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55화 (55/250)
  • #55.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 (1)

    “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왜? 타임 스퀘어에서 새해를 맞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태연하게 말하는 경우의 모습에 김강철의 얼굴이 짜게 식었다.

    “너랑? 미쳤냐? 일 좀 열심히 하는 것 같더니 제 정신이 아니구나.”

    “야, 어차피 집에 있어 봐야 TV로 보신각 종소리 듣는 것밖에 더 하겠냐? 불러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방구석에서 뒹구는 놈 구제해 줬더니. 또 혹시 알아? 너의 피앙세가 이역만리 타국에 사는 금발 미녀일 수도 있잖아.”

    “금발의 미녀?”

    잠시 행복의 상상을 펼치는 김강철의 얼굴에 경우는 결국 혀를 차고 말았다.

    한국에선 연말 시상식이 펼쳐지고 있는 이때, 경우는 김강철과 함께 미국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김동권에게 스케줄이 있어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방송을 통해 자신을 대신해 우재환이 작가상을 수상하는 모습을 공항에서 확인한 경우는 함께 일한 식구들이 수상하자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윤정숙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신 씨가 갈 테니까 준비하고 따라오면 된다.]

    어쩐 일로 직접 전화하나 했더니 스케줄을 묻던 어머니 윤정숙은 어디를 가야 한단 말도 없이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김예신이 경우의 집으로 찾아왔다. 물론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온 사람들에 의해 머리는 물론 얼굴까지 찍어 바르고 김예신이 가져온 슈트를 갈아입으니 시상식에 참여하는 배우들 못지않은 훈남으로 탈바꿈했다.

    “민 작가님 원래도 이사장님 닮아서 잘생기셨는데 이렇게 꾸며 놓고 보니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 못지않네요.”

    “누나, 우리 둘이 있을 땐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줄래요. 그냥 예전처럼 불렀으면 좋겠는데.”

    김예신이 오랫동안 정숙의 곁을 지켜왔던 만큼 경우 역시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는 누나라고 부르며 제법 따르던 때도 있었기에 김예신은 그런 경우의 마음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둘이 있을 땐 편하게 하자. 하지만 이사장님 계실 땐 안 돼. 알지?”

    “네. 지금 바로 나가야 할 거 아니죠?”

    “응. 아직 시간 넉넉해.”

    “그럼 커피나 한잔해요. 아, 집에 믹스 커피밖에 없는데 괜찮아요?”

    “직접 타 주는 거야?”

    “그럼요. 저희 집에 오신 손님이잖아요.”

    “좋아. 나도 믹스 커피 좋아해.”

    잠시 후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뭐. 그렇지.”

    “전 누나가 그때 유학을 가실 줄 알았어요.”

    “그랬지.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눌러 앉아 있지만 이 생활도 그렇게 나쁘진 않아.”

    편한 듯 이야기했지만 경우는 그녀의 눈빛 속에 깊은 그림자도 함께 보았다. 예신도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기에 경우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 버렸다.

    “참, 오늘 도대체 어딜 가는데 그러는 거예요?”

    “손 여사님이라고, 재경 그룹 김 회장님 모친이신데 생신이셔. 그래서 해마다 가깝게 지내는 사모님들도 함께 송년회를 겸해서 모임을 갖지.”

    “거기…… 혹시 준호 형이 늘 가던 곳 아니에요?”

    “맞아. 대신 가는 것 같아 좀 그래? 그럼 좀 어때. 너도 알다시피 그 모임에 사모님들만 오는 것도 아니고. 이 기회에 다른 기업 자제들하고 인맥도 쌓아 두면 좋잖아.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그게 어떤 식으로든 쓸모 있지 않겠니?”

    김예신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경우는 김예신이 모는 차를 타고 더 퍼스트 밀레니엄 호텔로 향하면서 참석하기로 한 사람들에 대해 되도록 상세히 들었다.

    * * *

    “얘가 저희 집 막내예요.”

    “안녕하세요, 민경우라고 합니다.”

    오늘 모임의 주인공인 손 여사는 여든이 가까운 나이였지만 하프 마라톤을 뛸 정도의 건강한 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오히려 경우의 손을 잡는 그녀의 악력에 경우가 밀릴 정도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작가 선생님? 반가워요. 나 손주옥이라고 해요. 어머니 닮아서 아주 미남이네. 윤 이사장, 며느리 보셔야겠어.”

    “저도 그러고 싶은데 얘들이 하나같이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 걱정이랍니다.”

    “하긴, 요즘 젊은 사람들 어디 결혼에 관심이나 있나. 자기 일 하기 바쁘지.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손 여사를 필두로 모임에 참석한 다른 사모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니 억지로 미소 짓던 경우는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사회 생활이 쉽지 않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한참을 이어진 인사가 마침내 끝이 나자 경우는 또래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미 어릴 때부터 친분이 있었던 터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경우의 모습에 반가워하는가 하면 그가 가업이 아닌 작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에 신기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업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잠시, 한쪽엔 어머니들이 있었으니 점잖을 빼고 있어야 하는 게 고역이기도 했던 터라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경우는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따분한 시간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는 얼굴이 뒤늦게 도착했다.

    대진일보의 박현호였다.

    “주인공 납셨네.”

    “쟤는 예전에도 그러더니 지금도 저러냐.”

    “놔둬라. 저 맛에 사는 거지. 요즘 뭐 종합 편성인가? 그거 어떻게든 법 통과시키려고 정신없잖아.”

    “누구는 안 바쁘나. 근데 그거 하면 어떻게 되는데?”

    “말 그대로 종합 편성이잖아. 지상파처럼 이것저것 다 만들 수 있으면서 24시간 방송되고 거기다 중간 광고도 넣고. 그럼 광고 수익 장난 아니겠지.”

    “돈을 아주 쓸어담겠구만. 어우, 저 자식 더 배부를 생각하니 꼴 보기 싫어.”

    뒤에선 신랄하게 씹어 대더니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악수를 했다. 이런 자리에선 확실히 자리를 비우면 손해였다.

    선거 유세라도 나온 건지 하나씩 악수를 하는 모습에 경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게 누구야? 경우 아니야?”

    “그래, 오랜만이다.”

    “어쩐 일이야? 이런 모임엔 안 나오는 것 같더니.”

    “어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지 뭐. 넌 요즘 어떻게 지내?”

    “종편 때문에 정신없어. 참, 너 제작사 인수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인수는 무슨. 그냥 바지 사장이야.”

    “하여간 예전이나 지금이나 말을 참 재미있게 해. 참, 채널권 생기면 드라마 제작을 할까 해서 나도 제작사에 투자를 하고 있어.”

    “그래? 어딘데?”

    “뭐더라? 아, 유니언 스튜디오.”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회 봐서 자회사로 편입할까 해.”

    거기가 대진 자회사였던가?

    그런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지 못했던 경우는 잠시 생각을 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자리가 편한 것도 아니고 할 말도 어느 정도 한 것 같아 기회를 봐서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데 한 남자가 현호의 옆으로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하는 그의 모습을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생겨서 먼저 가야 할 거 같다. 다음에 보자.”

    “그래.”

    “경우 넌 나중에 밥이나 한 끼 하자. 할 이야기도 많은 것 같은데.”

    “뭐, 그러든지.”

    그렇게 박현호가 남자와 같이 나가는 모습을 본 경우가 물었다.

    “근데 저 사람은 누구야?”

    “넌 이런데 잘 안 나오니까 모르는 모양이구나. 현호 비서. 듣기론 현호가 미국 유학 시절에 스카우트해 왔다고 하던데. 실력이 괜찮은 모양이야. 근데 왜?”

    “아니, 어디서 본 것 같아서.”

    “그래? 어릴 때 미국 이민을 가서 이쪽엔 아는 사람 없다고 들었는데? 흔한 얼굴인가?”

    “근데 이름이 뭐야?”

    “뭐더라? 그래, 서필진.”

    기억이 날 듯 말 듯 분명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잘못 안 건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던 순간, 유니언 스튜디오를 말하던 현호의 얼굴과 서필진의 얼굴이 겹쳐지더니 경우의 머리를 강하게 스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 사람!”

    마침내 남자의 정체를 떠올린 경우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쪽으로 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도련님, 웬만하면 퇴근 후에는 전화하지 맙시다. 가뜩이나 요즘 너 아니어도 일 많거든.]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데?”

    [요즘 수현이 찾는 사람이 많아서 잡지 촬영이니 다음 시즌 화보 촬영이니 정신없다고.]

    늘어지는 하품 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일에는 때가 있는 게 아니었으니.

    “미안한데 중요한 일이야. 제임스 로이건이라고, 미국에서 드라마 제작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 제작사가 이름이 뭔지,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 줘. 가능하면 투자 건으로 접촉하고 싶다고 미리 연락도 좀 하고.”

    [야, 이 썩을. 아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한국도 아니고 미국?]

    “할 수 있잖아. 어차피 미국은 지금 밤도 아니야. 새벽이어도 괜찮으니까 부탁해.”

    뒷말이 더 나오기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투덜대기는 해도 시키는 일은 무리 없이 처리하는 김강철이었으니 경우는 시계를 보며 그에게서 전화가 오길 한참 기다렸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모임도 끝이 났지만 기다리는 김강철로부터 전화는 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오늘 안으론 전화가 오지 않으려나 싶은 그때 김강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알아냈어?”

    [뉴욕, 배드 보이 프로덕션.]

    “투자를 하겠다니까 뭐래?”

    [야, 세상 천지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냐? 근데 한국 사람이라니까 조금 시큰둥하기는 하더라.]

    “갈 거라고 전해. 아, 비행기표랑 숙소 예약도 좀 부탁해.”

    [엥? 정말로 가게? 무슨 일인데?]

    “어차피 너도 같이 갈 거니까 가면서 이야기해 줄게.”

    [그게 무슨. 야, 지금 연말연시거든. 휴가를 줘도 모자랄 판에 팔자에도 없는 출장? 내 스케줄을 왜 네 마음대로 정하는 건데?]

    “내 비서니까. 잊은 거 같은데 넌 내 개인 비서야. 출장 가는데 비서가 당연히 같이 가야지.”

    [이놈의 회사, 내가 꼭 때려치우고 만다, 내가.]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될 거야. 비행기표 끊으면 연락 줘. 비용은 석주한테 말해서 개인적으로 처리하고.”

    [내 자리만 퍼스트로 끊을 거야!]

    “그러든지.”

    전화를 끊은 경우는 김종수에게 당분간 출근을 못 하겠다며 연락을 한 뒤 집으로 가 짐을 챙겼다.

    * * *

    “그래도 연말인데 다행히 비행기표가 있었네?”

    “없었어야 했는데 왜 하필 퍼스트 클래스만 남은 거야…….”

    “네가 운이 좋았나 보다. 안 그러면 방구석만 긁고 있었을 거잖아.”

    “야,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나도 바쁜 사람이야.”

    “뭣 때문에? 게임 정모? 그 정모 지난번에 남들끼리만 득실거린다고 뭐라 하지 않았냐? 연말연시에 남자들끼리…… 갔으면 참 행복했겠네.”

    “아, 내 사정 잘 아는 상사 정말 짜증난다.”

    “알았어. 일정 끝나면 관광할 시간도 줄게. 그래도 명색이 뉴욕까지 가는데 그냥 오기야 하겠냐.”

    “진짜지?”

    “보너스로 여행 경비도 챙겨 줄 테니까 쇼핑이나 하던지.”

    “도련님. 앞으로 충성을 바치겠습니다요.”

    “언제는 그만둔다고 하더니.”

    “원래 직장인이란 가슴 속에 사표 하나쯤은 품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근데 무슨 일인데? 제임스 로이건은 또 어떻게 알고.”

    “자고로 배고플 때 도와준 사람은 못 잊는 법이다.”

    “엥?”

    이전 삶에서 경우는 서필진, 그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훗날 유니언 스튜디오가 국내를 넘어 해외에 까지 영향력을 뻗는 제작사가 된 데에는 서필진 그의 공이 컸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발굴한 제임스 로이건에 의한 것이었으니.

    지금이라도 그 자리를 서필진이 아닌 자신이 선점한다면 유니언 스튜디오가 배드 보이 프로덕션과 함께했던 일이 자신의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길가다가 주인 없는 돈이 떨어져 있으면 넌 어떻게 할래?”

    “당연히 줍지. 주인도 없는데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 아니냐?”

    “그렇지? 그게 당연한 거지?”

    김강철의 말에 경우가 확신하며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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