 그랬을까, 슈트라고.

    포마드로 넘긴 머리에 꼭 맞는 슈트 차림을 생각했지만 그는 영 딴판의 이미지였다.

    “네, 제가 민경우입니다만.”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기영 변호사 연락받고 온 로이드 최입니다.”

    김기영이 같이 오면 좋았겠지만 갑자기 결정된 일정이었으니 그건 무리였다. 해서 뉴욕에 변호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없나 물었다. 다행히 김기영의 친구가 뉴욕의 유명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해서 온 사람이 바로 로이드 최.

    통성명이 끝나자 로이드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리기 시작했다. 변호사까지 대동한 상황에 본격적인 투자 이야기가 오가니 제임스도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준비도 끝난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보죠. 얼마가 필요하죠?”

    “100만, 아니 200만 달러. 그 정도면 시작은 될 것 같습니다.”

    너무 큰 액수를 부르면 겨우 온 기회마저 달아날까 싶어 고심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경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제임스는 그냥 100만으로 할걸 그랬나 싶어 후회했다.

    “1,000만 달러로 하죠. 진행 상황을 봐서 5,000만 달러까지 투자를 하겠습니다.”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란 제임스는 두 말 않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생각이었는데 어차피 경우의 요구 조건이 까다로운 것도 아니었으니 제임스 입장에선 천사가 내려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니 김강철.

    일찌감치 계약서에 사인한 경우를 불러낸 김강철이 따지듯 물었다.

    “야, 너 거덜날 일 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000만이면 대충 따져도 100억이잖아. 거기다 500억? 드라마 망하면? 너 알거지 되는 거야.”

    “아예 망하라고 고사라도 지내지 그러냐?”

    “걱정되니까 그러지. 넌 어떻게 된 게 이 나이 먹어서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냐?”

    “쓸데없는 걱정이랑 넣어 둬라. 내가 누구야!”

    “새명이 언제까지 네 치트키가 되어 주진 않을 거야.”

    “내가 언제 새명만 믿고 있었다고 그래?”

    “새명이 아니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데?”

    “강철아, 자고로 경제가 바닥을 친다는 게 뭘 뜻하는 줄 알아?”

    “뭘 뜻하는데?”

    “부자들이 돈을 긁어 모을 때가 되었다는 거.”

    사람들은 말했지. IMF 이후 가장 돈 벌기 좋았을 때가 미국의 금융 위기 직후였다고. 한국에서의 자산은 석주가 불려 줄 테고 제임스의 드라마는 망하지 않을 텐데 무슨 걱정. 거기다 며칠 후면 2009년이었으니.

    경우는 한쪽 제임스의 책상 위에 놓인 대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제임스, 혹시 이번에 제작하기 위해 투자받으려 했던 드라마가 이건가요?”

    그러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대본을 다시 자리에 내려놓은 경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첫 방송 직후 인기 몰이에 나서 시즌 10까지 나왔던 드라마 <크리미널 리포트>의 대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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